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들 춥고 너무 배고프다"
연극배우協 허현호 회장 "이혼율 60~70%…막일에 식당 주방일 등"


[조선일보 경창환 기자]
연극배우는 ‘춥고 배고픈 직업’이라고 한다. ‘자존심’으로 산다고 한다. 23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연극배우협회 허현호(58) 회장은 “탈출구 없이 어두운 터널에 갖혀 수십년을 그렇게 버텨왔는데 이제는 버겁다”고 말했다. 연극배우협회는 지난 18일 “사회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연극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내년 4월 한달간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며 ‘연극 없는 달’을 선언해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허 회장은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렵지만 연극배우가 가장 열악하다”며 “하루 세끼를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 문제가 오랜기간 누적돼 이제는 연극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탄식했다. 용의 눈물(98년), 제국의 아침(2002년), 명성황후(2002년), 왕의 여자(2004년) 등 TV 드라마에서 감칠맛 나는 연기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허 회장 자신도 1980년대 초반 가난한 연극배우 시절 온 가족이 이틀을 굶고 집단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와 지금은 물론 다르다”고 전제하면서도 허 회장은 “예전엔 모두가 가난했기에 밀가루만 먹다가 빵을 먹으면 행복했지만 지금은 빵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현재는 상대적 박탈감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순수예술과 돈. 어쩌면 이 두가지를 상극(相剋)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생각하는 돈은 ‘떼돈’이 아니였다. 허 회장은 한달에 80만원 정도면 이들은 1년 365일 동안 행복하게 ‘연극’이라는 순수예술에 미쳐서 살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순수연극 배우들은 직업은 있지만 직장이 없는 실업자들입니다. 연봉으로 수입을 측정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2~3년간 수입이 한 푼 없는 경우도 많아 5년, 10년 단위로 계산을 해야 그나마 한 200만~300만원 정도 나옵니다. 흥행이 안돼 적자가 나면 아무 것도 못받죠. 순수연극 공연의 98%가 적자를 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작자나 극작가도 한솥밥을 먹는 처지라 비슷하죠.”
허 회장은 “연극무대 생활로 생계가 해결되는 배우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며 “남자 배우들의 이혼율이 60~70%에 달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연구생이 아니라 정식단원인 배우협회 회원 800여명 중 TV 출연 등으로 그나마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불과 20~30여명뿐입니다. 일반인들이 얼굴을 보면 아는 배우들이죠.”
그래서 공연이 없을 때 대부분은 막노동이나 아르바이트를 한다. 여자 배우들은 주로 노점상 아르바이트, 애 봐주기, 식당 주방일을 하고 남자 배우들은 건설현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같은 불황에는 건설경기마저 추락해 이마저도 힘들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니 연극 질(質) 저하가 큰 문제다. 허 회장은 “연극은 하루라도 단련을 안하면 연기도 녹슬고 몸이 굳는다”며 “국가대표 축구팀이 소집돼 며칠 훈련하고 경기에 나서면 성적을 잘 내겠느냐”고 반문했다.
“연극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연습을 1~2년 못하고 막노동이나 아르바이트하다고 오면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무대를 떠나 돈을 벌어야 하고 돌아오면 제대로 연기하기가 힘들고, 그러면 관객을 줄고…. 이게 악순환이죠.”
그는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국민의 관심과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순수예술을 살리기 위해, 배우들이 최소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연극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우 훈련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원액은 1인당 월 80만원 정도.
“연극배우들과 일부 극작가ㆍ연출가를 포함해 500~600명 정도가 몇개 그룹으로 나뉘어 경제적 걱정없이 연극 훈련을 하고, 그 완성도가 일정 수준에 오르면 정식 공연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이 시스템이 정부에게 ‘가난을 구제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훌륭한 연극배우를 양성해야 연극이 살고 순수예술이 살고, 나아가 우리나라 문화산업이 더 발전한다”는 차원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최근 ‘한류(韓流)’ 붐에서 보듯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죠. ‘모든 연기의 어머니는 연극’이라는 것입니다.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연극배우들이 영화와 TV로 공급이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연극배우들의 환경이 개선돼야 하죠.”
허 회장은 내년 4월 ‘연극 없는 달’ 선포가 단순히 사회적 관심을 끌려는 차원만은 아니라고 했다. 국민들이 ‘연극배우는 춥고 배고프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배우들의 생활을 들여다 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배우들 스스로도 그 기간동안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자체적으로 자성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교 3학년때부터 5년간 라디오 성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허 회장은 1968년 배우로 정식 데뷔해 무대생활이 34년째다. 지금까지 70여편에 출연했고 극단 운영도 해봤다. 현재 극단 ‘춘추’ 소속 배우이다. 허 회장은 인터뷰 내내 ‘예술은 산소’라고 말했다. 없어서는 안되지만 그 중요성을 모른다는 것.
“잘 훈련된 배우들이 무대위에서 싱그러운 꽃처럼 향기를 내뿜고 관객들은 그 향기를 맡고 만족하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연극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고 연극을 아끼고 사랑해줬으면 하는 바람니다.”
(경창환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chky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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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2-26 10:41   좋아요 0 | URL
내년 4월이 연극 없는 달이라니......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착안을 다 했을까에 생각이 미치니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니르바나님, 성탄 연휴 잘 보내셨죠?^^)


니르바나 2004-12-26 11:39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알라디너 중에도 연극에 관여하고 계신 분이 있잖아요.
제 일처럼 걱정이 되는군요.

세상을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미냐고 하신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은,

생각할수록 명언입니다.

네. 저는 성탄 연휴를 잘 보내고 있습니다.

로드무비님도 보람있는 시간 보내셨겠지요.


파란여우 2004-12-26 13:31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읽을때마다 돈 때문에 사람이 거시기해진다고 생각하면 많이 속상합니다. 현실의 냉정함은 우리들의 꿈도 얼마든지 앗아가지 않습니까.

sweetrain 2004-12-27 03:04   좋아요 0 | URL
참...누구든 돈 때문에 꿈을 접는 사람이 없기를,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저도 한때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내년에는 학교에 복학해 시간을 쪼개서 연극을 한번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은데, 기회가 있겠지요. 이러다 또 언제고 안 이쁘고 덩치 크고 머리가 곱슬곱슬한 여배우가 될지도 모르구요.^^)

니르바나 2004-12-27 10:32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연극이 현실인 분들에게 힘이 되는 페이퍼를 부탁드릴께요.

냉탕에서 온탕으로요.

니르바나 2004-12-27 11:04   좋아요 0 | URL
단비님, 한 위대한 배우의 탄생을 기대하겠습니다.

책을 사랑하시는 님의 내면이 연기로 표현되는 날이 어서 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