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느라 아직 블로그를 깊이 파고 들어 보진 못했는데, 저자분이 아마도 전쟁사 덕후시리라. 이렇게 분량이 크고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저자 소개 페이지에 따르면) 내 편견이겠지만, 대학 소속이 아니라 개인 연구가라는 점에서 놀랐던 것(덕후가 세상을 바꾼다!).
사실 가장 놀라운 점은, 970쪽이나 되는 책을 읽는데도 어느 한 페이지가 지루하거나 재미없거나 하지 않고 더더더 읽고 싶고 계속 읽고 싶게 만든다는 점이다. 저자 분께서 엄청난 연구 성과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잘 풀어내는 능력 또한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앞에서 말했듯 2차 세계 대전 관련 책을 만들 때마다 한번도 재미나 공감이나 와닿는 부분이 없었는데.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두꺼운 벽돌책이어도 도전해보시라고 추천하게 된 이유다.
2. 흔히, 2차 세계 대전에 관해 우리의 관심사는 히틀러, 스탈린, 또는 미국의 참전과 일제 패망, 대한민국 수립과 관련된 단편들의 모음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승자의 전쟁 뒤에 가려진 또 하나의 세계사'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세계가 쑥대밭이 될 때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던 유럽과 아프리카의 약소국들의 전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필 이 책을 읽고 있던 중에 미국의 이란 공습이 이루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어 더욱 더 이 책이 단순 역사책이 아니라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에도 나오지만, 2차 세계 대전은 1차 세계 대전과 연결이 되고, 1차 세계 대전 역시 그 이전의 유럽 패권을 둘러싼 여러 나라의 갈등 국면에서 이어지는 것처럼(과거에서 이어짐), 러-우 전쟁도, 미국과 중동의 갈등도, 대만과 중국의 갈등도 2차 세계 대전과 냉전시기의 불똥이 지금까지 연결되는 것이다(현재까지 연관). 그렇다면 역시 미래도 연결이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강대국이 아닌 '우리'라고 별다를까. 이런 의문을 서문에서 제시하는 저자의 말에 엄청 공감했다. 우리는 강대국의 전쟁에서 실제로 직접적 피해를 입은 나라(심지어 지금도 미국과 이란의 싸움 중에 우리나라 유가가 미친 듯이 상승 중-물가 어쩔;)인데도 왜 그동안은 이런 약소국들이 전쟁을 어떻게 치렀는지 전혀 배우지 않았는지. 관심도 안 가졌을까. 두 번째로 이 책이 놀랍다 생각한 점이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3. 이 책에 등장하는 약소국들은 에티오피아, 핀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스,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이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첫 장이기도 하고, 전혀 몰랐던 아프리카 이야기기도 해서 인상적이었던 장은 <1장-아프리카의 자존심-에티오피아>였다. 여기 등장하는 에티오피아의 이야기는 정말 생전 처음 알게 된 이야기들이었고, 이렇게 까지 적에 맞서 자국을 지키기 위해 황제부터 국민들까지 모두 노력한 나라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에티오피아가 왜 머나먼 한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에까지 군대를 보냈는지도 알게 되었다(흔히, 에티오피아 하면 아프리카 최빈국 이런 정도로 알았는데 한국전쟁에 파견을 왜 했을까 늘 궁금했었음). 2차 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싸워 승리한 에티오피아의 황제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국제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한편 서방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도 아프리카를 지배하려는 유럽 식민주의를 강력히 비판해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아프리카를 이끄는 당당한 주도국이었던 것. 이 황제가 1968년에 한국을 직접 방문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황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의 쿠데타로 사망했고 에티오피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정권을 잡은 마리암 소령은 철권 독재자가 되어 에티오피아를 세계 최빈국으로 만들고 말았다. 최근에 와서야 민주 정부가 들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고 하지만 안타까운 현대사다.
에티오피아를 첫 장에 배치한 이유를 내 나름대로 짐작하자면, 온갖 시련을 견뎌 내고 승리를 얻은 에티오피아의 이야기가 뒤이어 나오는 유럽 지역의 다른 약소국들의 대응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독자들 중에 에티오피아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터인데 에티오피아 이야기를 과감히 첫 장에 배치한 것도 이 책의 놀랄 만한 포인트다.
4. 이 책에는 우리가 강대국, 혹은 열강이라고 부르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 등 2차 세계 대전의 주도국가의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어리석고 무능하고 음흉하고 감정적이고 자만심이 가득한가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전쟁 초반에 우왕좌왕하는 연합국, 특히 프랑스 군의 황당한 지휘 체계와 사령관 가믈랭 장군, '나만 아니면 된다'면서 사실상 모든 승기를 놓치고 이리저리 재고 있던 영국의 체임벌린 같은 무능한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초장에 끝장낼 수 있었는데 덕분에 승승장구한 히틀러 때문에 죽어나간 유대인들과 독일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가 지나가는 지역의 주민들과 군인들의 죽음이 정말이지 억울하게 느껴진다. 약소국의 만 제물로 삼아 밀실에서 흥정(그나마도 제대로 못함)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 사실상 그들이 '히틀러의 최대 공신'(504p)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세계 열강이다. 이 부분이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분통 터지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러-우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하는 태도가 과연 2차 대전 때와 뭐가 다른지.
영국과 프랑스뿐 아니다. 패전으로 고통 받은 나라들의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때 잘나갔던 체코슬로바키아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강대국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승리에 취해, 독일의 변화를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고, 또 다른 전쟁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고, 평화에 안주해 중립을 선언하고 다른 나라와의 밀접한 교류도 하지 않았고, 극심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기도 했다. 설마설마하다 그냥 자포자기하거나 소련을 끌어들이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도자의 이런 모습에 국민들이 누가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하겠는가. 어려운 때 어떤 지도자가 나라라를 이끄느냐가 이렇게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은 이런 지도자들의 온갖 황당무계한 무능함이 실려 있다(장군이 포기하고 울지를 않나, 충격받아 쇼크로 쓰러지지 않나, 비행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전투를 못하지 않나 등등등 너무 많음). 그리고 개인적으로 놀랐던 건 독일-핀란드(핀란드는 할 수 없이 참전, 나중에 빠짐)와 소련과 맞붙었을 때, 루스벨트가 소련에 호의적이어서 이에 따라 어마어마한 물자를 제공했다는 사실(252p)이다. 심지어 소련의 요청에 의한 것도 아니고 미국이 먼저 소련에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만약 이때 소련이 독일에 공격을 받아 세가 꺾였다면, 이후 소련이 동유럽 지역에 행한 여러 폭력적인 상황들이 가능했을까. 물론 덕분에 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했지만, 이후 냉전의 역사와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지적 갈등의 시초에 미국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들이 지금의 지위를 유지할 자격이 있는지, 그 유지에 누구의 희생이 바탕이 되었는지에 대한 지적을 안 할 수가 없는 지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느낀 것은, 각 나라마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고 진 이유는 하나라는 점도 놀라웠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병법>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병법 원칙이었던 것. 위험을 줄이는 준비와 판단이 있는가, 없는가 여부가 바로 승패를 갈랐다. 약소국이든 강대국이든 할 것 없이 말이다. 진리라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단순한 것인 셈.
5. 2차 세계 대전의 이야기는 남의 일 같고 먼 이야기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일본의 전쟁 이야기들이 나오질 않지만, 책 곳곳에 우리와 관계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우리의 해방과 분단도 결국 2차 대전과 연관이 있고, 2차 대전 이후 각국에서 질서를 회복하면서 생기는 좌파와 우파의 갈등으로 인한 내전과 같은 상황에 해결사로 등장한 미국이나 소련이 개입해 더 큰 갈등이 지속되기도 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전후 좌우파의 갈등으로 4년간의 내전이 일어난 그리스 상황을 보고 미군정 당시 반미시위가 일어난 남한을 제2의 그리스로 생각한 미국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그 본보기를 보였다고 한다. 무솔리니의 헛된 욕심에서 비롯된 일이 돌고 돌아 머나먼 우리에게까지 여파가 미쳤으니 '역사의 나비 효과'(711p)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또한 분단 이후 소련의 영향으로 이제는 통일이란 말이 무색해진 고립화한 북한의 현실과 핵 위험 역시 스탈린의 헛된 야심에 휘말려 혹독한 대가를 치른 동유럽 국가들의 과거와 뭐가 다른가 싶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렇게 전세계의 역사가 하나로 이어져서 현재의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새삼 발견한 놀라운 점이다. 국내 저자의 책이라 이런 부분들도 알게 되어 참 좋았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아시아의 약소국 관점에서 2차 세계 대전사 책을 후속으로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 많이 들었다.
기한에 맞춰 책을 읽느라 여러 부분에서 아직 생각이 정리가 덜 된 부분도 있고, 인상적이었던 부분 인데스 붙인 페이지도 엄청 많은데 다 소개하지 못하고 해서, 다시 한번 찬찬히 공들여 읽어보려고 생각 중이다. 또한,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려고 생각 중이다. 최근에 만난 국내서 저자들 중에, 문체, 연구 성과 등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 아닐까 싶어,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발견(!)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이렇게 곳곳에 포진한 새로운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독서란 참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