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욕.커피.꽃보러가기.

이맘 때 연휴기간에 늘 하던 일이다. 올 해는 타이밍을 놓쳐서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못했더니 속에서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갑자기 올라간 기온 탓일지도 몰랐다. 며칠 만에 드디어 혼자가 되었고 곧바로 커피를 내렸다. 혼술은 곧잘 하지만 혼커피는 드문 일이다. 늘 같이 마시려고 대여섯 잔 이상의 커피를 내리기에.

‘이렇게 조금 갈아도 되는거야?‘
속엣말을 하며 평소의 반도 안되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천천히 핸드밀을 돌렸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라는 스님 말씀을 상기하며. 하루에 대여섯 잔의 커피도 두려움 없이 마시던 시절은 언제런가 싶게 지나고 아침 일찍 커피 한 잔도 조심스럽게 마시게 된 게 한참 되었다. 그런 만큼 커피 한 잔이 더 소중하고 애틋해졌다.

오늘의 커피는 인도네시아 아체 가요마운틴이다. 스님이 직접 로스팅해서 주신 커피인데, 이 원두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인도네시아 어느 지역이 그렇게 조용하고 아름답다고. 스님을 모시고 인도네시아에 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며 지도를 그려보고 커피 산지도 표시하며 마음을 키웠었다. 인도네시아 아체지방의 가요마운틴에서 나는 커피들은 거의가 해발 1500미터 이상의 산지에서 나며 대부분이 유기농이라고 했다.

미리 골라놓은, 한국에서 산 폴란드 시골느낌 나는 커피잔을 데워놓고 천천히 드립을 했다. 약배전을 한 원두라 좀 시간을 끌며 드립을 했는데, 뭘 알아서가 아니라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 주먹구구식으로 내리기에 내가 내린 커피가 맛있기가 힘든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산미가 과했다. 균형이 깨진 것이다. 산미를 감추려고 급히 쿠크다스 두 조각을 조달하고 물을 더 섞어서 폭풍 드링킹했다. 천천히 마시라고 스님이 그렇게 두 번 세 번 말씀하셨는데 혼자 마시자고 드립을 하는 정도면 정말 너무너무 커피가 고픈 상태라 천천히 마시는 게 불가능하다.

아체가요마운틴을 잘 내리면 어떤 맛일까 싶어 찾아보았더니 어떤 사람은 바디감이 있다고도 어떤 사람은 산미에 꽃향기가 난다고 했다.아체가요마운틴도 품종이 다양했고 로스팅 정도에 따라 풍미가 당연히 다른 듯 보였다.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내린 결론은 기본적인 산미와 풍부한 과일향, 꽃향이 대표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섬지역의 높은 산에서 나는 아체가요마운틴. 인도네시아의 커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 커피집을 하시겠습니까의 구대회씨 소개였다. 광흥창역에 있는 구대회커피에 매일 도장을 찍던 시절이었는데 그 때 인도네시아에 커피산업이 발달했단 얘기를 신기하게 듣고 커피도 마시고 그랬는데 그 때 마신 커피가 아체가요마운틴일지도 모르겠다.

구대회커피집에서는 머신커피만을, 십삼월에서는 핸드드립 커피만을 판다. 최근에는 성북동 서점 커피집 십삼월에 만나요에서 마신 커피가 진짜 맛있었다. 커피는 공부도 기술도 중요하지만 역시 손맛이구나 싶었던.
오늘 십삼월이 휴무가 아니었다면 아마 먼길을 달려 십삼월에 갔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도시의 한 가운데서 섬 생각이 간절할 때
바람을 맞듯이 커피를 마시러 가고 싶은 곳이
‘십삼월에 만나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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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초

복복 목숨수 풀초

복과 장수를 뜻하는 이름답게 꽃말이 ‘영원한 행복‘이다.
복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의 거의 전부를 함의하고 있기에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 해 복 많이 지으세요

라는 간단한 문장으로도 최대한의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일거다.
언제부터인가 음력설보다는 양력설이 더 새해같고
지금에서야 새해인사를 주고 받는 것이 좀 뜬금없게 되었다.
나처럼 새 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묵은 생활방식으로
뭉기적거렸던 사람들에겐 고마운 유예기간이었을지 모르는 한달 이상의 시간들이 지난 지금, 다시 새 해 복!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야될 일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해마다 음력설에 가는 곳이 있다. 시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복수초가 피는 공원?이다. 공원이라하기에도 너무 소박한 곳이지만 산은 아닌 게 분명하고 공원이라고 굳이 팻말을 세워 놓았으니 공원이라고 불리는 그 곳.
어느 해는 좀 더 춥고 어느 날은 좀 더 따듯하다.
바람이 부는 날도 있고 눈이 쌓인 날도 있었지만 언제나 어김없이 복수초는 피어있었다.

더 남쪽에는 2월 초에도 피는 꽃이고 눈 속을 뚫고도 피기에 봄꽃이라는 말보다는 겨울꽃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대개는 이맘 때 봄의 전령사라는 이름으로 신문의 한 컷으로 등장하고 봄꽃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지만 언제부턴가 내겐 ‘겨울의 끝‘을 떠올리는 꽃이다.

예전엔 복수초를 보면서 아! 봄이다!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복수초부터 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봄이 너무 지루했다. 개나리 벚꽃이 피어 흐드러질때 쯤은 이미 봄이 너무 식상해서 그때의 꽃들을 흠뻑 즐길 수 없었다. 이후로 벚꽃은 봄의 끝을 알리는 꽃 복수초는 겨울의 끝을 알리는 꽃이구나로 정리를 했다. 봄의 시작과 겨울의 끝이 뭐가 다르지? 왜 이런 것에 의미를 두고 답?을 찾으려 하지? 끝과 시작의, 계절과 계절의 경계를 생각해보는 겨울 끝자락, 올 해도 어김없이 복수초가 피었다.

지금 이 사진을 보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복‘과 수‘가 깃드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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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심사를 간 일은 정말 행운이었다.
‘언니 눈보러 오세요. 눈이 많이 왔어요.‘
로 촉발된 주섬주섬 서산여행.
눈이라는 단어도 마음을 움직였지만
‘언니 여기와서 누워계셔요‘
라는 후배의 센스있는 멘트가 몸을 움직이게 했다.

‘언니 집에 들어 가기 전에 가보고 싶은 데 없어요?‘
라고 후배가 물었을 때 우연히 눈에 들어 온 개심사 라는 이정표.
개심사 여기서 멀어?
해놓고 멍 때리며 실려 간 곳은 늦봄에 청벚을 보러 다니던 그 개심사였다.
걸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건만 가는 길 호수에 모여 있던
청둥오리에 반하고 개심사 앞에 도착했을 때 천천히 가만히 내려앉던
굵지만 가벼운 눈발에 홀려서 좀 오래 걷게 되었다.
눈송이는 천천히 많이 날리는데 바람은 불지 않아서 오래 눈을 맞으며
걷는데 춥지도 않고 젖지도 않아서 넋놓고 겨울을 즐겼다.

청벚과 겹벚으로 유명한 개심사는 꽃이 피는 시기에 오면 꽃의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인산인해 사람이 미어터진다. 사람들에 밀리어 입을 벌리고 꽃 바라기를 하느라 몇 번이나 왔지만 개심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다. 어제의 개심사는 일단 사람의 흔적이 없었고 눈길을 뺐는 화려함이 없었던지라 오롯이 공간과 눈발이 주는 적요 속에 서있을 수 있었다.

허수경 시인의 어느 시구절, ‘하염없이 염없이‘가 절로 떠오르던 그렇게 바라보던 설경 속의 산사. 아무리 꽃바라기 였대도 한 번은 눈길을 주었을 법한 곡선의 통통한 나무기둥들이 새롭게 처음 본 듯이 그 자리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가장 쉽게 허물어지던 순간은 낡은 것이 주는 아름다움 앞에서 였다. 허물어지고 또 허물어지고 경배하고 또 경배하면서 처마 아래서 말라가는 시래기 앞에서 무릎 꿇는 심정이 되었다. 그 순정한 아름다움 앞에서 더 도드라지던 오만하고 경박하고 이기적인 내 모습.

일부러 더 멀리 산길을 돌아 내려오면서 평생 볼 아름다움을 다 봐버렸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이 만만하고 그득해졌다.
얼음장 위에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본 것, 때로 헤엄치고 때로 날아오르던 새들이 만들어내던 물무늬, 눈발이 아름답게 내려와서 쌓이던 것, 세월을 가늠할 수 없게 낡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빛바랜 산사의 고즈넉함, 무심히 지나가던 고양이의 뒷 모습, 물기 없는 눈발의 포슬함, 걸을 때의 뽀득뽀득한 느낌 같은 것들 때문에 살 것 같아진
날이었다라고 느끼면서, 아 그동안은 정말 죽을 것 같았었구나 라고 생각한
살아진 어느 하루 겨울 개심사.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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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에서 한 시간 이십 분 이동했을 뿐인데
흔한 개 짖는 소리 한 번 안들리는 고요한 동네에 와졌다.

밤새 눈이 내렸고
빛나는 아침이 왔다.
편한 잠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이 깨닫는 요즘.

굳이 제주도를 가겠다고 발버둥칠 게 아니라
대안 장소로 이 곳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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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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