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나는 인도양을 항해중이었다. 말라카해협을 빠져나온 컨테니어선 하이웨이호는 나흘간 직서진한 다음 인도 대륙 아래에서 아라비아반도가 있는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시속 22노트의 빠른 속도였고 수심은 4천 미터 수준이었다.
가도 가도 푸른 바다뿐이었다. 섬 하나 없었고 하루종일 엇갈려지나가는 배 한 척 볼 수 없던 날도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항해사가 해도에 점 찍어놓은 배의 위치 표시 정도였다. 그렇게 여러 날 계속되자 동행했던 안상학 시인이 탄식했다.
"햐, 진짜 물 많데이."
"...."
"누가 이것을 지구라 캤노. 이게 수구지, 지구가?"
그는 내륙 깊숙한 경북 안동 사람, 이 거대한 물덩어리가 낯설었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무심하게 혼잣말을 이었다.
"내 이 별이 뭔고 했더니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이었구만 그래."
도대체 시인을 어디에나 써먹나 싶었는데 이런 경우였다. 그들은 비참하게 버림받은 남자에 관한 노래를 새벽 세시 반에 합창하고 축구시합 관람 도중 정치적 발언을 해서 주위를 어색하게 만드는 데다 충동적으로 옆동네 아줌마를 사랑하고 간혹 감옥에 끌려가 우리의 세금을 공짜로 갉아먹기도 하지만, 이렇게 접신된 듯 한순간에 우주공간으로 솟구쳐오르기도 한다. 시인이란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는 어떤 문장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걸고 몸부림치는 존재아니던가.
푸른 물방울.
그의 발언에 나는 경도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한 정의를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그의 말대로 우리의 행성은 우주공간에 떠 있는 물방울이었던 것이다. 우주에서 우리의 별을 찍은 사진을 본 적 있으실 것이다. 공처럼 동그랗고 사파이어처럼 푸른 물덩어리. 이런 제기랄, 바다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대양 항해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그들을 데리고 배를 탄 나는 정작 그런 생각을 못해본 것이다.
내 인생의 배경은 대부분 바다였다. 섬에서 태어나 자랐고 선원 노릇을 했으며 다시 고향 거문도에 내려와 산 지 8년째이다. 해발 1미터인 바닷가 집에서는 5년 되었다. 이곳에서 낚시를 가고 수영과 스노클링을 한다. 그물질도 하고 간혹 다이빙도 한다. 먼바다가 궁금해 인도양과 대서양, 북극해 항해도 했다.
바다와 섬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작가이다 보니 기자나 독자들이 이렇게 물어온다. 당신에게 바다는 무엇인가요?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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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당귀에는 수선화 몇 포기가 살고 있다.
꽃을 잘 알기 위해서는 바짝 다가가야 한다. 암술 수술을 구분하고 꽃잎의 수를 세고 씨 맺는 시기를 기다려 기록해야 한다. 그러면 나는 꽃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꽃이 인정할까?
김영희의 인생 속으로 파고든 박철수는 결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날마다 격정과 권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함께 살지만, 그리고 딸 보람이와 아들 민수를 낳았지만, 이해는 이루어낼 수 없다. 철수는 다른 사람에게 영희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지만 영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쌍방이 그러하다.
그러니 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바람과 햇살과 빗방울이 지나가는 공간을 꽃과 나 사이에 마련해두는 것, 그 대상을 통해 꽃을 바라보는 것. '넌지시'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통째로 풍경이 되는 것.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