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가지 않았으면 가지지 않아도 될 그리움을 평생 안고 가야한다는 점에서 여행은 형벌, 여행자는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는 자다. 무언가 미진해서인지 바람이 제대로 들어서인지 요즘 밤마다 여행상품 검색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길게 갈 여유는 없으니 주말 2박3일 가는 상품들을 보고 있는데, 상품들이 참으로 다양하고 갈 곳은 많고 많다는 것이 느낀 점이다. 7박 8일의 자유를 생일 선물로 미리 받았다. 붙여 쓸 시간은 안되니 2박 3일씩 3회에 나누어 써야 겠다.
그리움 때문에 책을 샀다. 아껴 읽으며 헛헛함을 저축 했다가 기회가 닿으면 재빠르게 붙잡으리라.
바보성자가 된 사람들은 자주 두루두루 돌아다녔고 그들의 글은 널리 읽혔다. 가장 먼저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소?"라고 교회에 묻고는 "불합리하니까 나는 믿소"라고 단언한 사람은, 어쨌든 간에, 학식 있는 인물인 테르툴리아누스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가운데 가장 학식 있는 사람 축에 끼는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도 "우신예찬"을 했고, 그 제목이 붙은 그의 글이 러시아의 사상가 사이에서 제법 널리 읽히게 되었다. 후대의 고뇌하는 러시아 사상가들은 -즉 토스토옙스키와 모소륵스키와 니콜라이 베르다예프는-자기 나라의 참된 정체성을 "모국의" 거룩한 "떠돌이"라는 이 자유분방한 전통에서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보 예언자들은 강단과 축성과 더불어 아나키즘적이고 피학적인 충동의 원천을 제공했다.
바보성자에게는 14세기와 15세기 동안 모스크바국에서 흔해진 예언하는 은둔 성자와 닮은 점이 많았다. 실제로, 떠돌이 성자를 가리키는 용어(스키탈레츠)는 고립된 은수자 공동체를 일컫는 데 쓰인 용어인 스키트와 연관되어 있다. 가장 이름난 고행 은수자이자 이 소규모 공동체의 옹호자가 닐 소르스키였는데, 이 사람을 거쳐서 헤시키아주의자의 영적 열성이 그리스 땅에서 러시아 땅으로 전해졌다. 벨로예 호수의 성 키릴 수도원 출신 수사인 닐은 성지를 그리고 함락 직후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을 그 다음에는 "거룩한 산" 아토스를 여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외부의 규율과 속박에서 벗어난 내면의 영적 삶에 귀의했고, 러시아로 되돌아와서 그런 삶을 벨로예 호수 너머 소라강 유역의 황야에 세운 자기의 모범 스키트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가 쓴 신앙서에는 일종의 시원적인 프란체스코식 자연 사랑과 이 세상의 것에 대한 무관심이 있다. 어떤 스키트에서도 "형제"는 열두 명을 넘지 않아야 하고 그들은 모두 사도처럼 청빈하게, 그리고 자연계와 친하게 교감하며 살아야 했다. 복음서와 몇몇 다른 "성전"이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어야 했다. <이콘과 도끼1>103쪽
어떤 경험은 그 순간에 힐링 받는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고통을 향하여 더 깊게 발을 내딛게 한다. 모르고 살았어도 될 공간에 있어져 버림으로써 그 곳을 꿈꾸게 되고, 그 곳이 아니어서 결핍을 느끼게 되기에. 그래서 순간의 기쁨은 영원한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지난 주에 <사진과 책>에서 벨로크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났고, 오늘은 로버트 프랭크를 만났다.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란 개념을 전면적으로 뒤집고 보편적 진실보다는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진을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이후 사진가들에게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이 끼친 영향은 거대하다. <사진과 책>40쪽
"거리 위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쥬크박스나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 미국이란 땅덩어리가 지닌 그 미칠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을 뿌리로 해서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 지원금으로 산 중고 폭스바겐을 몰고 48개주를 돌며, 민첩성과 신비로움과 비범함과 슬픔으로 여태껏 필름에 담겨본 적이 없는 어두운 그림자에 어린 저 기이한 비밀스러움을 엄청난 수의 사진속에 담아냈다."
잭 케루악이 쓴 서문을 읽어보면 그가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에서 블루스를 들었음은 분명하다. 블루스의 기조를 이루는 단순한 가락의 패턴은 노래하는 사람에게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는 변용의 자유와 인간사 고난을 다 뱉어내게 하는 넉넉함을 선물해왔다. 힘들고 슬플 때 안길 누군가의 품처럼 위로가 되는 이 음악을 탄생시킨 건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가장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흑인들이었으니, 고통과 위대한 예술과의 상관관계란 참으로 정확하지 아니한가. 블루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인간의 영혼>을 만든 빔 벤더스는 흑인과 피부색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어린 시절 처음으로 블루스를 들었을 때부터 그 진솔한 영혼의 흐느낌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해석 이전에 누구나가 희망과 절망으로 뒤범벅된 내면의 얼굴을 비춰보게 만드는 로버트 프랭트의 사진처럼 말이다. <사진과 책> 47쪽
여행의 순간은 떠나가지만 책의 순간은 곁에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는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