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로 가슴이 아팠다. 고통은 없었다. 느껴지지 않는 무형의 고통을 인식하던 시간대는 주로 해질녘이었다. 종일 한 열 번쯤 아, 가슴이 아파..하고 중얼 거렸다. 주로 저녁 쌀을 씻으면서 물소리에 묻힐 만큼의 소리로 내뱉던 말. 오늘은 왠지 자꾸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고, 나의 중얼거림을 계속 들은 상대는 이렇게 말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픈거지? 나도 가끔 그렇게 아픈데, 홧병이래. 병원 가봤자 아무 결과도 안 나와...그러고 나서도 내가 계속 중얼거리자
가서 좀 누워 라고 말해주었다.
오늘 나는 내 욕망에 충실했다.
' ...가 하고 싶어'라는 생각을 십년 전 쯤부터 품고 살았는데. 언제였던가,
정말 하고 싶으면 '하는' 거야. '하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아.
라는 말을 듣고 부터,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눈치보면서 조심스럽게 살짝만 했다. 왠지 '하지' 않고 '하고 싶어하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실천력이 딸리거나, 모자라거나, 우유부단 하거나, 온갖 부정적인 인간의 전형인 것 같이 여겨졌다. 그래서 하지 못하는 것은 아예 '하고 싶지'도 않아야 함이 마땅한 것처럼 아주 매우 조심스럽게 속으로만 '하고 싶어' 하던 일을, 오늘은 '하루 왼 종일~~~' 속 시원하게 했다.
지루하지도 그만하고 싶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았다. 누구를 위해 밥을 해서 차리거나, 나를 위해 밥을 준비하지 않았다. 만들어 주는 샌드위치는 감사히 먹었다. 커피도 두 잔 마셨다. 아무튼 고된 하루의 노동이 끝난 후, 나의 작업을 원가 포함 최저임금으로 계산해보았다. 한 마디로 '돈 안되는' 일이었다. 일주일 5일 8시간 꼬박 노동을 해도 먹고 살기 한참 모자란다는 계산이 나왔다. 바로 포기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인간이었는지 정말 몰랐다. 평생을 '현실 개념이 없다'라는 정확한 표현을 들어 왔기에. 한 번 '해보고' 나니 여한은 없어졌다는 게 소득이라면 소득. 당연 미련은 남는다.
이러구러 책을 한 페이지도 못 읽었다. 아니, 책을 손에 잡아 보지도 못했다. 두통 때문에 평소보다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더니 눈이 더 일찍 떠졌다. 어제 알라딘에서 온 택배 상자는 문 밖에 있다. 문을 열고 부시럭 거리다 식구들 잠을 방해할까봐 머리맡에 두고 잤던 <사랑 사랑 뱅뱅>을 펼쳐들었다. 제목도 표지 일러스트도 너무 낯익어서 이 책을 과거 언젠가 읽었던 것일까 하며 뒷 표지에 있는 글을 읽는다.
'20세기 초 파리지엥이 뜨겁게 사랑한 유일한 여류 시인
마르셀 프루스트와 장콕토의 영원한 친구'
라는 문맥을 읽자 마자 영화<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난다. 벨에포크 시대의 시인이다. 그 분위기를 떠올리며 첫 페이지를 펼친다.
아티초크 빈티지 안나 드 노아이유 시선
1901년 첫 시집 <무수한 가슴>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2년 뒤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 제 2회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잠자다 흠칫 놀라며 깰 때가 있어
뼈가 바스러지는 충격과 함께
청춘이 훌쩍 떠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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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불에 데어 마음이 지쳤어도
너, 푸르고 노란 불길, 내가 너를 축복한다
뜨거운 우주의 격정에 네가 취한다!
나는 선포해야지
우리는 죽어가더라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의 몸이 뜨겁고 무기력하고 슬퍼도
밤은 자비롭고 낮은 젖과 꿀을 제공한다고
눈물과 울부짖음과 고통과 번민에도
무한한 환희는 손상되지 않는다고
욕망의 한 순간, 여름의 한 순간에는
뜨겁고 그윽한 영원이 담겨 있다고!
'눈부심' 일부분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했던 때가 있었어
굉장한 별이 뜬 하늘
그 아래 모든 것이 헛됨을 몰랐던 나는
오직 살아 남으려 애썼지
오늘은 너의 침묵에 든 독을 다 마시고
수천 번 죽고 죽어
영원한 잠에 빠졌으면 정말 좋겠어
'사랑의 시' 일부분
'사랑의 시'는 연작 형태로 20여편이 실려 있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표현을 할 실체가 있다는 것, 실체 없이 구멍 뚫린 듯한 삶이 못견디게 공허한 것이지 표현을 못함이 답답한 것은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고 생각했는데, 표현하지 않고,표현하고 싶다라고만 생각하는 내가 답답했는데, 이건 뭔가...더 공허하다. 완전 낭패다. 풍부함을 가지치기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 내게 더 풍부하라고 속삭이는 악마의 시. 시공을 넘어선 이 클래식한 에로틱함. 흘러 넘친 사랑이 추하지 않고 오히려 품위가 있다. 소중한 만남, 원래 이어져 있었던 듯한 인연...을 돌아보는 새벽이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