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이강호
박천웅 지음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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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피기 시작한지 한시간안에 다 읽어버렸다. 전에 유쾌하게 봤던 드라마 속의 주인공과 책의 주인공의  이름이 같아서인지 책의 상황설정을 드라마에 집어넣으면서 읽어내려가니 재미가 한층 더해졌다. 시중에 나와있는 처세서나 자기계발서적들은 누구나 무릎을 탁탁치며 '그래. 이렇게만 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을거야.'라고 깨우침을 주기는 하지만 나와는 먼나라 이야기같아 동질감을 같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실화를 담은 이야기여서인지 직장인이라면 흔히 겪을수 있는 여러개의 에피소들로 이루어져 있어 나의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많아 주인공 이강호와 동질감을 느낄수 있었다. 깨달음, 웃음, 동질감의 세박자를 두루갖춘 이 책은 직장 새내기나 혹은 직장 1년차인 이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줄 수 있을거라고 본다.

 

 책은 이강호가 직장 1년차가 지나면서부터 일을 그리고 있다. 대기업 시험에 여러번 떨어진후 중소기업으로 와서 1년동안은 이런저런 잡무만 하다가 입사한지 1년이 된 지금 이강호는 멋진 회사생활을 하려는 꿈에 부풀어있다. 입사해서는 회사에 적응하느라 1년을 눈치보며 이리 저리 지냈지만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그의 가슴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열정이 있다는 것은 좋다. 하지만 왜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신입사원의 대다수가 인정받지 못하고 직장상사에게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듣게 되는걸까? 최선을 다해 한 일에 핀잔을 듣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열정은 사라지고 이직을 고려하거나 출근해야 하는 아침이 세상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시간이 되어 가게 된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최선이란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부딪혔을때 어떻게 헤쳐나가야할 것인가? 이강호는 이같은 문제에 직면하면서 해결점을 제시해준다.

 

이강호가 알려준 해결방법중 인상깊었던 것을 추려보자.

 

첫째,준비된 사람은 일하는 방법을 안다. -무조건 열심히 일하면서도 핀잔을 듣거나 노력한 댓가도 얻지 못하고 서러움만 커져 울음을 삼켜본 경험이 신입이라면 대다수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일을 잘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관계이다. 노젓는 배로 강을 건너려할 때 열심히 노를 젓는 일보다 도착해야할 곳이 어딘지를 알고 방향을 잡는 일이 먼저이다. 방향을 잡고 난 후에는 강에 물살에 맞게 노를 젓는 방법을 터득해야한다. 그 후에 노를 열심히 저으면 목적한 곳에 도달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무턱대고 노를 열심히 젓기만하다보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된다. 항구로 오지 않고 산으로 가게 된 배를 보면서 웃어줄 직장상사는 없는 것이다. 성실함이 가장 큰 무기가 될수 있을 때는 일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을 때만

이다.

 

둘째,나를 제대로 알고 꾸준함으로 채워나가라.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신의 녹음된 목소리를 타인의 목소리로 착각한 적은 없는가? 내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에게 나를 알리려한다는 것이 성공할 가능성은 드물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할 수있는 것이다. 나를 제대로 알았다면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나가기 가장 빠른 방법은 꾸준함이다. 신문을 보며 메모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것을 8년이나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꾸준함은 시대를 막론하고 개인을 튀게 만들어준다. 빨리 달리기는 누구나 할수 있지만 오래 달리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숲도 보고 나무도 보자. -숲안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는다. 숲 밖에서는 나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숲과 나무를 둘다 잘 보려면 다양한 시각을 가져야한다. 상사가 내준 문제를 풀려할때는 상사의 시각에 맞게 문제를 풀어야하며 부하직원을 가르칠때는 부하직원의 눈높이에 맞춰서 알려줘야한다. 자신의 시각에만 만족해 문제를 풀어나간담녀 그것은 자신만 만족하는 것이 되어 타인을 만족시키는 일은 매우 힘들게 된다. 나무도 봐야하고 숲도 보는 시각을 기업에 대입하면 그건 CEO의 시각에서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뛰어넘어 다른 시각으로 숲과 나무를 바라볼때 발전할 수 있다.

 

넷째,남의 탓에서 벗어나자.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사람은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기에 발전할 가능성이 없게된다. 자신에게 잘못을 돌리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가족과 자신의 잘못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가족이 있다면 어느 가족이 더 화목하게 살 수 있겠는가. 무조건 저자세로 잘못을 짊어지라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시 타인에게 잘못을 돌리기전에 자신의 문제부터 되짚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이강호의 이야기와 더불어 책은 바다에 나가는 어부의 이야기가 새로은 장이 시작될때마다 짤막하게 나오는데 이것을 보면서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떠올랐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물고기 잡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노인이 큰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면서도 손에 감은 줄을 풀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는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결국 뼈만 남은 고기를 가지고 왔으면서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잠들 수 있는 노인을 보면서 무엇을 잡을 것인가에 혹은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에 겁먹지 말고 큰고기를 잡기위해 큰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지는 용기와 작은 배라는 열악한 조건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배우고 싶었다. 뛰어들지 않고서는, 내 배가 낡고 작아 큰 바다에 나가기 힘들다고 해서 큰 바다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 늘 손질하는 그물과 바다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 그리고 용기만이 큰 물고기를 잡는 손맛을 느끼게 해준다. 걸린 물고기를 뼈만 남겨돌아온들 어떻겠는가. 가슴은 쓰리지만 그 감각과 흥분은 남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친구에게 혹은 선후배에게 주저없이 추천할 책을 읽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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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블랙독 -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하는 편안한 그림책
매튜 존스톤 지음, 표진인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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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 부침개보다 뒤집기 쉽다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요즘이다. 하루를 짜증과 후회로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내일은 활기차게 보내리란 다짐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잠이 든다. 여지없이 아침이 밝아오면 어제의 다짐은 별님따라 저멀리 가버린지 오래,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기를 여러번 결국 짜증으로 아침을 열고 만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는 또 어제와 같이 한숨과 오늘의 계획이 아닌 내일의 계획을 세우며 잠이 들고 그리고 또 아침.

 

 내가 나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한다는 것만큼 우울해지는 일이 또 있을까? 의지박약이라는 꼬리표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견디어내는데 이골이 났다는 것은 아니다. 넘어진 사람이 또 넘어진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듯. 의지박약이란 꼬리표를 재확인 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나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게 한다. 알아서 척척 해내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기만 하고 점점 움츠려드는 행동으로 인해 마음 속 아픔은 밖이 아닌 안을 향해 화살을 돌린다.

 

 내가 쏜 화살에 내가 아프고, 내가 올려 놓은 짐에 눌려서 못 일어나고, 내가 걸쳐놓은 다리에 내가 넘어지고, 내가 계획한 일들이 너무 많아 내가 치이고 모든 문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치료하는 법까지 알지는 못했다. 솔직히 더 화가 나는건 치료법 또한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맘대로 안되는 일상이라고 핑계라도 말해야 내가 나를 덜 미워할 것 같아 치료법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모든 우울함과 짜증의 원인은 블랙독이란 녀석 때문임을 알았다. 자유자재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고, 무게 역시 조절할 수 있는 블랙독을 내 어찌 당하랴! 저자의 그림과 글을 따라 읽다보면 무릎을 치며 '아, 딱 나야!' 라고 말하게 된다. 이 사람도 나처럼 아프구나, 힘들었구나, 사람들 속에서 주눅이 들었구나를 통해 신기하게되 위로받는다.

 

 블랙독은 <침대 밑의 악어>란 책에서 악어처럼 우리 모두에게 있는 녀석이다.

사람마다 블랙독의 크기는 천차만별이다. 치와와부터 사자, 혹은 킹콩 더 큰 공룡이 된 녀석도 있을 것이다. 블랙독의 사료는 내 우울, 짜증, 한숨처럼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누구나 블랙독의 존재를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블랙독을 인정하면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하지만 블랙독을 제대로 인정해주어야 내 감정과 내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종류의 블랙독을 키우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제대로 키울 수 있겠는가?

 

 내 몸을 짓누르는 블랙독의 정체를 먼저 알아내기! 그리고 블랙독의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철저히 파헤치기! 블랙독의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몇 번의 실패로 알아내기!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내가 할 일이다. 블랙독은 무서운 능력의 소유자지만 그것의 주인과 충전기의 역할을 하는 것은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이 짊어져야 할 외로움의 무게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구도 블랙독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블랙독을 길들이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누가 알겠는가? 블랙독도 길들이면 귀여운 강아지가 되어 내게 꼬리를 흔들지.

 

 우선 내 마음 속 블랙독에게 인사를 건네보자. "안녕? 블랙독!" 이라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만으로 블랙독은 크게 당황할 것이다. 그 다음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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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읽는 멋진 인간관계 만들기
최준호 지음 / 대경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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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나서 표지의 딱딱함에 놀랐다. 표지에서 느껴지는 지루하고 무거움에 책이 신간이 맞는지 뒷면을 보게 된 것이 사실이다. (인쇄날짜는 앞장에 있었다.) 고전문학도 아닌데 꽤나 두꺼운 표지에 요즘 책들에 비해 너무나 정적인 색체에 책을 읽기도 전에 흥미를 잃었다. 책이 온지 몇일 후에야 책을 펼친 이유도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이다. 잠이 쉬이 오지 않는밤에 이 책을 펼쳐든 까닭은 이 책은 분명 나를 잠으로 인도해줄꺼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책은 피자마자 나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책의 궁금증을 유발시켰고 10페이지를 넘기자 웃음을 유발시켰으며 30페이지가 넘는 순간부터는 내게 연필과 메모지를 손에서 놓치 못하게 했다. 분명 내게 잠을 선물할꺼라 생각했던 이 책은 내게 활기찬 새벽을 맞이하게 하였다. 표지와 내용의 반전에 심장이 뛰었으며 책을 받자마자 책에게 한소리들이 미안해서 책을 쓰다듬으며 우리 할머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을 책에게 들려주었다. "겉이 뭐가 중요해. 사람이건 물건이건 속이 알차야지."라고. 책은 알차다. 제목에서 말해주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은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읽혀진다. 그냥 소설책이 아니라 유쾌한 소설책을 읽었을때처럼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나 몰입력이 기대이상이었다.

 

 이 책은 나의 유형을 파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형도 파악하여 인간관계를 멋지게 만들어나가라는 목적하에 출간된 것 같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이말을 책을 덮으면서 떠올랐다. 타인을 적이라고 표현하면 안되겠지만 나와느 맞지 않는 타인은 적보다 내게 어렵고 원망의 상대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이 나의 진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혹은 내 생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원망할 수 있을까? 책은 우선 나를 제대로 알게 해주고 남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나를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타인의 말로 들을 경우에는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고 혹은 나에 대해 비판을 해준다면 심히 불쾌한 마음을 웃음으로 넘기지만 가슴에 뭔지 모를 앙금이 쌓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으로 나의 유형을 찾아나가면서 얼굴이 발그레 해지고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내심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어떠한 성향에 치우쳐 있는지를 책을 통해 깨달으면서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의 단점들을 속속들이 파헤쳐지는 듯한 느낌에 힘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느정도 속이 비치는 내가 된듯하여 후련하기도 했다. 남이 볼까 꽁꽁 싸맸던 나의 내면을 숨기는것에만 집착했던 것을 풀고 나니까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기 겁났던 것을 꾹 참고 한번 보고 난 후에는 그것이 겁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어느 부분도 보고 나니 처음에는 놀란게 사실이지만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이 문제를 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도 맥이 잡히는듯하다.

 

 나를 알게 되었다고 인간관계도 멋지게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인간관계를 잘 해나갈려면 타인을 정확히 이해하는 눈을 기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나도 인간관계를 이루는 하나의 개인이므로 내가 나의 유형이 있듯이 타인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타인도 하나의 개인이다.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데 나만 알고 남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에게만 맞춰달라는 4살박이 아이가 되는 것이다. 멋진 인간관계를 만드는 지름길은 없다. 지름길로 가려다 보면 수 많은 타인을 하나의 타인으로 규정하여 하나의 방법으로만 대하게 된다. 친구들 혹은 직장동료나 상사 그리고 애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감정다툼들은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생겨난다.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건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 한다는 뜻이 된다. 타인의 성향을 이해하고 그 성향을 바탕으로 타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타인 역시 그러한 방법으로 나를 이해한다면 전보다는 멋진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 개인을 파악할때 쓰는 것은 에니어그램이다. 에니어그램은 '9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란 뜻인데, 에니어그램에서는 사람의 성격유형을 9가지로 나누고, 인간은 누구나 그 중 하나를 갖고 태어난다고 한다.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으며 그것에 따라 나와 잘 맞는 유형 혹은 나와 다른 유형의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만남이 될지 세세하게 알려주는 모습이 책을 한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내 들쳐보도록 만들고 있다. 직장관계, 친구관계, 애인관계-부부관계, 부모-자녀 관계, 거기에 군 장병을 위한 에니어 그램까지 저자의 세심한 배려에 놀랍다. 인간을 9가지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 내리기에는 씁쓸한 면이 없진 않지만 인간관계에 궁금증을 느끼는 이나 힘든이에게 나를 알고 타인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되기에는 충분한 책이라고 본다. 

 

 이 책은 내가 가지고 갈 책들 중 살아가면서 손때가 많이 묻을 책일듯하다. 그리고 표지가 책 안의 빛을 다 나타내지 못하는 점에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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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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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만들고 나누고 먹고 이야기하는 것, 이 모두가 ‘음식’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고 할 때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며 눈·귀·코·혀·몸·뜻(目耳鼻舌身意)의 감각 총체 예술이다. 음식에 관한 기억과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 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  -서문

 

 책을 시작하기 전에 있는 서문을 읽으면서 작가에게 음식은 어떤 것이기에 음식 하나 하나를 어떻게 먹었길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에게 음식은 정말 총체 예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그저 음식이라는 생각을 했던 내게 작가는 음식을 먹을때는 입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작가처럼 내게도 소풍을 떠났던 것처럼 설레임으로 혹은 아련함으로 기억되는 음식이 있다. 가끔 생각나는 음식이 있어 먹어보면 내가 기대했던 맛이 아닐때가 있다. 그럴때면 그 음식점 험담을 친구에게 실컷하고는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거린다. 내가 먹고자 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에 담긴 추억이었으니 그 맛이 느껴질리 있겠는가. 한동안 책으로 인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추억을 먼저 꼭꼭 씹어먹어야할 듯하다.

 

 성석제님과의 소풍은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책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맛집기행이라던가 미식가의 이야기는 아니다. 맛집에 대해 쓴 책들은 그곳에 가보지 못함에 읽는 내내 부러움으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소풍은 그와 다르게 함께 먹을 수 있는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작가와 함께 하는 밥상은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았다. 성석제님과의 밥상에서 나는 그대로인데 성석제님만 어린이가 되기도 하고 어른이 되기도 했다. (작가의 어린시절에는 나도 어린이로 가서 함께 먹었으면 참 좋았을 것을.) 밥상이 차려지는 장소는  허름한 선술집이 되기도 하고 지금의 나로서는 먹기전에 지갑을 먼저 열어봐야할 꽤나 멋진 식당이되기도 한다. 시간이 어디든 장소가 어디든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 작가는 구수한 그 입담으로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으며 음식을 먹을때는 맛있게 먹어주고  거기에 사람 사는 이야기까지 겻들이면 옥황상제의 밥상이 이보다 좋을 수가 있냐며 농을 건다.

 

 <소풍>이란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너비아니부터 묵밥까지 한끼 식사로 적당한 음식, 2부는 냉면과 라면 같은 국수류, 3부는 김치나 홍시, 석화젓 등의 곁다리 음식 , 4부는 국화차, 소주 같은 마실거리에 관한 이야기다.(네이버 책소개에서 옮겨적었어요.- 책을 다 읽고도 각각 구성된 부분들의 성격이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다가 책 소개를 읽어보고서야 이런 기준으로 나뉘어진 것을 왜 몰랐을까하며 웃어버렸네요. 음식은 무엇을 만들었건 어떻게 먹건 다 음식이라고 제가 생각했나봐요.)

 

1부도 흥미로웠지만 4부에 나오는 마시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 눈이 똘망똘망 해진 것은 왜일까? 1부 2부 3부는 대체로 함께 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제대로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인지도. 혼자 살며 밥을 먹으며 깨달은 것이지만 밥은 함께 먹어야 제맛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밥을 먹을 때 밥만 먹는게 아니었다는 것, 밥과 함께 어우러진 따스한 풍경들과 사람내음까지 함께 먹었다는 것을 기숙사 식당에서 처음으로 밥을 먹었을 때 밥이 목에 걸려 제대로 삼키지 못했을 때 그 사실을 아프게 깨달았다. 소풍에 나오는 음식들은 음식이야기가 아니다. 그곳에 숨겨진 사람 사이의 정이다. 아픈 정도 있고 기쁜 정도 있으며 그리운 정도 있다. 혼자서 책을 읽어내려가며 맛있는 음식들에 배가 고프기 보다는 못견디게 사람이 그리워졌다. 나와 함께 밥을 먹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내가 편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워져서 배가 고플 틈이 없었다. 그리움을 먹었다는 것이 말이 되려나? 책은 내게 그리움을 먹여주었다. 먹을 수록 배가 고팠지만 심장은 뜨거워졌다. 사람의 심장에는 사람의 대한 그리움이 자리잡아도 괜찮을 것이다. 언제더라도 가슴에 자리은  그 사람을 만나 밥한끼 먹으며 그 그리움을 꺼내 이야기하는 것도 입맛이 잘 돌게 도와줄거라 믿는다.

 

4부에서 꼭 먹어 보고픈 한가지는 기네스 포린 엑스트라 스타우트(Guinness Foreign Extra Stout)였다. 성석제님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라고 하니  먹어보고 싶어졌다. 이것도 팬의 열정일려나. 하늘로 가는 뚜껑을 열어주는 법성포소주도 메모해두었다.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과도 무리가 없는 국화차를 마셔보고 싶었다. 끓는 물에 넣어 원래의 모양 그대로 살아나는 몽글몽글한 국화차를 기회가 되면 마셔보리라. 얼마전에 보긴 했는데 가격에 고개를 저었지만

꽃의 여신을 만나는 거라면 마셔보아도 될 것이다. 성석제님은 국화차를 마시고 입과 식도와 위장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고 하니 가격이 무슨 상관이랴.

 

  음식만큼 사람과 가까운 것이 있을까? 사람은 하루에 세끼 적어도 두끼 이상을 먹는다. 하루 두끼로 계산하고도 지금 까지 내가 먹은 음식은 14600끼가 넘는다. 끼니마다 추억이 담기기는 쉽지 않지만 100끼니 중 한 끼니에는 추억이 담겨 있을 것이다. 성석제님의 음식 이야기를 들으며 혹은 함께 먹고 마시며 그에게 들려주고픈 음식에 대한 추억이 내게도 아스라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작가가  말하는 음식들을 보며 내가 떠오르는 것은 한겨울 캄캄한 밤에 땅에 묻어둔 장독에서 꺼내 낡은 접시에 소복하게 담은 하얀 백김치였다. 겨울밤의 차가운 공기속에서 시린발로 총총히 뛰어든 아랫목의 따스함이 그리고 소복하고 정갈하게 담긴 백김치를 가족과 함께 먹으며 할머님의 이야기를 듣는 어린 손자 손녀들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음식에 대한 추억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음식에 왜이리 추억이 많은 걸까? 할머니가 손으로 찢어주며 밥숟가락에 둘둘 말아주던 김장김치의 맛. 심장소리가 주인아저씨께 들릴까봐 심호흡을 하며 망을 보던 여름날 저멀리 달아나서 맛보던 그 달콤한 과일의 맛. 아파서 끙끙거리며 땀을 흘리며 누워있을 때 엄마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집어주시며  내 입속에 넣어주시던 죽의 맛. 겨울에 놀러가면 할머니가 주시던 얼음이 살짝 뜨띄어진 식혜 한 그릇. 생각해내니 너무나 맛있는 추억들이 내게도 꽤나 많다는 것에 행복해진다. 내게 이런 추억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 작가와의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이런 추억의 보물찾기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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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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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사이 읽었던 책 중에서 표지가 가장 이뻤다고 생각했던 책이다. 겉표지와 속의 표지가 다른 것도 아주 맘에 든다. 짙은 파랑색 표지에 빛나는 깃털 하나. 사신도 신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일까? 천사에게는 깃털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책 표지에 왜 깃털이 있는 것이지 하고 의문을 가져보았다. 표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본 후에야 아! 사신도 신이지라고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신도 신이다. 하지만 사신은 적어도 나에게는 부정적 의미지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의 사신은 저승사자라고 볼 수 있는데 저승사자를 떠올리면 전설의 고향이 생각나서 지금도 팔에 소름이 돋는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아 갔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저승사자. 그들이 빼앗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 무엇을 내게서 빼앗아 갔다는 말일까? 치바를 만나고서 사신은 어쩌면 우리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함께 해준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신도 그리 차갑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내 죽음에 '가'라는 판정을 내린다하더라도 말이다.

 

 치바. 죽음을 결정내려주는 신. 사신이다. 많은 사신 중에 이 책은 '치바'의 이야기이다. 사신의 이름은 거리나 도시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 어느 도시의 이름인듯한 치바. 임무를 맡을 때마다 곧 죽음에 놓인 사람에게 접근하기 쉽도록 모습을 바꾸지만 이름만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치바는 사신이므로 잠을 자지도 않으며 음식의 맛도 모르고 감정이라는 것에 무감각하다. 하지만 치바는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만을 좋아한다고 표현해야 겠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 일하러 인간세상에 올 때마다 음악을 들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이가 감정에 무감각하다는 것이 신기하다. 혹시나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애써 모든 감정을 음악에 쏟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사신들 대부분이 음악을 좋아한다니 음반매장에 가면 자연스레 오랜시간 있는 이에게 눈이 갈지도 모르겠다.

 

 치바와의 여섯가지 죽음이야기가 책의 내용이다. 치바와 한가지씩 죽음을 결정하면서 일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특이하거나 몽환적인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그 드라마와 이 책의 이야기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책의 각각의 이야기는 지루할 틈없이 비슷함이라고는 치바가 등장하는 것 말고는 없을만큼 새로운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때로는 하드보일드로, 혹은 추리소설로, 로맨스까지 가세하기도 하며 잔잔한 감동이 들어간 이야기까지 같은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각각의 이야기들은 다른 빛깔을 띠고 있다. 책 속의 주인공이 같은데도 다양한 빛깔을 띤다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내게 책의 마지막 이야기는 답을 말해주었다. 무지개는 7가지 색이면서도 하나로 합쳐진다. 전혀 어색함없이 서로가 서로의 색에 스며들어 하나로 보이게 해준다. 치바의 6가지 이야기도 하나로 합쳐지니 어색함이 없다. 사신의 이야기를 무지개로 비교하는 것이 아이러니 일지라도 죽음이 굳이 검은색이나 우울한 회색 혹은 비내리는 날씨와 같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치바가 일할 때마다 비가 오지만 치바가 하루도 맑은 날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소망하나가 생긴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내일 죽는다 해도 당신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내일 죽는다면 혹은 내게 치바가 와서 일주일이란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으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일주일동안 내가 혹은  하루만의 시간동안 내가 무엇을 할 수있기에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치바가 담당하는 죽을 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하나하는 생각에 한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길게 들이마셔야했다. 치바의 말대로 태어날 때 무섭거나 아픈 기억이 없듯이 죽음도 그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죽음은 무섭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것인지 혹은 드라마에서 본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대화가 기억난다. 너가 한달뒤에 죽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고민도 하지 않고 나온 다른 상대방의 대답. 그냥 죽어버릴거라고. 왜냐는 말에 죽음을 기다리며 벌벌 떠느니 행복하게 내가 죽겠다고. 그럴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죽음의 시간이 정해졌다고 미리 죽겠다니 겁많은 내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나는 내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울다가 주위를 우울이 가득한 풍경으로 만든 후에 죽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죽을때까지 주위를 걱정시키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이 가득한 내게 치바는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방법은 내게 있다고 말해준다. 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것이 인생이 달라지는 기회라고. 살면서 알아가는 진리 중 하나는 정작 중요한 열쇠는 모두 내게 있다는 것이다. 그건 참 매력적인 일이다.

 

 죽음은 산다는 것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어쩌면 삶의 반대말도 죽음의 반대말도 없는 것이 아닐까? 죽음의 반대말이 무엇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삶과 죽음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이 든다. 제대로 살기 위해 제대로 죽기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는다는 말은 슬프지만 죽음앞에서 초연해지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럴 수 있도록 삶을 사랑하고 싶다.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내가 죽을때도 사랑스럽게 맞이하고 싶다. 그럴러면 치바가 나타나더라도 안절부절 하지 않도록 내게 주어진 삶은 제대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관한 책은 이상하리만치 삶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치바에게 부탁할 것은  제발 맨 손으로 나를 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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