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이라, 그를 만난 건 <1파운드의 슬픔>이었다. 30대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얼마나 안심했던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20대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던 내게 그가 보여준 30대의 사랑은 서른으로 가는 길목이 두렵지 않게 해주었다. 아직은 서른이 아닌 나지만, 비틀거리며 20대를 보내고 있는 나지만, 이시다 이라의 말대로 진정한 성인식은 서른살에 하기로 결심했다.
"30대는 드디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세상이란 게 어떤 건지 슬슬 보이게 되는 나이죠. 그제서야 처음으로 뭔가를 시작할 수 있게 된 사람이 아마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전 성인식은 역시 서른살에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1파운드의 슬픔, 작가의 말)
30대의 사랑을 그린 이시다 이라가 이번에는 40대 중반의 여성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이시다 이라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가 나이가 들듯 그의 주인공들도 나이가 드는 것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렇기에 그 나이가 될 때에도, 그 나이가 되기 전에도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한다. 그 나이의 내가 뜨거운 사랑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일을 사랑하며, 삶을 감사해 하며 살고는 있을까?란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런 내게 이시다 이라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 그것이 소설 속 이야기만이어도 좋다.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있는 내가 있기에! 그 속에서 나는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고 행복이란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해서 현실로 가지고 나왔기에!
#검은색을 닮은 그녀-우치다 사요코
<검은색은 한없이 묘한 색이다.
불그스름한 빛을 띠기도 하고 녹색을 띠기도 한다.
반짝이는가 하면 노란색이다가 보라색을 띠기도 한다.
그 중에는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검은색도 있다.
빛이 전혀 없는 정적을 검정이라고 한다면 모든색을 합쳐놓은 떠들썩함도 검정이다.>
바다가 아름다운 쇼난이란 곳에 45세의 판화가 우치다 사요코가 혼자서 살고 있다. 검은색과 흰색 종이로만 작품을 완성하는 그녀의 별명은 '검은 사요코'. 한번의 결혼에 실패한 후로 줄곧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검은색을 닮아있다. 얼핏보면 정지된 것 같은 그녀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단조로울 것 같은 삶은 들여다보면 여러가지의 감정들로 소용돌이 치며 어느 나이보다 마음에 울림이 강하게 들린다.
45세 이전의 그녀의 삶은 책 속에서도 비중이 크지 않다. 그녀의 과거는 이미 45세의 그녀에게 들어있기 때문에. 이 점이 참 좋았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지금의 그녀의 모습이 과거의 젊은 그녀가 담겨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그녀는 젊은 그녀와 나이든 그녀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녀'인 것이다.
#진주같은 여자-우치다 사요코
<"그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지.
다이아몬드 같은 여자와 진주 같은 여자.
밖으로 광채를 뿜어내는 타입의 여자와 광채를 안으로 품는 타입의 여자.
행복을 손에 쥐는 것은 누구한테나 금방 눈에 띄는 화려한 다이아몬드 같은 여자지.
좋은 진주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남자는 드물거든.">
우치다 사요코를 잘 알며 그녀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인 마치에는 그녀가 진주 같은 여자라고 말한다. 진주는 다이아몬드와 달리 빛을 반사하며 내뿜는 것이 아니라 빛을 내면으로 끌어들여 소중하게 간진한다. 속에서 빛을 내고 있기에 그 빛을 알아 보는 남자는 드물다. 사요코는 가끔 몸을 섞는 화랑의 매니저 이외에는 남자가 주위에 없다. 일하느라 집에만 있는 그녀가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 그녀 속에 품어진 진주를 발견할 남자 역시 없다. 사랑이라 부를 남자들은 전에는 몇 번 있었지만 현재의 그녀에게는 사랑이라고 부를 남자가 없었다. 모토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주와 검은색은 모두 사요코를 잘 설명해준다. 둘의 공통점 역시 같다. 모든 것을 흡수한다는 것! 검은색은 모든 색을 흡수해서 만들어진 색이기에 단색으로 보이지만 다양한 색을 뿜어내고 진주 역시 빛을 안으로 흡수하기에 더 은은하고 매력적인 빛을 보여준다.
#시리도록 맑은 사랑을 하는 여자-우치다 사요코
<"그렇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제일 잘 이해해주기 때문이라거나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 아니야.
잘 모르겠지만 함께 삶을 나누고 싶다,
그 사람의 일부가 되고 싶다,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니겠어?">
45세의 우치다 사요코가 사랑하는 남자는 28살의 도모키이다. 영화감독을 하다가 한번의 실패를 맛본 후에 사요코가 자주 가는 카페에서 일하는 도모키는 사요코에게 오랜만의 두근거림과 기대를 안겨준다. 이미 객년기 증상인 핫플래시를 경험하는 나이인 사요코는 설레임이란 감정만으로 삶의 활력을 갖게 되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도모키가 다가오기 전까지. 도모키가 내민 손을 잡는 사요코를 보며 읽는 동안 왜 한번도 말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걸까!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사랑, 현재에 충실하며, 타인을 위한 사랑을 하는 그 둘은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열심히 살게하는 것은 없다고. 아픔이 가득함을 예고한 사랑은 눈이 시리도록 높은 가을 하늘과 가을 바다를 닮았다. 아름답지만 눈이 아파서 제대로 볼 수 없는 가을 하늘과 바다를 닮은 그들의 사랑에 몇번이나 가슴 졸이고 숨을 가다듬었는지 모른다. 사요코의 마음이 내 마음 같아서, 그녀가 아파서 그들의 사랑에 박수만을 보내고 싶어서, 현실이란 시간을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게 해주고 싶었다.
#어느 나이여도 아름다울 여자-우치다 사요코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바닷물의 흐름에 실려 오랜 세월을 헤매고 다니다 온 조각들에게 왠지 모를 무한한 애정이 느껴져.
상처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닳고 닳았고,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 바랬으면서도 기본적인 모습은 간직하고 있는 걸 보면
아, 이 녀석들, 죽기 살기로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표면적인 생생함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래서 거꾸로 본연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 같아."
45세의 우치다 사요코를 보며 인간이란 나이에 걸맞는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이 합쳐져 자신의 나이에 맞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 내가 살아온 시간,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는 것이다.
한때는 빛이 나는 시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20대의 사랑만이 빛나고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을 했었고, 20대의 젊음만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일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책을 통해, 주변을 돌아보며 알게 된다. 가장 아름다운 나이는 바로 지금의 나이라고. 가장 아름다운 나이의 사랑은 언제나 빛이 난다고. 사요코와 모토키의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사랑은 가장 빛나는 나이, 현재까지 오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을 시간들이 쌓여진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얼마나 멋진가! 지금의 내 나이가 가장 빛나는 시간이라는 것! 더 멋진 건 나이가 들면서 내 미래의 나이는 분명 전보다 더 빛이 날 것이라는 것!
가슴을 울리는 사랑이야기와 함께 내가 얻은 것은 스스로 나를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