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무라 가오루의 책에는 봄바람이 분다. 횟수로 세기 힘든 많은 봄을 맞이하고 보내면서도 신기하리만치 봄바람은 무작정 따뜻하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봄의 중앙에 서있고 나서야 차가움이 강한 봄바람, 풀잎만을 살짝 움직이는 수줍은 바람, 입고 있던 외투를 벗길만큼의 따사로운 바람 등 여러가지 봄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계절의 느낌은 지나고 나면 하나의 좋은 느낌만 남고 리셋되는 것일까? 이 책을 덮고 시간이 흐르면 이 책에서 불었던 수 많은 바람의 종류를 잊게 되는 걸까? 그 생각에 차가운 봄바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잊지 않을게라는 말과 함께.
#얼음을 녹이는 첫 봄바람
<......30여 년마다 유성군이 사자자리 방향에 나타난다 별은 하나씩 하나씩 꼬리를 늘이며, 칠흑 같은 하늘에 밝은 금빛 선을 그린다. 검은 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어둠을 긁어 틈새로 그 뒤의 빛이 보이는 것처럼. -p.35>
주인공 마짱(마쓰미)의 최초의 기억은 사자자리 유성군이다. 별똥별을 최초의 기억으로 간직한 이는 얼마나 될까? 33년 주기로 나타난다는 사자자리 유성군을 어릴 때 본 마짱은 심지가 곧고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치약회사에 다니는 아빠를 따라 고베로 이사와서 아빠 회사 사장 딸인 야치요와 친해지고 그 집 별채에 사는 슈이치와 풋풋한 만남을 갖는다.
이들의 만남을 풋풋하다는 말이 아닌 어떤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겨울이 가버렸는지 의심될 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 한줄기! 그 따스함, 그 새로움 그 반가움만큼의 만남이라고 해야할까? 자신의 최초의 기억을 행운이라고 말해준 아이 슈이치를 가슴에 넣고 살짝 꺼내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리는 마짱. 마짱과 슈이치는 사자자리 유성군을 추억으로 함께 간직한 사이가 되었다. 단 하나의 책 슈이치에게 돌려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책 <사랑의 가족>을 통해서.
말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을 가슴에 얼마나 긴 시간동안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
<폭력이 그린 아름다운 세상에 살면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우리의 자장가
p.370>
이 책에서 옮겨적은 구절만 몇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 아련하고 아름답고 아릿한 구절들을 옮겨적으며 생각한다. 이 시절이 전쟁 중이 맞느냐고?! 책은 마짱의 어린시절의 시대적 배경을 전쟁(제 2차 세계대전)으로 하였는데 전쟁이란 소용돌이에 있음에도 이 이야기는 서정적이고 투명하다. 이것은 마짱이 사는 곳이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많기 때문인데 전쟁의 밑바닥을 경험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시간들은 그저 조금 불편한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마짱에게 그 시간은 추억하기조차 아픈 시간으로 남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 처참함을 직접 겪지 않는 이들을 등장시키 작가는 전쟁의 진실을 부각시킨다. 전쟁의 평온함이 있을리 없는데도 주인공이 있는 도시는 그리 큰 피해없이 조용하고, 그 고요 속에 여자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언제나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거라는 시간은 이어져간다. 마치 미래가 영원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어린 소녀들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정당하다고 말하고 응원한다. 비행기의 부품을 만들며 죽으러가는 친구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가려진 전쟁의 모습 ,그래서 더욱 전쟁의 진실은 부각되는데 작가가 알리고픈 것은 이렇게 가려진 진실이 아니었을까?
마짱과 슈이치는 투명하다. 전쟁 속의 화염 속에서, 아픔 속에서 그들은 투명한 풀잎의 이슬을 떠오르게 한다. 그 시대에는 다들 그런 사랑을 했다 하더라도 단둘이 만난 적은 한번밖에 되지 않는 이들을 사랑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은 왜일까? 풀잎의 이슬도 전쟁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누굴까, 아이들에게 예전의 일기를 읽어주는 저 남자는?
#그리고 다시 부는 따뜻한 봄바람
<"봄에 5월은 한 번밖에 오지 않으니까?"
"그래, 그래."
(중략)
"잘 들어. 하지만 봄은 매년 찾아와.">
따지고 보면 비슷한 바람은 불어올 수 있지만 같은 바람은 절대 불어오지 않는다. 비슷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같은 시간을 절대 다시 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기억하고 추억을 간직하는 동물이니까. 사람에게는 봄은 항상 새롭지만 그렇다고 그 전의 봄과 전혀 다른 봄을 보내지는 않는다. 사람이 있기에 계절도 시간도 서로 연결되어 진다. 시간은 언제나 리셋될 수 있지만 그 중간에 사람이 있다면 리셋되더라도 두려움보다는 '반드시'란 희망이 남는다.
생일이 5월인 마짱은 단 한번의 행복한 5월을 16살 이후 꿈꾼다.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고 혹은 죽고 난 후 그녀가 흥얼거리는 노래 중 "봄에 5월은 한 번밖에 오지 않아요." 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한다. 봄에 5월은 한 번이지만 봄은 매년 찾아온다고. 그가 누구일까를 내내 생각하느라 책을 읽는 동안의 두근거림, 봄을 기다리는 땅 속의 씨앗들이 이럴까?
#스킵을 넘어선 감동을 리셋 시키고 이제 턴을 기다린다.
기타무리 가오루가 준비한 <시간과 사람> 3부작 중 <스킵>과 <리셋>이 나왔다. 스킵이 통통 튀면서 물방울이 샘솟는 분수 같았다면 리셋은 고요한 숲 속의 작은 호수의 빛을 닮았다. 화려하지 않은 반짝임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신비스러운 반짝임을.
<리셋>은 전쟁과 사랑을 잘 연결했는데 사랑 이야기 보다는 소녀와 소년의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녀의 성장에는 전쟁이 중심이 되고 소년의 성장에는 시간과 사랑이 중심이 되어간다. 마짱의 이야기를 읽은 후에 전쟁이야기인지 마짱의 이야기인지 고민하다가 마짱이 본 전쟁으로 결론짓고 읽기 시작한 나는 전쟁 중에도 사람의 마음은 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 모든 것이 파괴되고 업악되더라도 사람은 성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프고 서럽다 하더라도. 성장은 아픔을 수반하기에. 기타무라 가오루는 이 책에서 전쟁을 이야기 하면서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나 쉽게 잊어 버리고 마는 젊은이들에게 전쟁의 아픔과 혹은 시간과 장소가 달랐다면 당신도 전쟁을 겪었어야 했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모르는 거야. '중경重慶'이라고 해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국에서의 폭격 뉴스를 보거나 하면서 용맹스럽다고 생각했어. 연기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가, 생각도 못했지. 전차가 달리거나 군함이 포격하는 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어.
'아사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라고 하니 중국 사람도, 필리핀 사람도 모두 우리에게 감사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조선 사람의 심정도 생각하지 않았어. 이겼으면 지금도 그랬을 거야. 궁핍함 역시 알지 못했지." -p.317>
조선의 아픔을 잊지 않고 말해 준 기타무라 가오루가 고마워지기도 했다. 그들의 뉘우침이 이렇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것을 보니 일본이란 나라가 저지른 잘못에 민감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어쩌면 이 부분이 나오지 않고 처음 일본 전쟁이야기만 계속 나왔더라면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작가 기타무라 가오루라고 해도 다 읽고 난 후에 지금처럼 책을 가슴에 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타무라 가오루의 작품은 뒤에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처음부터 차곡차곡 쌓은 감동의 파도는 그 결말이 예상 가능했든, 하지 않았든 마음 속에서 큰 물결을 만들어 낸다. 누구나가 생각한 식상한 소재를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다음 작품 <턴>이 곧 나온다고 하니 올해도 기타무라 가오루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 하긴 다행이다. 그의 작품은 읽고 나면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거나 시간에 지지 않고 내 행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 시간의 소중함으로 인해 더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 싶어지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