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
수잔 캔들 지음, 이문희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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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가, 그녀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제인 마플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속에 등장했던 주인공의 이름이라고 하는데. 또, 제대로 된 추리소설을 처음 읽어보는 탓에 처음에는 갈피를 못잡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인물의 묘사나 설명없이 대거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물 외의 묘사력은 상당히 흡입력 있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도 이 책의 작가 수잔 캔들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이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을 토로해본다.

사실, 이 책은 두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애거서 크리스티가 실종되었던 11일동안의 일을 애거서 크리스티 1인칭 시점으로 말하고 있는 이야기 하나. 그리고 수상한 마을 크리스티타운의 쎄쎄가 연이어 일어난 두 개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아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둘. 어쩌면 연관성을 가지고 서로의 이야기가 얽혀있을지도 모를거란 약간의 기대를 했는데 쎄쎄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중간에 불쑥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제 이야기의 연관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아서인지 읽는 내내 흐름이 끊기는 적이 자주 있었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미처 먼저 일어난 살인사건을 파헤치지도 못한 상황에서의 또 다른 살인사건은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긴장감있게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쎄쎄, 그리고 그의 남편인 감비노. 첫 번째 살인사건의 희생자 리즈. 그녀는 연극의 주인공 미스 마플역을 맡고 있었는데 연극 당일 살해당했다. 또, 점차 알아가고 의지하고 있던 도트 부인의 친구 실바나의 죽음. 또 리즈의 남편 루. 아내를 죽였을거라 의심받고 있지만 아니라고 하고, 브리짓은 파티에 늦게 나타나고. 이 모든 일들이 얽혀서 심리의 밀고당김과 동시에 누가 범인일까를 쎄쎄와 함께 맞춰나가는 과정이 신선했다. 하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었더라면, 아니 꼭 그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추리소설에 조금 익숙해져있었다면 범인을 찾아나가는 복선의 의미를 조금 더 잘 파악할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추리소설은 음침하고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다. 스릴러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끔찍한 시체의 모습과 그 배후를 둘러싼 여러가지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하느라 머리가 아프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질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어쩌면 사랑이야기가 이야기의 전반을 주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추리소설에 집어 넣었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대로 내가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 소재를 추리소설에 집어넣음으로써 조금은 색다른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책을 읽는 처음부터 괜히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나는 한 편의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 되어버렸다. 소설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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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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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country for old man. 곱씹어 보게 된다. 영화를 먼저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음악 하나 없이 흐르는 답답하고 또 갑갑한 긴장감이 나의 숨통을 조여왔고 끝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그저 스크린을 한 대 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영화에 대한 내 기분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이 말하려고 하는 의미를 모르는 것에 대한 답답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나는 책을 다 읽기까지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에게 말하려는 게 무엇이었는지를. 도대체 누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를.

사막을 지나가다가, 영양을 쫓던 모스는 저 멀리 보이는 트럭들 사이로 시체들과 함께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그 사람을 곁에 두고 모스는 총과 마약, 현금 200만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가지고 모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그 현장을 확인하러 돌아온 모스는 그때부터 쫓기기 시작한다. 공포로 다가오는 살인, 그리고 안톤 시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여대는 시거의 잔인함. 그 잔인함을 나는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짜낼 순간도 없이 다가오는 막막함의 공포 때문이었나. 분명히 모스가 사막에 있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가방을 손에 쥐는 그 순간 범인이며 동시에 죄를 저지를 악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톤 시거의 등장으로 모스는 쫓기기만 하는 약자가 되어버린다. 상대적이라는 말이 이토록 어울리는 상황이 있었나 싶다. 

음악 하나 없이 흐르던 영화와 같이 책도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스릴이라는 단어를 넘어,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총격전은 나를 내내 불편하게 만들었고 쫓기는 자와 그 쫓기는 자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꼭 내가 전에 당해본 것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사이에 노인으로 생각되는 보안관 벨이 있다. 이 모든 것을 그의 나레이션으로 정리한다. 시대의 변함, 그 흘러가는 시간은 겉잡을 수가 없고 선의 이미지의 대표로 생각되는 그 벨의 모습은 이 책의 제목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준다. 악의 화신인 시거를 보고 있고, 그리고 만질 수 있을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 시대는 미친것처럼 변화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되돌려놓을 수 없고, 약간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다 빠져버린 보안관 벨에게서 나는 애잔함을 느낀다. 

끝을 알 수 있었을까. 모스는 언젠가 시거의 손에 잡히겠지, 라는 막연하고 당연한 예상을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초점에서 벗어나버렸다. 모스가 잡히냐 안잡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영화에서는 내가 찾지 못했던 그것을 찾아내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동전 하나로 사람의 죽음을 결정하는 시거. 자신이 신인마냥 행동하는 그를 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건 바로 보안관 벨에 대한 나의 느낌이었으며 동시에 지금의 우리 삶을 살아가는 모두와 같다. 딱히 노인이라고 규정지을 것 없는 그 모든 사람들을 말이다. 

내가 누구지? 내가 노인인가, 아니면 모스인가. 어쩌면 안톤 시거일까? 내가 누굴까. 그 모든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이 책은 결국은 다시 제일 앞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 그 시 속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을 쥐어짜야만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아, 생각이 어지럽지만 그만큼 어깨가 무거워진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노인일까? 모스일까, 어쩌면 시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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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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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 '연민'에 대한 정의. 결론지어버렸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이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어의 뜻을 보고 나니 더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랑과 연민이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과 연민이 아주 별개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나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 사실이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는 25살의 남자에게서, 15년동안은 사관학교에만 있었던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하반신이 마비된 에디트와 호프밀러에게서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양쪽에 저울을 두고 어느 쪽이 더 나은지를 판가름하기에는 나의 생 모호함과 덜 성숙됨과 더불어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애매한 감정들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이 나를 지배한다. 머리를 비우고 다시 생각해 보지만 생각의 끝은 같다. 어쩌면 거듭 생각해보아도 더하거나 덜하지는 않을 것 같은 그들에 대한 생각은 나를 더욱더 어지럽게만 한다. 

헝가리의 귀족집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라는 귀족에 대한 자세한 것은 하나도 모른 채 그의 딸에게 춤을 청한다. 하반신이 마비된 것도 모르고 있었던 그는 에디트의 반응에 놀라 급하게 도망쳐 나온다. 그의 첫번째 도망침. 그 때의 실수로 그 집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에디트와 그의 사촌인 일로나, 케케스팔바와 함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정은 서로 끼워지듯 두터워진다. 연민이라는 감정 하나로 에디트에게 자신의 관심과 배려를 한껏 흘려보내지만, 지금까지 집에서 자신의 삶을 비난하며 살아온 에디트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유일한 남자인 호프밀러에게 당연에 가까운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의 사랑은 집착과 욕심과 지나침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호프밀러는 그 사랑에 대한 거부감으로 다시 도망치게 된다. 

감정의 단면만을 보다가 갑자기 다른 한쪽의 새로움을 경험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양성과 새로움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는 시각의 참신함인가, 아니면 그대로 느끼고도 소화할 수 있는 용기일까. 연민으로만 바라보았던, 아니 그렇게 바라보려고 의도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감정이 갑자기 사랑으로 변하게 되었을 때. 그것도 에디트에 대한 연민이 사랑으로 바뀌는 감정을 본 것이 아니고, 나는 연민으로만 바라보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에디트가 그 감정을 사랑으로 바꾸어 버렸을 때, 나도 어쩌면 도망칠 수 있는 충분한 감정의 근거가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누가 나의 귓속으로 사랑을 해라, 라고 속삭여주어도 나의 감정이 동요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호프밀러 대위는 떠나버렸고 에디트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심리 묘사에 적잖이 놀랬다. 아니, 빠져들었다. 사랑에 대한 감정과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표현과 이야기의 전개는 느릿느릿 서두르지 않았지만 언제나 감정은 앞서나가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말들은 자기가 전해 들은 그 내용 그대로의 전달일 뿐이라고 했다. 전해들은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심리묘사. 더불어 이야기의 끝맺음을 작가의 말이 아닌, 호프밀러의 입을 대신해서 끝맺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한껏 메말라 있던 감정의 끈을 다시 이어주었다. 아무도 타인을 판단할 수 없다. 아니, 판단하는 것이 곧 죄악이다. 나의 잣대로, 나 이외에는 누구도 동감할 필요가 없는 그것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깎아내리려는 생각이 없다. 그저, 나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또 하나의 연민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상식이라는 것은 없다. 상식이라는 것으로 바라보려는 우리의 이기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나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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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에버그린북스 1
리처드 바크 지음, 이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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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추어 본다. 책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이 책을 다시 꺼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처음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 되뇌어본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조금은 나의 태도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며, 그건 당연히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서 배운 것이다. 배운 것을 실천한 결과이다. 처음 읽은 순간부터 나는 조나단에게 반해버렸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존재가 있을까.

너무 많이 읽혀서 누군가에게 권해주기도 어색한 이 책을 다시 조명해보는 이유는 이 한 단어로 충분할 것 같다. ‘갈망’. 항상 여행을 꿈꾸지만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모두에게,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갈매기 조나단의 노력은 우리에게 한없이 자극하는 것이며 동시에 갈망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값진 것이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이다.” 하나를 알게 된다는 기쁨과 동시에 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들을 모르게 되는 아이러니. 이 말을 듣고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생각을 거듭한 끝에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너무도 엄청난 책을 알아버렸던 기억이 있는데, 그와 동시에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이제껏 몰랐었던 게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알면 알수록 아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놀라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조나단도 자기를 비롯한 갈매기 떼거리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내 지금까지는 몰랐던 훨씬 더 자유로운 생활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작가 리처드 바크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고 해야만 하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면 작가가 말하는 이상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거기다가 갈매기라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 갈망과 희망과 노력을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이 더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오래전에 나온 이 책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듯하다.

언제나 하려고 하는 자에게 운이 따르고 그에 대한 댓가가 따른다. 아무리 부추겨도 그대로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는 천리안. 그리고 노력. 다시 한 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완전하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갈매기가 완전한 것 이상을 이루어내는,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조나단이 대신 해주는 데 대한 환희랄까. 

나는 조나단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보았고 <갈매기의 꿈>은 책장으로 다시 꽂아 놓는다. 내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조나단이 생각난다면 주저없이 다시 집어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찬란한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의 상황을 극복해내기 위한 준비를 할테다. 단 한가지 이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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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Mr. Know 세계문학 21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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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분명 책을 손에 쥐었을 때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합류했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넘긴 후에도 나는 아직 앵무새를 찾지 못했다. 아마 나는 평생 이 앵무새를 찾지 못할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분명 소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플로베르를 알아버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플로베르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알아버렸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앵무새를 찾으려고 했는데, 결국 작가의 플로베르에 대한 예찬을 들어버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이자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를 단숨에 유명작가로 만들어 버린 이 책 <플로베르의 앵무새>. 작가의 역작답게 단숨에 써내려간 듯한 당당함이 엿보인다.

작가만큼은 아니지만 플로베르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이 책은 조금 더 흥미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보바리 부인>도 아직 읽지 않은 나에게 이 책은 버겁다는 느낌과 동시에 신선한 자극이었다. 작가의 노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가장 좋아하는 그 무엇, 한 가지에 대해서 이토록 많은 지식과 관심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꽤 충격적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스토리를 기대하고 읽기 시작하지만 이내 포기하게 된다. 불연속적이며 때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이야기를 나열하고 섞어버렸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오게 되는 감정은 플로베르에 대한 작가의 사랑뿐이다.

손님, 이걸 읽어보시겠어요? 그렇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네, 뭐 신고할 거라도 있으세요? 네. 신고하고 싶은 것은 가벼운 프랑스 독감인데, 위험할 정도의 플로베르에 대한 도타운 사랑이 있고, 프랑스 도로 표지판을 보고는 어린애처럼 기뻐하고, 북쪽을 바라볼 때 비치는 햇빛에 넋을 잃는 정도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관세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을 것 같은데. (p.127)

작가가 플로베르에게 갖는 애정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줄리언 반스는 허구의 인물 브레이스웨이트를 통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에세이, 그리고 픽션까지 곁들여 작가가 플로베르에게 보내는 찬사이다. 지나친 사랑이며 분석적이다 못해 파고듦으로 치닫는다. 브레이스웨이트는 즉, 줄리언 반스이다. 

책을 읽은 후에 나는 플로베르와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단순한 플로베르의 정보, 사소하게 주고 받은 편지들, 그를 통해 알게 되는 플로베르의 문학세계 등 여러 가지를 알게 되지만 이 책이 주는 의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접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누구에게나 독특한 경험일 것이라는 기대와 사실화. 작가의 의도는 적중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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