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직간접적으로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내게, 이 책은 꼭 필요한 책이었고, 많은 질문을 던졌으며 또 여전히 숙제를 남겨놓고 있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깊이 통감한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 중 어떤 점은 내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고, 어떤 것은 또 내가 할 말을 저자가 속 시원히 해서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하기도 했다. 

저자 박상익은 우리가 흔히 창작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번역'이 사실은 얼마나 중요하며, 전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나라(특히 인문학계)의 현실에서 번역 작업이 얼마나 중요하며 꼭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도 이런 주장은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공감과 반성을 하게 한다.


몇 년 전 애덤 스미스 국부론에 관련된 책을 만들 때였다. 철학이나 정치학, 경제학쪽 책은 아니고 교양서적으로서 부담 없이 읽을 가벼운 책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도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서에는 애덤 스미스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가 마구 쏟아져 나와 국부론 원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해서 애덤 스미스와 국부론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배우고 듣고 했는가. 아마 보이지 않는 손과 애덤 스미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점에는 국부론 자체를 번역한 책은 없었다. 출간된 적은 있는데 절판이거나 품절이었으니 쉽게 구할 수 없었단 뜻이다. 그렇다면 그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자체를 해설한 책도 있고, 애덤 스미스 생애에 대한 책도 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 국부론 자체 번역본이 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이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검색해보니 다행히 국부론이 번역되어 있다. 내가 작업을 한 이후에 나왔으니 틀린 사례는 아니다. 지금이라도 번역되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이런 사례는 아마 자기가 하는 일과 관련된 자료를 찾거나 할 때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일 중 하나일 뿐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윤리가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플라톤이나 칸트니 원전도 안 읽었고 못 읽었으니 이해가 되며, 공부가 쉽겠는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우리글의 불행했던 역사, '번역' 자체를 폄하하는 학계(혹은 사회 전반적인) 풍토, 글 값을 후려치는 출판업계의 문제, 절대로 책을 사지 않는 도서관 정책, 문화적 기반을 닦는 데 관심 없는 문화부(문화부 장관이 문화 관련 인사인 적은 아마 이창동 감독일 때가 유일했을 듯.. 다 정치가들인 현실에서 무슨 문화 정책이 나올까) 및 정부 관료들, 그리고 인문학 교수들의 무책임 혹은 보신주의, 정보의 독과점욕, 편집자와 저자의 소통의 문제...자기 분야의 새로운 용어가 들어오면 번역할 만한 단어를 신경 쓰지 않는 언론 이하 각 분야 사람들의 무책임함...


이렇게 복잡한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를 하면, 늘 나오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라는 말...국민 소득이 1만 불이 넘어선 지가 언젠데 이 말이 왜,  여전히 통하는 것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던 속도지향적인 사회의 급격한 변화 혹은 성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제와 오늘이 아주 다를 정도로 매일 매일이 '다이나믹 코리아'인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는 현재 선진국인 서구 및 일본 등이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한 것을 우리는 몇 십 년 만에 해내면서 외형은 엄청나게 성장했는데, 내용은 따라서 크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직 정신연령은 초등학생인데 키가 180이 넘어버린 그런 경우랄까. 먹고 사는 문제 이외에는 우리의 문화, 역사, 말, 글... 기타 등등 여러 소중한 자산들이 말린 고추마냥 쪼그라들어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키 크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마지막에 한 말처럼 '절망은 금물이다.' 우리 모두가 조금만 움직이면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만이라도 생각을 바꾸고, 안 될지도 모르지만 문화관광부 및 관련 단체에 탄원도 넣고, 각 지자체에 도서관 예산에 대해 말이라도 하고(곧 지자체 선거 기간이다!), 교수에게 익명으로라도 자기 분야 번역하라고 압력 이메일을 넣거나 오역을 지적하고...아니면 이 책을 도서관에 비치해달라고 학교 도서관에 이야기하거나...어쨌든 개인이 조금씩 움직이면 '언젠가는' 절망이 희망이 되지 않을까...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진 감이 없지 않다. 간만에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게 만든 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 내게 있어 올해 상반기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지적 자극을 주면서 생각을 던지는 책을 난 너무 사랑한다.


ps: 그런데 옥의 티-내가 가진 책은 1쇄본이다-가 있다.


22쪽의 6번째 줄 문장은 이상하다.


"그것들보다 더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일본 에도 중기 이래의 란가쿠와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이야말로 한문 문명권과 그리스, 로마 문명권을 융화시키며 동서 문화 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이렇게 고쳐야 할 듯하다.


"그것들보다 더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일본 에도 중기 이후의 란가쿠와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이다. 그것이야말로 한문 문명권과 그리스, 로마 문명권을 융화시키며 동서 문화 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48쪽의 11번째줄 마이클 스콧Michael Scot도 Scott이 아닐까?  127쪽의 인용문 중 "틈만 나며"도 "틈만 나면"이 아닐까 싶다.


2쇄에서는 고쳐졌거나 고쳐졌길 바라면서...(그래도 이 정도만 돼도 이 책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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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out 2006-03-1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자요... 22쪽의 그 문장은 저도 비문이라고 체크해두었는데..^^ 그걸 지적해주신 분이 있으니 반갑슴다. 주석에 따르면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라는 책에서 따온 부분인데 원본에 그렇게 되어있든가 아니면 출판사의 교열실수든가... 앞의 경우면 저자가 문장의 오류를 지적해주었으면 좋았겠다 싶지요.

레이첼 2006-03-1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2쇄 때는 고쳐서 나오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