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그늘아래 맥문동이 제 세상이다. 한창이었던 것들이 숙어 꼬부라지고 빳빳하게 솟아오르고 있는 것들은 또 그대로 싱싱하다. 더위 끝에 피기 시작하는 나무 백일홍도 지난 주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매미 소리에 귀는 째지고, 폭염이 모든 감각을 지배하는 나날들.
2016년 여름은 기억될 만 하겠다.
짧은 여행을 앞두고 널부러진 마음을 추스리는 의미에서 요즘 들고 다니던 얇은 책을 정리한다. 더위가 어디 나서고 싶은 마음조차 싹 데려가 버려서 어떤 책을 들고 갈까 고르다가 보면 억지 설레임이라도 좀 찾아와 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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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잠복>일부분
당신은 좀처럼 나에게 올 줄 모른다
그래요 정말 화가 날 일이야
나는 생선을 뒤집어서 한 입 크기로 떼어낸다
나라면 더했을 텐데 대단해 당신
줄지 않는 밥 위에 생선 살을 올려주고
이럴 때 당신은 꼭 내가 낳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낮잠>일부분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 당신은 양동이에 물 찬 생선을 담아 왔다
.
.
듣는지 마는지 당신은 아가미처럼 터진 주머니를 살피고
나는 비늘처럼 흘기며 생선을 집적인다
.
.
다음 생에는 여자로 와요
당신도 다 이걸 겪어봐야 알지
나는 다시 안 올거야
당신이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모른다
<소설> 일부분
새벽을 기다리다
늦도록 지루해진 골목길에는
잠시 텅 빈 틈을 타고 담벽락이 눕기도 하네
나는 닳고 닳은 골목길
자꾸만 떠나려는 너를
아귀가 맞지 않아 뻐근한 쪽문을 열고
놓아주네 휘어질 듯 졸던 담벽락이
문소리에 놀라 한번 크게 소스라치고
깨어나네 일제히
기립하여 네가 가는 길을 가만히
열어주네 내 흐린 시선이
가 닿을 수 없는 골목의 저 편
모퉁이를 돌다 말고 가던 길 돌아보던 네가
길 지우는 저녁마다 푸른 영혼으로 꺾어진
담벼락에 스미네
<푸른 모서리> 전문
유진목은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특이하고도 독특한 시적 순간을 연애의 사건으로 시를 만들어낸다. '그리움'은 오히려 생활에서 표현된다. 생활을 꿈꿔보는 것, 지위를 가져보는 것, 타인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상상을 해보는 것, 이 과정을 소박한 말로 펼치지지만 청승도 넋두리도 체념도 아닌, 독특한 추체험의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우리의 눈을 이리저리 바쁘게 하고 우리의 호흡을 조절해 나간다. 눈동자에 눈물을 고이게 할 뿐, 흐르거나 넘치지 않게, 가슴이 저리지만, 찢어짐을 허용하지 않는 문법이 시를 읽는 연애의 뛰어난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는 감정에 젖어들게 우리를 안내하지만, 그러나 자연스레 저 과장을 방지하는 호흡으로, 때론 문장과 문장의 격렬한 운동으로, 연애와 그 마음을 비끄러매는 작업으로, 마음과 글이 서서히 좁혀나가는 그런 시를 쓴다. 아주 농밀하면서 처연하고, 침착하면서 애잔하며, 격렬하면서 절박한 연애시가 여기서 탄생한다.
조재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