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안방에 펼쳐놓은 책들을 정리했더니, 몇 달 전엔가 아도르노를 읽다가 갑자기 호프만스탈에 관해서 알아보겠다며 찾아달랬다가 읽지는 않고 책더미 밑에 파묻어 버린 책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인 빌리 하스의 <세기말과 세기초: 벨 에포크>(김두규 옮김, 까치글방 90, 까치, 1994)를 무심코 뒤적이다 보니, 그중 제3장 전반부가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에 관한 내용이어서 깜짝 놀랐다. 분명히 이전에 완독한 책이었는데, 그때에는 사전 지식이 없는 관계로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던 셈이다.


이 작품은 하기오 모토의 만화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 제목이 A. 알바레스의 <자살의 연구>의 원제이자 권두에 인용된 예이츠의 “야만스러운 신”이란 발언에서 유래했고, 또 이 발언은 예이츠가 <위뷔 왕>의 초연을 보고 일기에 적은 감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번역서인 <위뷔 왕>(동문선)과 <위비 왕>(연극과인간)을 모두 구입해 두기는 했지만, 막상 읽어보려고 해도 부조리극이라는 설명만 있을 뿐이고 저자의 이력이나 작품의 배경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선뜻 내키지 않던 참이었다.


여하간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싶어서 두 가지 판본을 대조하며 읽어보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쪽 모두 미진한 부분이 눈에 띄어서 <위뷔 왕>의 결정판 번역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부조리극이고 전위극이기 때문에 말장난이나 인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역주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역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오락가락하고, 이 판본에는 있지만 저 판본에는 없어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어야 했다. 이왕 역주를 붙일 거면 좀 더 꼼꼼하게 붙였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의미에서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서, 어떤 경우는 “일찍이 칼을 지녔던 가장 고귀한 가문을 대표하는”(동문선, 43쪽)과 “결코 검을 잡지 않았던 고귀한 족속을 대표하는”(연극과인간, 41쪽)처럼 아예 정반대의 뜻이 된다. 욕설과 관용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양쪽 번역본 모두 어떤 경우는 직역하고, 또 어떤 경우는 의역해서 일관성이 없었다. 특히 연극과인간 판본은 맞춤법조차도 틀린 문장이 적지 않아서 더욱 한심스러웠고, 심지어 어찌 된 영문인지 화폐 단위인 rixdale을 ‘리닥살’이라고 오역하기도 했다.


부록의 경우, 연극과인간 판본은 ‘인물 복장 설명’이 추가되어 있고, 동문선 판본은 저자의 기고문 “연극에 있어서 연극의 무용성에 관하여” 번역문과 저자의 연보, 참고문헌, 사진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역시나 차이가 있다. 시기를 따져 보니 동문선 판본이 연극과인간 판본보다 불과 3개월 더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나온 번역서가 기존 번역서를 참고만 했더라도 이렇게 엉터리가 나오진 않았을 것 같다. 어차피 얇은 책이라 보관의 부담이 적어 내버려두긴 했지만, 솔직히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번역서는 아니다.

 

폴란드의 용병 대장 ‘위뷔 영감’이 국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지만, 측근의 배신과 러시아군의 침략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보물을 챙겨 내뺀다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들어 본 사극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 여하간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거기다가 어마어마한 욕설이며 말장난을 곁들여 내놓으니 첫 상연 때부터 작품 외적인 요소로 인해 의외의 괴작에 등극한 모양이지만, 어쩌면 지금은 역사적 의미밖에는 남지 않은 작품이 아닐까. 이래저래 기묘한 작품의 기묘한 번역본을 읽게 된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