한 작가는 문학을 위해, 독자를 위해 삶의 다양한 광경을 재구성한다. 천재로 태어나는 주인공을 탄생시켜 그 주인공으로 하여금 열정에 사로잡혀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다니게 만들고 사랑에 빠지게 한다. 적당한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내기 위해 막 딴 치커리와 꽃상치를 잘 포개 만든, 여름 점심의 쌈밥을 만들기도 하고 연인 앞에서 처음으로 벗은 몸처럼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교차하는 하얀 살을 그리기도 하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일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던져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소설을 창작한 게 아니라 앞으로 쓸 소설처럼 자신의 삶을 먼저 창작했다고. 아이 김해경이 쓴 소설이 위대한 작가 이상이라고.위대한 작가 이상의 작품은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고....김해경이 드디어 작가 이상의 가면을 완벽하게 쓰게 됐다는 것. 물이 얼음으로 바뀌었다는 것, 알이 더이상 새를 품지 못하게 됐다는 것, 아이가 아버지가 됐다는 것, 밤이 낮으로 변해갔다는 것. 위대한 작품 이상이란 각혈한 몸으로 총독부 기수직을 뛰쳐나와 다방을 경영하고 난해한 시를 쓰다가 도쿄에서 죽는 삶이다. 김해경이 사라지고 이상이 영원했다. 삶이 먼저였고 문학이 나중에 왔다. 삶은 사라졌고 문학은 남았다. 그가 죽고 문학은 남았다. 이상은 죽고 데드마스크는 남았다 <꾿빠이,이상>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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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4: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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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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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4: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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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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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5: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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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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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그늘아래 맥문동이 제 세상이다. 한창이었던 것들이 숙어 꼬부라지고 빳빳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것들은 또 그대로 싱싱하다. 더위 끝에 피기 시작하는 나무 백일홍도 지난 주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매미 소리에 귀는 째지고, 폭염이 모든 감각을 지배하는 나날들.

 

2016년 여름은 기억될 만 하겠다.

 

짧은 여행을 앞두고 널부러진 마음을 추스리는 의미에서 요즘 들고 다니던 얇은 책을 정리한다. 더위가 어디 나서고 싶은 마음조차 싹 데려가 버려서 어떤 책을 들고 갈까 고르다가 보면 억지 설레임이라도 좀 찾아와 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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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잠복>일부분

 

 

 

당신은 좀처럼 나에게 올 줄 모른다

그래요 정말 화가 날 일이야

나는 생선을 뒤집어서 한 입 크기로 떼어낸다

나라면 더했을 텐데 대단해 당신

줄지 않는 밥 위에 생선 살을 올려주고

 

이럴 때 당신은 꼭 내가 낳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낮잠>일부분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당신은 양동이에 물 찬 생선을 담아 왔다

.

.

듣는지 마는지 당신은 아가미처럼 터진 주머니를 살피고

나는 비늘처럼 흘기며 생선을 집적인다

.

.

다음 생에는 여자로 와요

당신도 다 이걸 겪어봐야 알지

 

나는 다시 안 올거야

 

당신이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모른다

<소설> 일부분

 

새벽을 기다리다

늦도록 지루해진 골목길에는

잠시 텅 빈 틈을 타고 담벽락이 눕기도 하네

나는 닳고 닳은 골목길

자꾸만 떠나려는 너를

아귀가 맞지 않아 뻐근한 쪽문을 열고

놓아주네 휘어질 듯 졸던 담벽락이

문소리에 놀라 한번 크게 소스라치고

깨어나네 일제히

기립하여 네가 가는 길을 가만히

열어주네 내 흐린 시선이

가 닿을 수 없는 골목의 저 편

모퉁이를 돌다 말고 가던 길 돌아보던 네가

길 지우는 저녁마다 푸른 영혼으로 꺾어진

담벼락에 스미네

 

<푸른 모서리> 전문

 

유진목은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특이하고도 독특한 시적 순간을 연애의 사건으로 시를 만들어낸다. '그리움'은 오히려 생활에서 표현된다. 생활을 꿈꿔보는 것, 지위를 가져보는 것, 타인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상상을 해보는 것, 이 과정을 소박한 말로 펼치지지만 청승도 넋두리도 체념도 아닌, 독특한 추체험의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우리의 눈을 이리저리 바쁘게 하고 우리의 호흡을 조절해 나간다. 눈동자에 눈물을 고이게 할 뿐, 흐르거나 넘치지 않게, 가슴이 저리지만, 찢어짐을 허용하지 않는 문법이 시를 읽는 연애의 뛰어난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는 감정에 젖어들게 우리를 안내하지만, 그러나 자연스레 저 과장을 방지하는 호흡으로, 때론 문장과 문장의 격렬한 운동으로, 연애와 그 마음을 비끄러매는 작업으로, 마음과 글이 서서히 좁혀나가는 그런 시를 쓴다. 아주 농밀하면서 처연하고, 침착하면서 애잔하며, 격렬하면서 절박한 연애시가 여기서 탄생한다.

조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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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8: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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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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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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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8: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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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1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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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축축하고 어둑했다. 정확한 여름의 경계는 어느 지점일까. 계절의 경계는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는 물기가 돌고 바람이 불고, 그것들은 경계를 구분 짓는 동시에 뭉개버린다. 계절은 세상에 습기처럼 퍼져있지만 저 나름의 시간으로 고유하고 만들기 나름의 공간으로 개인에게 존재한다.

 

나리가 여름을 여는구나. 생각을 했다. 도심 화단의 나리가 한 주 남짓 피고 졌을 때 아, 생각보다 빨리 지는 꽃이었구나. 나리는.했다. 도심에서 보았던 그 나리는 순전한 노랑이었는데, 여기 숲의 나리는 청초한 주황에 야성의 점이 여러 개 찍혀 있다. 검은 점인데, 주황이 배경이라 짙은 밤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고 지어 또 피는 것이 무궁화만은 아니라는 듯이, 숲 곳곳에 무리지어 피고 졌는데, 여전히 또 피고 있음을 선명함으로 증명한다. 분명히 또렷하게 아름답다.  타이거 릴리. 참나리의 영어명이다. 같은 숲에 같은 시기에 피는 주황의 토트무늬 야생화가 또 있었는데, 이름하여 범부채. 잎이 난 모양새가 납작하게 부채모양이고, 꽃잎엔 온통 붉은 점이 덮여 있다.

 

까만 점박이와 빨간 점박이가 축축한 숲 속에 청량감을 주며 피어 있다. 여기 저기 군데 군데, 이미 피고 진 것은 씨앗을 달고, 지금 한창인 것도, 이제 피려고 하는 것도 있다. 그 안에 내가 있다. 공간을 찾아 이동하지 않아도, 앉아서 공간을 짓는 일은 얼마나 풍성한 일인가. 이 숲, 축축하고 생생한 이 쪽. 선명하고 정확한 사랑의 꽃이 범, 스럽게 피고 지고 또 피고 있다. 계절의 틈새에서 꽃은 풀은 나무는 자기만의 공간을 짓고 향기를 날린다.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일, 엿보기만 하는 일 모두 차곡차곡 설레임을 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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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날이다. 며칠 전 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면 조금 뻥이런가.

 

친구들과 3개월전 약속했던 여행을 다녀왔는데, (처음 약속한 행선지가 바뀌긴 했지만).

"진실게임을 하면 더 친해진다는데 우리도 하자."

 소주를 딱 반병 마신 시점에서 누군가 제의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웃음은 우리에겐 밝혀야할 진실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암묵적인 공감 때문이었다. 집에 와서 문득 생각하니 나에겐 밝혀야 할 진실이 있었다. 밝혔다면 또 한 번 빵 터질 수 있었을 텐데..

 

비밀 아닌 비밀, 진실 아닌 그 진실은 사실 이거다.

"요즘 나, 책 안 읽어"

 

그렇게 고백하는 내 앞엔 책과 노트, 연필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날 며칠 읽은 듯 안 읽은 듯 한 권의 책을 보았다 말았다 하고 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요즘 내가 읽어야지 하던 책들이, 작가가 그 책 속에  속속 등장했다. 이제, 좀 책을 읽어야 할 시점. 보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왔다. 그 순간이 조금 더 뜨거워졌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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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7-26 10:34   좋아요 0 | URL
ㅎㅎㅎ저도 요새 책 거의 못 읽었어요.

서니데이 2016-07-26 14:11   좋아요 0 | URL
저도요.^^;
쑥님, 좋은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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