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니 <박완서의 낱말들>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간 장편과 단편과 산문까지 전집이 다 간행되었다고 알고 있어서, 혹시 거기 포함되지 않은 미간행 유고를 모은 작품집인가 싶어 클릭해 보니, 유사한 편저서를 앞서 여럿 간행한 장녀 호원숙이 이번에는 모친의 저서에 나오는 단어 가운데 일부를 골라 해설한 모양이다.
얼마 전 '완서학'인지 '완동학'인지 하는 책이 나온다기에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었는데, 아직까지는 연구에 앞서 자료의 정리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박완서 산문의 경우, 2021년에 전9권으로 박스세트까지 만들며 완간되었나 싶더니, 2025년에 뜬금포로 여행 에세이가 제10권으로 간행되었다. 결국 기존 박스세트를 산 독자만 손해를 본 셈이 아니려나.
박완서 산문 전집은 저자 생전에 간행된 단행본 20여 권의 재편집일 뿐이고, 기간본 미수록 자료까지 모두 망라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다.(다만 이번 산문 전집 제10권에는 미수록 자료 5편이 추가되었다). 단행본 미수록 기고문 중에도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나귀님이니, 그런 자료까지 취합한 진정한 의미의 '전집'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런 미간행 기고문 중 2000년대 초쯤 <조선일보>인지 어딘지에 게재된 서평이 있었다. 거기서 박완서는 독일 소설가 지크프리트 렌츠의 <240개의 크림 스푼으로 만든 세상>(오청자 옮김, 전예원, 1980)을 소개했는데, 나귀님도 워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고, 이미 예전에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눈에 잘 안 띄는 책을 언급한 셈이라 상당히 의외이고 또 반가웠다.
지크프리트 렌츠라면 사뭇 진지한 분위기의 <독일어 시간>이 대표작이지만, 사실은 출세작인 <줄라이켄 사람들>부터 유머 단편집이니, 우스운 이야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고 봐야 할 법하다. 그러면서도 쿠르트 쿠젠베르크나 에프라임 키숀처럼 '배꼽 빠지게' 우습거나 부조리한 수준에 달한 정도의 유머까지는 아니고, 뭔가 살짝 '삼간' 듯한 수준의 유머다.
<240개의 크림 스푼>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궁핍한 시절에 암시장에서 활약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을 취한다. 주인공 레만은 군대에서 복무하다 자국의 패전과 함께 전역하여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귀향 직전, 보상조로 뭐라도 챙길까 싶어 전우들과 부대 창고를 털러 갔는데, 다급한 와중에 기껏 챙긴 게 '크림 스푼' 240개가 들어 있는 상자뿐이었다.
식량이나 각종 기호품 같은 인기 품목에 비하자면 영 무용지물 같았던 크림 스푼이었지만, 전후의 암울한 상황에서는 의외로 수요가 없지 않아서 식대부터 뇌물까지 갖가지 용도에 현금 대용으로 써먹을 수 있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레만은 암시장으로 진출해 갖가지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물품 조달에 연이어 성공하면서 뒷세계의 거물로 이력을 쌓아 나가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전후의 혼란스러운 독일 경제 상황을 풍자했던 이 작품이 의외로 동시대 한국 작가에게도 창작의 영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박완서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자기도 전후에 암시장 등 유사한 상황들을 체험했음을 상기하고 차기작에 관련 내용을 넣었다고 했는데, 정확한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렌츠의 번역서가 나온 1980년 이후의 작품일 듯하다.
혹시 한국전쟁 직후가 배경인 장편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일까 싶었는데, 확인해 보니 암시장 묘사까진 없었으니 어쩌면 단편 중에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240개의 크림 스푼> 뒷날개에는 당시 전예원에서 간행한 박완서의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의 광고도 나와 있으니, 어쩌면 출판사에서 렌츠의 책을 박완서에게 증정한 것이 영감의 계기였을 수도 있겠다.
여하간 나귀님 기억에는 박완서의 기간 에세이집에서도 렌츠의 저 소설에 대한 에세이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물론 눈 나쁜 나귀님이 못 보고 넘어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 내용을 다시 읽어보려면 차후에 미발표 및 미간행 에세이 선집이 다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어쩌면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형태의 '산문 전집'이 되지는 않을까.
박완서가 지크프리트 렌츠의 소설을 읽고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태동했다는 '완서학'인지 '완동학'인지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것 같다. <나목>을 설명할 때마다 박수근의 생애와 작품을 빼놓을 수 없듯이, 박완서의 다른 작품에도 영감이나 영향을 제공했던 국내외 작가며 작품에 대한 연구라고 치면 충분히 유의미해 보이니까.
물론 렌츠라고 해서 완전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람까지는 아니어서, 한 세대 위인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영향을 받았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240개의 크림 스푼>을 번역한 충북대 교수 오청자의 논문 "지그프리트 렌츠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독일 문학과 세계문학 1>(오한진 편저, 벽호, 1995)에서 그 영향 관계를 분석한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전후 독일에서는 실존주의 열풍이 불면서, 젊은 작가 다수가 '전쟁'과 '죽음'이란 소재에 천착한 헤밍웨이의 소설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렌츠의 작품 중에서는 <난파선>(1960)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데, 우리나라에는 <등대선>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훗날 박완서와 렌츠의 관계에 대한 추가 연구가 이루어지면, 또 어떤 사실이 드러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 지크프리트 렌츠의 번역서는 꾸준히 간행되는 만큼, 또 꾸준히 절판되어서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도서관 보유 자료를 검색해 보니, 나귀님도 이제껏 본 적 없는 옛날 번역본이 여럿이어서 놀랐다!
1955 -- So zärtlich war Suleyken: masurische Geschichten
<줄라이켄 사람들>(문은숙 옮김, 달궁, 2003)
1960 -- Das Feuerschiff
<등대선>(안삼환 옮김, 심상사, 1979)
<등대선>(김유진 옮김, 도서출판 준, 1988/9? --- 판권면의 인쇄연도와 발행연도가 다르게 찍힘)
1964 -- Lehmanns Erzählungen, oder So schön war mein Markt: aus den Bekenntnissen eines Schwarzhändlers
<240개의 크림 스푼으로 만든 세상>(오청자 옮김, 전예원, 1980)
1964 -- Das Gesicht
<대통령의 얼굴: 지그프리트 렌쯔의 코메디>(김충식 역, 장문사, 1986)
-- 희곡
1968 -- Deutschstunde
<독일어 시간>(김승옥 옮김, 주우, 1983; 학원사, 1985)
<독일어 시간>(정서웅 옮김, 한길사, 1983; 민음사, 2000)
1996 -- Ludmilla
<루드밀라>(김재혁 옮김, 예문, 1995)
-- 단편집. 수록작은 "루드밀라", "숨쉬기 운동", "구해 낸 저녁", "공포", "구직 응모", "들름길".
1999 -- Arnes Nachlass
<아르네가 남긴 것>(박종대 옮김, 사계절, 2002)
2008 -- Schweigeminute
<침묵의 시간>(박종대 옮김, 사계절, 2002)
2009 -- Landesbühne
<유랑극단>(박종대 옮김, 사계절, 2002)
>> 아래는 원제나 연도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한 작품들이다:
"발라톤 호수의 물결", <어느 사랑의 실험: 독일>(임홍배 옮김, 창비, 2008)
<하룻밤의 여행>(교원, 2007)
"위험에 빠진 산타클로스", <(세상의 모든) 크리스마스>(폴 오스터 외 지음, 알베르토 망겔 엮음, 김석희 옮김, 황금나침반, 2006)
"사랑의 집", <휴일의 소설: 세계현대단편소설선>(이어령 편저 문학사상, 2005)
"즐거움을 처방하는 의사", <뚱뚱한 아이>(노혜옥 옮김, 경진문화사, 2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