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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찾기
마리네야 테르시 지음,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7년 3월
평점 :
그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멈추는 날이 없다.
이제는 볼 수 없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단 한순간도 그만 둘 수는 없다.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창의 피> 중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이 작은 책속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길래 책장을 열자마자 저렇게 가슴을 적시는 글이 적혀 있는 걸까?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시간을 보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경험이 있는 이가 저 글을 보고도 책을 읽지 않고 덮을 수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나역시. 이미 빗물이 내리기 시작한 마음의 창문을 바라보며 책 속을 기웃거린다.
#일기를 쓸거야! 아빠를 잊지 않기 위해!
방긋 웃으며 유모차에 누워있는 아기의 곁에 서 있는 건 아빠다. 아장아장 걷다 쓰러진 아기를 일으켜주는 것도 아빠의 아름다운 손이다. 아이가 웃을 때, 울 때도 아빠의 따뜻한 품안에 있었다. 아빠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잠 못드는 밤이면 아빠의 시곗소리를 들어야 잠이 들던 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은 가브리엘 2세, 아빠의 이름은 가브리엘 1세이다. 얼마나 아들을 사랑했기에 같은 이름으로 정했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 아이의 삶에서 아빠가 사라졌다. 어른들은 모두 아빠가 죽었다고 했지만 아이는 아빠가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아주 먼 여행을 따났을 뿐이라고. 언젠가는 돌아올 거란 기대를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아이의 힘듬이 느껴진다. 다 알면서도,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어야 하는 힘듬을. 울면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말을 하면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이는 울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힘듬을 이야기 하지도 못한다.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빠를 찾아 떠도는 섬이 된다.
일기를 쓰는 이들의 마음을 부실하다고 비웃던 아이가 일기를 쓰려고 한다. 아빠를 잊지 않기 위해, 아빠를 알아가기 위해, 아빠를 잊지 않고 싶은 자신을 위해 일기장에 아이는 아빠에게 편지를 쓴다. 부치지 못 할 편지를, 그러나 꼭 전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편지를.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는데 할 일은 점점 많아져!
아빠를 위해 15살의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니 가브리엘을 아이라고 부르면 안되겠다. 가브리엘은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아이인채로 머무를 수 있는 세계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떠난 이가 더 애달픈 건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열심히 사는 것이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은 마음에 와닿지 않고 그가 나에게 해준 것만 계속 생각나서 미안함, 후회로 가득차게 된다. 죽음이란 건 이렇게 아프다. 하물며 가족의 죽음은 그 이상이다.
가브리엘에게 아빠는 전부였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할만큼 아빠는 가브리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가브리엘은 이제 아빠를 남자로 볼 수 있는 나이로 올라서고 있는 지금이 너무 안타깝다. 남자대 남자로 아빠를 이해하고 싶고, 아빠의 이해를 받고 싶고, 아빠의 조언을 듣고 싶은 현실에 아빠는 없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
사랑하는 이에게, 여전히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이에게 더이상 해줄 일이 없다는 것, 그것만큼 아픈게 있을까? 그 아픔만으로도 벅찬데 삶은 가브리엘에게 해야할 일들을 넘겨준다.
#사랑해요, 아빠. 그말이 정말 하고 싶었어요!
가브리엘의 일기장에 적힌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음의 창문에 비를 내리게 한다. 함께 맞아줄 수 없는 나는 그저 안에서 그 빗물을 보고 있다. 그 비가 가브리엘의 눈물임을 알면서도 함께 맞아줄 수 없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성숙한 가브리엘은 아빠의 죽음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다. 성숙에는 아픔이 따른다. 가브리엘은 이 성숙의 아픔을 가슴으로 삭힐려고 한다.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브리엘은 아빠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아빠를 위해 해주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다. 아빠가 자신에게 말한 것처럼 사랑한다고 말해보고 싶고, 아빠가 사랑해준 것처럼 아빠를 사랑하고 싶고, 아빠가 꼭 안아주었던 것처럼 아빠를 꼭 한번 안아주고 싶다. 아빠에게 쓰는 편지는 답이 없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알고 있다. 이미 답은 아빠가 전해주고 있음을.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아빠가.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를 건널 강에 빠진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항상 같은 꿈을 꾼다. 아름다운 강에 홀로 배를 타고 있는 가브리엘이 원하는 것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아빠도 엄마도 친구도 없는 그곳에서 가브리엘은 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성장의 강, 그 안에 가브리엘이 있다.
성장의 강에서는 누구도 손을 뻗어줄 수 없다. 스스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 온 뿌리는 무엇이었는지, 나만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하고 직시할 수 있을 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때 깨닫게 될 것이다. 강에 가만히 서 있는 배라고 느꼈지만 실은 그곳은 늪이었다고. 그 배가 늪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부모가,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 배 밑에서 배를 들어올리고 있었던 것을. 자신 안에 살아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고마움을.
#성장소설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가브리엘의 성장을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가브리엘의 엄마의 성장도 보여주고있다. 어떠한 나이이든 성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죽기 전까지. 아빠의 삶을 돌아보며 가브리엘은 죽은 아빠의 뿌리도, 자신의 뿌리도 찾아내려 한다.
자신이 한그루 나무라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뿌리를 보기 위해 튼튼하게 받쳐주는 땅을 스스로 파헤치는 것은 분명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고통을 받아들이며 흙을 걷어낸다. 그 고통을 넘어서야 자신의 뿌리를 어느 곳으로 뻗어가야 할지를 알게 될테니. 나도 아직 내 뿌리를 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가브리엘을 알게 된 후로는 조금 더 빨리 나도 내 뿌리를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내 뿌리도 가브리엘처럼 내 부모가 흙 없이도 견딜만큼 옆에서 감아주고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10대의 이야기는 절대 10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장소설에 그들이 주로 등장하는 건 아마도 그들은 힘이 약해 스스로 몸을 내던질만큼 열심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처럼 이것저것 재보고 지름길을 먼저 찾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음과 온몸으로 부딪히는 삶의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10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읽혀진다. 이 책 역시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자신의 모습을 찾고 싶은 우리 모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