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곤충화가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1647-1717)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깥양반이 오전에 책을 읽기에, 배경 음악 삼으라고 실비우스 레오폴드 바이스의 류트 작품집 ARS MELANCHOLIAE 를 꺼내 틀어준 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재킷을 보니 어디서 본 듯한 꽃과 나비 그림이 있었다. 혹시 얼마 전에 구입한 독일 여류 화가의 작품인가 싶어서 책장을 뒤져 <곤충 책: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남 곤충의 변태>(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지음, 윤효진 옮김, 양문, 2004)를 도로 꺼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중 하나인 ‘자단나무’ 그림이었다. 구입해 놓고 아직 읽을 기회가 없었기에, 이참에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싶어서 나카노 교코의 메리안 전기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김성기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3)와 함께 꺼내놓았다.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에 제법 이름을 날리던 화가 겸 출판인이었으며, 훗날 마리아가 남편의 성 대신에 아버지의 성을 드러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어머니는 화가 메리안의 후처로 들어가 딸과 아들을 낳고 남편과 사별했으며, 이후 또 다른 화가 겸 출판인과 재혼했다. 마리아는 새아버지의 관심과 후원 속에서 그림 및 동판화를 비롯한 출판 업무를 배웠으며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략 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격이었다) 이후 역시나 화가로 함께 일하던 남편과 결혼해서 뉘른베르크로 진출했다. 하지만 남편이 사업과 가정 모두를 등한시하고 바깥으로 나돌자, 마리아는 가사뿐만 아니라 출판과 그림 교습 등을 통해서 생계까지 떠맡게 되었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각별히 관심을 두던 꽃과 곤충을 묘사한 화집을 여러 권 간행해서 주목을 받았으며, 30대 후반에 남편을 떠나 의붓오빠가 머물던 라바디파 신앙 공동체에 한동안 몸담으며, 남편과의 재결합을 한사코 거부한 끝에 결국 이혼에 성공했다. 훗날 독일 경건주의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는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장 드 라바디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는 결국 와해되고 말았지만, 마리아가 머물던 공동체의 후원자가 마침 수리남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낯선 열대 땅을 직접 밟고 그곳의 자연을 관찰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길고 어려운 교섭 끝에 그녀는 1699년에 둘째딸을 데리고 수리남에 가서 1년여 동안 현지의 자연을 관찰했고, 귀국 후 역작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를 간행해서 격찬을 얻었다.


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곤충을 좋아했으며, 특히 애벌레가 성충으로 변모하는 ‘변태’ 과정에 각별히 관심을 가졌다. “나는 소녀시절부터 곤충 연구에 몰두했다.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누에 관찰을 시작한 후, 나는 다른 애벌레에서 이보다 훨씬 아름다운 나비와 나방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 모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유충을 채집했다. 나는 어떤 사교 모임에도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이 연구에 매달렸다. 동시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 연습에 열중했다.”(<곤충 책>, 10쪽) 바로 이 점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12세기 일본의 단편 소설집 <쓰쓰미추나곤 모노가타리>에 나온 “벌레를 좋아하는 아가씨”와도 유사하다. 여기서 주인공인 대갓집 아가씨는 곤충, 특히 애벌레를 취미로 수집한다:


 

“세상 사람들은 꽃이다 나비다 하며 추켜세우는데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야. 인간이라면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의 근본을 알려고 해야 기품이 있는 게지.” 그녀는 온갖 징그러운 벌레를 채집하여 관찰용 상자에 넣게 하였다. “이게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봐야겠어.” “송충이가 속이 깊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네.” 앞머리는 기품 없는 부인네처럼 귀 뒤로 넘긴 채 아침저녁으로 손바닥에 송충이를 올려놓고 관찰하였다.(48쪽)

 

 

부모가 꼴사나운 짓을 한다며 나무라자, 아가씨는 오히려 당당하게 반론한다. “세상만사 그 과정을 지켜보고 끝을 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옵니다. (...) 사람들이 입는 비단도 결국은 누에에서 나온 거예요. 나비가 되어 버리면 이제 끝이니 쓸모가 없지요.”(50쪽) 이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두 망측하고도 이상하다고 여기는데, 한 대갓집 아들이 도리어 흥미를 갖고 아가씨를 찾아와서 역시나 아이들을 시켜 애벌레를 채집하기에 바쁜 상대방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재치 있게도 역시나 곤충을 소재로 연시(戀詩)를 써서 보낸다:

 

 

털벌레 같은 그대 모습 본 뒤로 잊을 수 없어

당신을 데리고 가 지켜주고 싶어라


 

그러자 아가씨도 한 술 더 떠서 이런 답장을 보낸다:


 

털벌레처럼 세상 사람과 다른 마음 가진 나

당신 이름 듣고서 그때야 답하리라


 

그러자 남자도 이렇게 답장한다:


 

털벌레처럼 보이는 당신 눈썹 털끝만큼도

당신과 닮은 사람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째서인지 저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뒷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질 것이다”라면서 뚝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 어쩐지 독자로선 고도의 낚시질에 걸려든 느낌마저 든다. 여하간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도 만만치 않아서, 어려서는 물론이고 결혼 이후에도 종종 애벌레를 수집해서 변태 과정을 관찰했고, 곤충 표본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했다. 나카노 교코는 이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평범한 모습으로 태어난 소녀는 그 눈부신 환생, 드라마틱한 변화에 용기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여성이라면 누구든 소녀 시절에는 예쁘고 멋지게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나비만큼 그런 소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존재가 또 있을까.”(63쪽)


당시의 과학계에서는 곤충 유충과 성충의 관계가 명확히 정립되지는 않았다. 즉 누에에서 나방이 나오는 등의 몇 가지 사례는 사실로 인정되었지만, 그 외의 나머지 곤충은 유충과 변태를 거쳐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오인되었던 것이다. 특히 해충은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되었다. 린네보다 두 세대 일찍 태어난 메리안은 관찰과 실험과 그림을 통해서 곤충의 변태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곤충학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메리안은 정식 과학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예술을 위해 과학을 활용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종종 잘못된 관찰이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옥의 티들은 아쉽게도 훗날 그녀의 업적이 부당하게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림 면에서 보자면, 한 장의 그림에 곤충의 알과 유충과 성충 모두를 보여주는 방식의 묘사법은 그녀가 처음 창시한 것이며, 오늘날 자연 도감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나카노 교코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한 장의 화폭에 곤충아 알, 유충, 번데기, 성충으로 변태하는 과정, 즉 ‘시간’을 표현했으며, 그것과 더불어 그 곤충의 먹이인 화초도 함께 묘사했다. 그리고 거기에 반드시 각 곤충들의 발견 장소와 변태 기간, 감상 같은 짧은 해설을 곁들였다. 이런 획기적인 작품은 무려 300년 뒤의 곤충 도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곤충 도감의 기본적인 양식은 그녀가 최초로 고안해 낸 것이다.”(96쪽) 이것만 놓고 보아도 과학과 예술 모두에 걸친 메리안의 업적은 이미 확고히 인정받았다고 해야 맞겠다.


메리안의 화풍은 사실주의에 기반했지만, 종종 핵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대상의 크기나 실존 기간 등에서 선의의 왜곡이 가해졌다. 한 세기 반 뒤에 탄생한 존 제임스 오듀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평면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독특한 색감을 자랑하기 때문에 꽤나 인상적이다.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지금 나와 있는 관련서에 수록된 도판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다. <곤충 책>은 <수리남>의 초판 가운데 일부 내용을 빼고 옮긴 것이지만 (저자 사후 2판부터 수록된 악어와 도마뱀 등의 그림은 빠졌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흐리며, 일부 도판은 원서와 비교해서 좌우 반전 상태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나카노 교코의 책에는 컬러 도판이 몇 장 수록되어 있지만, 본문의 흑백 도판은 차마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시커멓다.


메리안에 관한 약전은 <곤충 책>에 수록된 헬무트 데케르트의 “예술과 과학의 경계선에서: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의 업적”과 내털리 제먼 데이비스의 <주변부의 여성들>에 수록된 "마리아 지빌리 메리안: 변태"가 있다. <무서운 그림>의 저자 나카노 교코의 전기는 비록 일부 내용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과 함께 관련 정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큰 도움이 된다. 그 외에도 그림과 박물학과 여행에 관련된 다른 책에서도 단편적인 서술을 찾을 수 있다. <마술의 그림들>(아니타 알부스 지음, 배진아 옮김, 생각의나무, 2005)과 <위대한 박물학자>(로버트 헉슬리 엮음, 곽명단 옮김, 21세기북스, 2009)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70가지 여행>(로빈 핸버리 테니슨 엮음, 남경태 옮김, 역사의아침, 2009)가 그런 책들이다.




[24. 01. 30. 추가] 메리안의 저서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와 <새로운 꽃 그림책>이 작년 연말에 번역,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어 추가해 본다. <곤충 책>이 절판된 다음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는데, 그 책의 문제점이었던 도판이 이번에는 제대로 인쇄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 사이에 아동용 전기도 몇 권 나온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좀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되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