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또다시 중고 매장 할인 럭키백 이벤트를 시작한 모양인데, 결국 할인을 미끼로 에코백을 하나 더 사라는 이야기가 되고 보니 적잖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럭키백 이벤트 때마다 꼬박꼬박 구입한 까닭에 16주년 에코백 하나, (지금까지 구입한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모래고양이 에코백 하나, 저 악명 높은 "빨간물" 에코백 둘 (원래 구입한 "캐리" 에코백에다가 나중에 추가 배송된 정상 제품도 있으니까), 그리고 작년에 정말정말정말 디자인 구려서 진짜진짜진짜 사기 싫었는데 억지로 샀던 초록색 에코백까지 해서, 알라딘 에코백만 무려 다섯 개에 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요즘 들어 에코백을 사은품으로 주는 곳이 워낙 많다 보니, 굳이 내 돈을 주고 구입하지 않아도 정말 처치곤란 수준으로 집에 많다는 거다. 심지어 이마트 "수달" 가방 같은 비닐 백도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비록 재사용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과연 저게 환경 보호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에코백의 본래 의도는 환경 보호였다고 (따라서 처음에는 플래카드처럼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을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은 본래 의도와 달리 에코백 자체가 유행처럼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제작에 필요한 자원과 비용을 따지면 오히려 "안티-에코 백" 같기도 하다.


당장 알라딘 박스만 뜯어 보아도 이런저런 비닐 포장재가 수두룩한데, 무려 20년 묵었다고 자랑하는 이 회사에서 정말 환경을 생각했다면, 에코백을 팔 시간에 차라리 자기네가 담아 보내는 이 비닐 쓰레기를 재활용할 방법이나 (하다못해 고객이 비닐 포장재를 가까운 중고 매장으로 다시 가져오면 받아서 재활용한다거나) 고민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간 상기한 이유로 해서 올해는 처음으로 알라딘 럭키백을 구입하지 않을 작정이다. 에코백이라면 이미 많고,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되는지도 의심스러우며, 다른 무엇보다도 가격이 무려 1만 3천 원이나 하는데 겨우 5만 원밖에 할인이 안 되니까...



[24. 01. 30. 추가] 이후로도 알라딘에서는 계속해서 "에코 백"이라는 미명 하에 "안티-에코 백"을 만들아낼 뿐만 아니라, "사은품"이나 "한정판"이라는 명목 하에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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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구입한 앤 카슨의 <남편의 아름다움>을 읽다 보니 한 가지 알쏭달쏭한 구절이 등장한다. “랍비들은 율법을 가젤의 한정된 교미에 비유하는데 / 남편 가젤에게는 매번이 / 처음 같기 때문이다.”(52쪽) 그러면서 그 인용문의 출처를 “<바빌로니아 탈무드> 에루빈 54b”라고 적어 놓았다. 카슨의 원문이 뭔가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Rabbis liken Torah to the narrow sex of the gazelle, for whose husband every time is like the first time”이라고 나온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구절인데 ‘한정된 교미’라는 희한한 오역이 나온 까닭은 십중팔구 ‘에이, 설마 그거겠어?’ 하는 생각 때문이었겠지만, 사실 여기서는 ‘설마 그거’가 맞는 해석이다.

 

즉 이건 “랍비들은 율법을 [암컷] 영양의 좁은 음문에 비교하는데, 왜냐하면 그 수컷에게는 매번의 성교가 처음처럼 [신선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히브리어-영어 대역본을 구글링해 보니 몇 가지 다른 영역문 역시 같은 뜻으로 되어 있다. “Why were matters of Torah compared to a hind? To tell you that just as with a hind, its womb is narrow and it is cherished by its mate each and every hour like the first hour”(왜 토라의 내용은 암사슴에 비유되는가? 암사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자궁이 좁기 때문에 그 짝이 매번 성교할 때마다 처음 성교할 때처럼 느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런 번역도 있다. “Just as the womb of the hind is narrow, so she was always a virgin”(암사슴의 자궁이 좁기 때문에, 항상 처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암사슴의 음문이 좁은지 아닌지, 그래서 수사슴이 교미 때마다 일신우일신의 기분을 느끼는지 아닌지,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울러 음문이 좁은 것을 순결과 처녀의 상징이라 단언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나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좀 미심쩍은 이런 주장들도 고대인의 관념 가운데 일부임은 분명하며, 아울러 위에 소개한 인용문은 어디까지나 ‘토라의 신선함’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 앤 카슨의 책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것 역시, 여성인 저자의 평소 사고방식이나 주장까지는 아니고 단지 제목에 언급된 ‘남편’이 보낸 연애 편지에 인용된 구절일 뿐이므로, 이걸 가지고 저자가 어떤 의도를 품었다고 단언하기도 곤란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 김훈의 소설을 가지고 벌어진 논란을 생각해 보면 (사실 애초에 불필요한 논쟁이 불거지다 보니 자꾸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면도 없지 않다) 이것 역시 저자가 뭔가 여성혐오적이고 남근중심주의적 사고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해야만 좋은 사람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조만간 ‘제목부터 뭔가 한남충스럽더니만 내용 역시 한남충스럽다’는 비난과 함께 별점 테러라도 한 번 해줘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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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 곤충화가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1647-1717)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깥양반이 오전에 책을 읽기에, 배경 음악 삼으라고 실비우스 레오폴드 바이스의 류트 작품집 ARS MELANCHOLIAE 를 꺼내 틀어준 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재킷을 보니 어디서 본 듯한 꽃과 나비 그림이 있었다. 혹시 얼마 전에 구입한 독일 여류 화가의 작품인가 싶어서 책장을 뒤져 <곤충 책: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남 곤충의 변태>(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지음, 윤효진 옮김, 양문, 2004)를 도로 꺼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중 하나인 ‘자단나무’ 그림이었다. 구입해 놓고 아직 읽을 기회가 없었기에, 이참에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싶어서 나카노 교코의 메리안 전기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김성기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3)와 함께 꺼내놓았다.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에 제법 이름을 날리던 화가 겸 출판인이었으며, 훗날 마리아가 남편의 성 대신에 아버지의 성을 드러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어머니는 화가 메리안의 후처로 들어가 딸과 아들을 낳고 남편과 사별했으며, 이후 또 다른 화가 겸 출판인과 재혼했다. 마리아는 새아버지의 관심과 후원 속에서 그림 및 동판화를 비롯한 출판 업무를 배웠으며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략 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격이었다) 이후 역시나 화가로 함께 일하던 남편과 결혼해서 뉘른베르크로 진출했다. 하지만 남편이 사업과 가정 모두를 등한시하고 바깥으로 나돌자, 마리아는 가사뿐만 아니라 출판과 그림 교습 등을 통해서 생계까지 떠맡게 되었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각별히 관심을 두던 꽃과 곤충을 묘사한 화집을 여러 권 간행해서 주목을 받았으며, 30대 후반에 남편을 떠나 의붓오빠가 머물던 라바디파 신앙 공동체에 한동안 몸담으며, 남편과의 재결합을 한사코 거부한 끝에 결국 이혼에 성공했다. 훗날 독일 경건주의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는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장 드 라바디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는 결국 와해되고 말았지만, 마리아가 머물던 공동체의 후원자가 마침 수리남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낯선 열대 땅을 직접 밟고 그곳의 자연을 관찰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길고 어려운 교섭 끝에 그녀는 1699년에 둘째딸을 데리고 수리남에 가서 1년여 동안 현지의 자연을 관찰했고, 귀국 후 역작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를 간행해서 격찬을 얻었다.


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곤충을 좋아했으며, 특히 애벌레가 성충으로 변모하는 ‘변태’ 과정에 각별히 관심을 가졌다. “나는 소녀시절부터 곤충 연구에 몰두했다.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누에 관찰을 시작한 후, 나는 다른 애벌레에서 이보다 훨씬 아름다운 나비와 나방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 모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유충을 채집했다. 나는 어떤 사교 모임에도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이 연구에 매달렸다. 동시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 연습에 열중했다.”(<곤충 책>, 10쪽) 바로 이 점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12세기 일본의 단편 소설집 <쓰쓰미추나곤 모노가타리>에 나온 “벌레를 좋아하는 아가씨”와도 유사하다. 여기서 주인공인 대갓집 아가씨는 곤충, 특히 애벌레를 취미로 수집한다:


 

“세상 사람들은 꽃이다 나비다 하며 추켜세우는데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야. 인간이라면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의 근본을 알려고 해야 기품이 있는 게지.” 그녀는 온갖 징그러운 벌레를 채집하여 관찰용 상자에 넣게 하였다. “이게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봐야겠어.” “송충이가 속이 깊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네.” 앞머리는 기품 없는 부인네처럼 귀 뒤로 넘긴 채 아침저녁으로 손바닥에 송충이를 올려놓고 관찰하였다.(48쪽)

 

 

부모가 꼴사나운 짓을 한다며 나무라자, 아가씨는 오히려 당당하게 반론한다. “세상만사 그 과정을 지켜보고 끝을 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옵니다. (...) 사람들이 입는 비단도 결국은 누에에서 나온 거예요. 나비가 되어 버리면 이제 끝이니 쓸모가 없지요.”(50쪽) 이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두 망측하고도 이상하다고 여기는데, 한 대갓집 아들이 도리어 흥미를 갖고 아가씨를 찾아와서 역시나 아이들을 시켜 애벌레를 채집하기에 바쁜 상대방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재치 있게도 역시나 곤충을 소재로 연시(戀詩)를 써서 보낸다:

 

 

털벌레 같은 그대 모습 본 뒤로 잊을 수 없어

당신을 데리고 가 지켜주고 싶어라


 

그러자 아가씨도 한 술 더 떠서 이런 답장을 보낸다:


 

털벌레처럼 세상 사람과 다른 마음 가진 나

당신 이름 듣고서 그때야 답하리라


 

그러자 남자도 이렇게 답장한다:


 

털벌레처럼 보이는 당신 눈썹 털끝만큼도

당신과 닮은 사람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째서인지 저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뒷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질 것이다”라면서 뚝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 어쩐지 독자로선 고도의 낚시질에 걸려든 느낌마저 든다. 여하간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도 만만치 않아서, 어려서는 물론이고 결혼 이후에도 종종 애벌레를 수집해서 변태 과정을 관찰했고, 곤충 표본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했다. 나카노 교코는 이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평범한 모습으로 태어난 소녀는 그 눈부신 환생, 드라마틱한 변화에 용기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여성이라면 누구든 소녀 시절에는 예쁘고 멋지게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나비만큼 그런 소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존재가 또 있을까.”(63쪽)


당시의 과학계에서는 곤충 유충과 성충의 관계가 명확히 정립되지는 않았다. 즉 누에에서 나방이 나오는 등의 몇 가지 사례는 사실로 인정되었지만, 그 외의 나머지 곤충은 유충과 변태를 거쳐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오인되었던 것이다. 특히 해충은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되었다. 린네보다 두 세대 일찍 태어난 메리안은 관찰과 실험과 그림을 통해서 곤충의 변태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곤충학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메리안은 정식 과학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예술을 위해 과학을 활용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종종 잘못된 관찰이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옥의 티들은 아쉽게도 훗날 그녀의 업적이 부당하게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림 면에서 보자면, 한 장의 그림에 곤충의 알과 유충과 성충 모두를 보여주는 방식의 묘사법은 그녀가 처음 창시한 것이며, 오늘날 자연 도감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나카노 교코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한 장의 화폭에 곤충아 알, 유충, 번데기, 성충으로 변태하는 과정, 즉 ‘시간’을 표현했으며, 그것과 더불어 그 곤충의 먹이인 화초도 함께 묘사했다. 그리고 거기에 반드시 각 곤충들의 발견 장소와 변태 기간, 감상 같은 짧은 해설을 곁들였다. 이런 획기적인 작품은 무려 300년 뒤의 곤충 도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곤충 도감의 기본적인 양식은 그녀가 최초로 고안해 낸 것이다.”(96쪽) 이것만 놓고 보아도 과학과 예술 모두에 걸친 메리안의 업적은 이미 확고히 인정받았다고 해야 맞겠다.


메리안의 화풍은 사실주의에 기반했지만, 종종 핵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대상의 크기나 실존 기간 등에서 선의의 왜곡이 가해졌다. 한 세기 반 뒤에 탄생한 존 제임스 오듀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평면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독특한 색감을 자랑하기 때문에 꽤나 인상적이다.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지금 나와 있는 관련서에 수록된 도판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다. <곤충 책>은 <수리남>의 초판 가운데 일부 내용을 빼고 옮긴 것이지만 (저자 사후 2판부터 수록된 악어와 도마뱀 등의 그림은 빠졌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흐리며, 일부 도판은 원서와 비교해서 좌우 반전 상태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나카노 교코의 책에는 컬러 도판이 몇 장 수록되어 있지만, 본문의 흑백 도판은 차마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시커멓다.


메리안에 관한 약전은 <곤충 책>에 수록된 헬무트 데케르트의 “예술과 과학의 경계선에서: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의 업적”과 내털리 제먼 데이비스의 <주변부의 여성들>에 수록된 "마리아 지빌리 메리안: 변태"가 있다. <무서운 그림>의 저자 나카노 교코의 전기는 비록 일부 내용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과 함께 관련 정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큰 도움이 된다. 그 외에도 그림과 박물학과 여행에 관련된 다른 책에서도 단편적인 서술을 찾을 수 있다. <마술의 그림들>(아니타 알부스 지음, 배진아 옮김, 생각의나무, 2005)과 <위대한 박물학자>(로버트 헉슬리 엮음, 곽명단 옮김, 21세기북스, 2009)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70가지 여행>(로빈 핸버리 테니슨 엮음, 남경태 옮김, 역사의아침, 2009)가 그런 책들이다.




[24. 01. 30. 추가] 메리안의 저서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와 <새로운 꽃 그림책>이 작년 연말에 번역,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어 추가해 본다. <곤충 책>이 절판된 다음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는데, 그 책의 문제점이었던 도판이 이번에는 제대로 인쇄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 사이에 아동용 전기도 몇 권 나온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좀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되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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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안방에 펼쳐놓은 책들을 정리했더니, 몇 달 전엔가 아도르노를 읽다가 갑자기 호프만스탈에 관해서 알아보겠다며 찾아달랬다가 읽지는 않고 책더미 밑에 파묻어 버린 책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인 빌리 하스의 <세기말과 세기초: 벨 에포크>(김두규 옮김, 까치글방 90, 까치, 1994)를 무심코 뒤적이다 보니, 그중 제3장 전반부가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에 관한 내용이어서 깜짝 놀랐다. 분명히 이전에 완독한 책이었는데, 그때에는 사전 지식이 없는 관계로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던 셈이다.


이 작품은 하기오 모토의 만화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 제목이 A. 알바레스의 <자살의 연구>의 원제이자 권두에 인용된 예이츠의 “야만스러운 신”이란 발언에서 유래했고, 또 이 발언은 예이츠가 <위뷔 왕>의 초연을 보고 일기에 적은 감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번역서인 <위뷔 왕>(동문선)과 <위비 왕>(연극과인간)을 모두 구입해 두기는 했지만, 막상 읽어보려고 해도 부조리극이라는 설명만 있을 뿐이고 저자의 이력이나 작품의 배경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선뜻 내키지 않던 참이었다.


여하간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싶어서 두 가지 판본을 대조하며 읽어보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쪽 모두 미진한 부분이 눈에 띄어서 <위뷔 왕>의 결정판 번역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부조리극이고 전위극이기 때문에 말장난이나 인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역주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역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오락가락하고, 이 판본에는 있지만 저 판본에는 없어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어야 했다. 이왕 역주를 붙일 거면 좀 더 꼼꼼하게 붙였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의미에서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서, 어떤 경우는 “일찍이 칼을 지녔던 가장 고귀한 가문을 대표하는”(동문선, 43쪽)과 “결코 검을 잡지 않았던 고귀한 족속을 대표하는”(연극과인간, 41쪽)처럼 아예 정반대의 뜻이 된다. 욕설과 관용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양쪽 번역본 모두 어떤 경우는 직역하고, 또 어떤 경우는 의역해서 일관성이 없었다. 특히 연극과인간 판본은 맞춤법조차도 틀린 문장이 적지 않아서 더욱 한심스러웠고, 심지어 어찌 된 영문인지 화폐 단위인 rixdale을 ‘리닥살’이라고 오역하기도 했다.


부록의 경우, 연극과인간 판본은 ‘인물 복장 설명’이 추가되어 있고, 동문선 판본은 저자의 기고문 “연극에 있어서 연극의 무용성에 관하여” 번역문과 저자의 연보, 참고문헌, 사진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역시나 차이가 있다. 시기를 따져 보니 동문선 판본이 연극과인간 판본보다 불과 3개월 더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나온 번역서가 기존 번역서를 참고만 했더라도 이렇게 엉터리가 나오진 않았을 것 같다. 어차피 얇은 책이라 보관의 부담이 적어 내버려두긴 했지만, 솔직히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번역서는 아니다.

 

폴란드의 용병 대장 ‘위뷔 영감’이 국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지만, 측근의 배신과 러시아군의 침략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보물을 챙겨 내뺀다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들어 본 사극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 여하간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거기다가 어마어마한 욕설이며 말장난을 곁들여 내놓으니 첫 상연 때부터 작품 외적인 요소로 인해 의외의 괴작에 등극한 모양이지만, 어쩌면 지금은 역사적 의미밖에는 남지 않은 작품이 아닐까. 이래저래 기묘한 작품의 기묘한 번역본을 읽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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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룸프레스라는, 아직까지는 생소한 출판사에서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를 내놓았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내가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가 된 소설 <반바지 입은 당나귀>에 나오는 (나중에는 <반바지 당나귀>라고 제목과 표지를 바꿔서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신비스러운 소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저자는 <반바지 입은 당나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계속 나오는 소설을 두 편 더 썼는데, <이아생트>와 <이아생트의 정원>이라고 해서 양쪽 모두 "이아생트"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에 우연히 접한 <집을 떠난 빠스깔레>(김영철, 김태호 옮김, 청년사, 1990)라는 작품에서도 이아생트와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잠깐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아이와 강>인데, 김화영의 번역으로 1978년 처음 소개되었다가 지금은 역시나 같은 역자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재출간되었다.(그 외에도 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으로 소개된 <말리크로와>가 역시 보스코의 작품이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꺼내 보았더니 <집을 떠난 빠스깔레>와 <아이와 강>은 같은 내용이지만 삽화가는 서로 다르며, 특히 전자에는 "반바지 입은 당나귀"의 귀여운 모습이 묘사된 삽화도 있어서 각별한 재미를 전해준다. 반면 후자에는 "파스칼레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 나오는 주요 동물과 도구에 관한 삽화가 들어 있는데, 이것 역시 민음사 판본에만 있는 깜짝 선물이다. 오랜만에 책을 꺼내 뒤적이며,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무려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 전인 1988년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내가 이 작품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요즘은 이래저래 책을 펼칠 때마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반세기 만에 다시 만난 이아생트가 한편으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서먹한 이유도 아마 그때문이리라.




[추가] 2014년 11월 초에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재간행되었다. 세 번째 갈아입은 옷인데, 이번에는 좀 더 오랜 수명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추가] 10년이 더 지난 2024년 5월에 <반바지 입은 당나귀> 3부작의 마지막 권인 <이아생트의 정원>이 문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다시 한 번 책장을 뒤져야 하나 싶어 난감하던 차에 딱 10년 전에 써 놓은 글이 있기에 다시 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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