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스타링 그랜트가 쓴 <메일맨 Mail Man>은 제목 그대로 '우편 배달부'의 삶을 살게 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담은 책이다.
출판사에서 전체 내용을 보내준 게 아니라 1장, 9~15장, 21장, 25~27장만 발췌해 보내준 가제본 본이라 정확한 목차나 책을 읽고 느끼는 세부적인 감정들이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우선 주어진 만큼의 분량을 읽고 느낀 점이 요즘 내가 느끼는 부분과 많은 부분이 겹쳐져서 저자의 이야기에서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잘나가던 마케팅 전문가였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급작스레 해고를 당한다. 문제는 저자 스티브 그랜트는 암 환자였다는 것. 새 마케팅 일자리를 구하기에는 전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힘은 들고, 건강보험이 꼭 필요했던 그는 결국 시골의 우편 배달부가 된다. 9장부터 15장까지의 이야기는 우편 배달부 초짜 시절의 이야기다. 그것도 정식이 아닌 보조 배달부. 안락한 사무실 책상 앞에서 바깥의 상황과 상관없이 머리만 쓰던 작가가 점차 우편 배달부로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전세계를 휩쓸었던 팬데믹 시대(생각보다 다들 까마득하게 빨리 잊어버린 그 단어!)가 지나고 나니 AI가 이제 대세가 된 현실에서, 이제 인간은 전염병이 아니라 기계에 밀려 안락한 책상에서 퇴출되고 있다. 우리가 팬데믹 시절에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거라 생각한 시대가 지금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한 게 인간은 어떤 것에도 다 취약한 존재였던 것을 깨닫는 결론이었던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지 않았나? 그렇지만 AI에 대한 공포에 그 '믿음'마저 흔들리고 있다(나만 그런 거길).
어쨌거나 노력했는데도 모자란 상황에 미쳐버릴 것 같은 상태에서 결국 우편 배달부에 적응하며 저자는 깨닫는다. "내가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를 본질로 데려간 것은 내가 잘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못하는 무언가였다. (중략) 내일 다시 일어나 또 그렇게 하는 거다. (중략) 결국 내가 버텨내리라는 것을." (11장) 결국 저자는 "이 일만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늘었다. (중략) 단순히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는 생생한 감각 속에 살았다"고 깨달으며 '우편 배달부'가 되어 있었다.
AI 관련한 책들을 읽다 보면, 과연 인간이 끝까지 '인간답게' 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저자가 좌충우돌 우편 배달부로서 몸을 쓰며 살아가는 모습이 잊혀져 가는 팬데믹보다 다가올 AI 시대의 공포에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나간 걸까.
우편 배달은 사기업이 아니고, 공기업이다. 정부가 시민에게 제공해야 할 지속성, 안전, 안정감, 동지애, 문명(9장) 같은 것을 전하는. 서로가 얼마나 똑똑하고 잘났는지 보여주느라 혈안이 된 사기업이 아니라, 같은 동료가 내일도 나올 것인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지만 고려하는 우체국. 여기서 저자는 공간, 숫자, 언어에 대한 기억력은 물론이고 몸조차도 여러 가지면에서 이상할 정도로 약해졌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렇게 힘들어 지치고 다 때려치고 싶을 정도 체력이 바닥나고 정신력이 약해졌을 때, 저자의 동료 캣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하루만 더 버티세요. 일단 남은 것들만 먼저 해요." 이 이야기는 뒤에도 계속 반복된다. 언제나 우체국에는 신입이 들어오고 신입들이 멘붕에 빠질 때, 이제는 저자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깨닫는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버티는 거였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참 위로가 되었다. 이 문장이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이 문장을 말한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자리까지 간 걸 생각하면 엄청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김연아). 무력한 인간에게 인간이 줄 수 있는 가장 원초적 위로. 이렇게 저자는 매일을 버텨낸다. 때로는 동료가, 때로는 와이프가, 때로는 배달부를 인간으로 대접하는 동네 주민들이 그를 위로한다.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이렇게 서로의 부족한 면을 알고 서로 돕는 사람들이 있어 인간이 사는 세상은 유지되는 것이다. 숫자와 글자 때문이 아니라. 그리고 저자는 일을 할수록 혁신이니 법칙이니 하고 떠들어 대던 '유리병 속의 뇌'가 아니라 내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를 깨닫고 그 상태를 즐기고 좋아하게 된다.
저자가 마케팅 전문가에서 우편 배달부라는 극단적 스위치를 통해 깨달은 점은 생각할 바가 많다. 머릿 속이나 컴퓨터 화면, 종이 위의 글자나 숫자가 아니라 몸으로 버티는 일들의 가치가 AI 시대에 좀 더 각광을 받을 것 같은데, 과연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정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지 자꾸 의문이 들었다. 이 책 27장에도 나오는데, 우편 배달부들을 위해 시원한 음료,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사람들의 선의에 대해 "거래는 당신을 소비자로 만들지만,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건 당신을 인간으로 만든다"라는 문장이 어쩌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우편 배달을 하는 길에서 깨달은 바들이 친절과 희망이 주는 존엄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나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잊으면 안되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런 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이 나오면, 다시 발췌독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