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북펀드 중에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들어간 광고가 있기에 흥미를 느껴 클릭해 보니 도서출판 길에서 간행 예정이라는 <열도 철학사>라는 책이었다. 저 질문은 예전에 조동일이 <우리 학문의 길>에서인지 제기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또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번역자인 김석근이 나름대로 답변을 제기했었다고도 기억한다.


그런데 <열도 철학사>의 북펀드 페이지에 나온 소개글을 읽다 보니 황당한 오타가 눈에 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즉 '열도'에 갖힌 일본 철학자의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갇힌'을 '갖힌'으로 쓸 만큼 맞춤법을 몰라 큰일이라더니, 이제는 책 만드는 사람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인문학의 허상'에 대한 의문이 머리를 스칠 수밖에 없다. 번역이 잘못되고 문장이 이상해도 뭔가 잘도 의미를 이끌어내니, 사실상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놈들의 쑥덕공론 야바위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열도 철학사>의 소개글만 봐도 온갖 어마어마한 개념어를 쏟아내다가 결국엔 '갖힌'으로 마무리한 셈이니까.


해외 저자라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자국 언어나 문화에서나 통할 뿐인 개념을 무리하게 확장하려다가 헛발질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희랍어와 라틴어의 어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국어의 말장난까지도 들먹이며 어떤 개념어를 설명하는 경우가 그런데, 중국 한자와 일본 신조어 어원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나라 학계에는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서출판 길은 마르크스와 베버를 비롯한 인문학 고전을 전문적으로 간행하는 출판사이기는 한데, 번역과 편집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사실이 이번 오타로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장 아메리의 저서인 <죄와 속죄의 저편>이 특히나 심각한 오역본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출판사를 옮겨 재간행된 신판은 그런 오역을 수정했는지 궁금하다.


번역 나쁜 것은 편집으로 어찌어찌 고칠 수 있지만, 편집 나쁜 것은 멀쩡한 번역조차 엉망진창으로 바꿔버릴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나쁘다고 봐야 한다. 옛날 을유문화사의 전설적인 편집부장 안춘근은 워낙 아는 게 많다 보니 웬만한 대학 교수들조차 그 앞에 가면 주눅이 들었다던데, 그 정도까지야 아니더라도 편집자라면 어느 정도 실력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



[*] 글을 쓰고 나서야 다시 확인해 보니, 조동일의 문제 제기에 대한 김석근의 답변은 <일본정치사상사연구> 역자후기가 아니라 <일본의 사상> 서두의 해제에 들어 있었다. 다만 그 답변 역시 핵심은 <일본정치사상사연구> 서두에 수록된 김용옥의 해제를 인용한 것이므로, '일본에 철학사가 있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김석근의 해제와 김용옥의 해제 모두를 읽어 볼 만하겠다. 그나저나 김석근의 설명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는 '철학'이라 부르는 것을 일본에서는 '사상'이라 부르는 것이므로, 용어 사용의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해 보이는 반면, 막상 김용옥의 추가 설명을 읽다 보면 '철학'과 '사상'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상은 다른 것이므로, 결국 '일본에 철학사가 없다'는 지적도 아주 틀렸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여하간 나귀님도 최근 창비의 '한국사상선' 완간을 계기로 '사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궁금증을 품었던 참이니, 이참에 관련 자료를 더 뒤적여 보든지 해야겠다. 이래저래 남의 '갖힌'을 흉보느라 정신이 팔려 정작 글의 내용을 '틀닌' 나귀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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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니 <박완서의 낱말들>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간 장편과 단편과 산문까지 전집이 다 간행되었다고 알고 있어서, 혹시 거기 포함되지 않은 미간행 유고를 모은 작품집인가 싶어 클릭해 보니, 유사한 편저서를 앞서 여럿 간행한 장녀 호원숙이 이번에는 모친의 저서에 나오는 단어 가운데 일부를 골라 해설한 모양이다. 


얼마 전 '완서학'인지 '완동학'인지 하는 책이 나온다기에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었는데, 아직까지는 연구에 앞서 자료의 정리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박완서 산문의 경우, 2021년에 전9권으로 박스세트까지 만들며 완간되었나 싶더니, 2025년에 뜬금포로 여행 에세이가 제10권으로 간행되었다. 결국 기존 박스세트를 산 독자만 손해를 본 셈이 아니려나. 


박완서 산문 전집은 저자 생전에 간행된 단행본 20여 권의 재편집일 뿐이고, 기간본 미수록 자료까지 모두 망라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다.(다만 이번 산문 전집 제10권에는 미수록 자료 5편이 추가되었다). 단행본 미수록 기고문 중에도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나귀님이니, 그런 자료까지 취합한 진정한 의미의 '전집'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런 미간행 기고문 중 2000년대 초쯤 <조선일보>인지 어딘지에 게재된 서평이 있었다. 거기서 박완서는 독일 소설가 지크프리트 렌츠의 <240개의 크림 스푼으로 만든 세상>(오청자 옮김, 전예원, 1980)을 소개했는데, 나귀님도 워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고, 이미 예전에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눈에 잘 안 띄는 책을 언급한 셈이라 상당히 의외이고 또 반가웠다. 


지크프리트 렌츠라면 사뭇 진지한 분위기의 <독일어 시간>이 대표작이지만, 사실은 출세작인 <줄라이켄 사람들>부터 유머 단편집이니, 우스운 이야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라고 봐야 할 법하다. 그러면서도 쿠르트 쿠젠베르크나 에프라임 키숀처럼 '배꼽 빠지게' 우습거나 부조리한 수준에 달한 정도의 유머까지는 아니고, 뭔가 살짝 '삼간' 듯한 수준의 유머다.


<240개의 크림 스푼>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궁핍한 시절에 암시장에서 활약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을 취한다. 주인공 레만은 군대에서 복무하다 자국의 패전과 함께 전역하여 고향 함부르크로 돌아온다. 귀향 직전, 보상조로 뭐라도 챙길까 싶어 전우들과 부대 창고를 털러 갔는데, 다급한 와중에 기껏 챙긴 게 '크림 스푼' 240개가 들어 있는 상자뿐이었다.


식량이나 각종 기호품 같은 인기 품목에 비하자면 영 무용지물 같았던 크림 스푼이었지만, 전후의 암울한 상황에서는 의외로 수요가 없지 않아서 식대부터 뇌물까지 갖가지 용도에 현금 대용으로 써먹을 수 있었고, 이에 자신감을 얻은 레만은 암시장으로 진출해 갖가지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물품 조달에 연이어 성공하면서 뒷세계의 거물로 이력을 쌓아 나가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전후의 혼란스러운 독일 경제 상황을 풍자했던 이 작품이 의외로 동시대 한국 작가에게도 창작의 영감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박완서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자기도 전후에 암시장 등 유사한 상황들을 체험했음을 상기하고 차기작에 관련 내용을 넣었다고 했는데, 정확한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렌츠의 번역서가 나온 1980년 이후의 작품일 듯하다.


혹시 한국전쟁 직후가 배경인 장편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일까 싶었는데, 확인해 보니 암시장 묘사까진 없었으니 어쩌면 단편 중에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240개의 크림 스푼> 뒷날개에는 당시 전예원에서 간행한 박완서의 장편 <살아 있는 날의 시작>의 광고도 나와 있으니, 어쩌면 출판사에서 렌츠의 책을 박완서에게 증정한 것이 영감의 계기였을 수도 있겠다.


여하간 나귀님 기억에는 박완서의 기간 에세이집에서도 렌츠의 저 소설에 대한 에세이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물론 눈 나쁜 나귀님이 못 보고 넘어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 내용을 다시 읽어보려면 차후에 미발표 및 미간행 에세이 선집이 다시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어쩌면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형태의 '산문 전집'이 되지는 않을까.


박완서가 지크프리트 렌츠의 소설을 읽고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태동했다는 '완서학'인지 '완동학'인지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것 같다. <나목>을 설명할 때마다 박수근의 생애와 작품을 빼놓을 수 없듯이, 박완서의 다른 작품에도 영감이나 영향을 제공했던 국내외 작가며 작품에 대한 연구라고 치면 충분히 유의미해 보이니까.


물론 렌츠라고 해서 완전히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람까지는 아니어서, 한 세대 위인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영향을 받았다 한다. 이에 대해서는 <240개의 크림 스푼>을 번역한 충북대 교수 오청자의 논문 "지그프리트 렌츠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독일 문학과 세계문학 1>(오한진 편저, 벽호, 1995)에서 그 영향 관계를 분석한 내용을 참고할 만하다.


전후 독일에서는 실존주의 열풍이 불면서, 젊은 작가 다수가 '전쟁'과 '죽음'이란 소재에 천착한 헤밍웨이의 소설에 크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렌츠의 작품 중에서는 <난파선>(1960)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데, 우리나라에는 <등대선>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훗날 박완서와 렌츠의 관계에 대한 추가 연구가 이루어지면, 또 어떤 사실이 드러나게 될지 궁금해진다.




[*] 지크프리트 렌츠의 번역서는 꾸준히 간행되는 만큼, 또 꾸준히 절판되어서 지금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도서관 보유 자료를 검색해 보니, 나귀님도 이제껏 본 적 없는 옛날 번역본이 여럿이어서 놀랐다!



1955 -- So zärtlich war Suleyken: masurische Geschichten

<줄라이켄 사람들>(문은숙 옮김, 달궁, 2003)


1960 -- Das Feuerschiff

<등대선>(안삼환 옮김, 심상사, 1979)

<등대선>(김유진 옮김, 도서출판 준, 1988/9? --- 판권면의 인쇄연도와 발행연도가 다르게 찍힘)


1964 -- Lehmanns Erzählungen, oder So schön war mein Markt: aus den Bekenntnissen eines Schwarzhändlers

<240개의 크림 스푼으로 만든 세상>(오청자 옮김, 전예원, 1980)


1964 -- Das Gesicht

<대통령의 얼굴: 지그프리트 렌쯔의 코메디>(김충식 역, 장문사, 1986)

-- 희곡


1968 -- Deutschstunde

<독일어 시간>(김승옥 옮김, 주우, 1983; 학원사, 1985)

<독일어 시간>(정서웅 옮김, 한길사, 1983; 민음사, 2000)


1996 -- Ludmilla

<루드밀라>(김재혁 옮김, 예문, 1995)

-- 단편집. 수록작은 "루드밀라", "숨쉬기 운동", "구해 낸 저녁", "공포", "구직 응모", "들름길".


1999 -- Arnes Nachlass

<아르네가 남긴 것>(박종대 옮김, 사계절, 2002)


2008 -- Schweigeminute

<침묵의 시간>(박종대 옮김, 사계절, 2002)


2009 -- Landesbühne

<유랑극단>(박종대 옮김, 사계절, 2002)



>> 아래는 원제나 연도를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한 작품들이다:


"발라톤 호수의 물결", <어느 사랑의 실험: 독일>(임홍배 옮김, 창비, 2008)


<하룻밤의 여행>(교원, 2007)


"위험에 빠진 산타클로스", <(세상의 모든) 크리스마스>(폴 오스터 외 지음, 알베르토 망겔 엮음, 김석희 옮김, 황금나침반, 2006)


"사랑의 집", <휴일의 소설: 세계현대단편소설선>(이어령 편저 문학사상, 2005)


"즐거움을 처방하는 의사", <뚱뚱한 아이>(노혜옥 옮김, 경진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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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얼마 전 웹소설과 웹툰 원작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서처럼 결국 '각색' 문제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역사적 사실을 각색하는 것이야 자유이겠지만, 그 결과물이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허구라며 빠져 나갈 여지를 적게 주어서 논란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흥미로운 점은 <암살자(들)>의 주연 가운데 두 명의 전작에서도 이번처럼 역사 왜곡 혐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박해일은 <나랏말싸미>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한 무명의 승려를 연기했고, 유해진은 <말모이>에서 한글 사전 편찬에 관여한 까막눈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교수와 광인"의 클리셰를 답습하려고 실제 역사에 허구를 끼워넣은 격이었다.


여하간 양쪽 모두 충분히 상상가능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던 까닭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어주지 못한 어설픈 각색 때문이었다.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와 관련된 야사의 기록을 근거로 들면서 마치 정설처럼 홍보해서 논란이 일었고, <말모이>도 실존했던 '조선어학회'의 역할을 과도하게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했다.


<암살자(들)>의 문제도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음모론 소재에만 몰두한 나머지 여러 가설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없어 보이는 것에 매달렸으니,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딱히 공감은 안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야당 의원의 지적처럼 '노무현이 권양숙의 사주로 암살당했다'는 음모론을 다룬 영화가 나온들, 그럴싸하다며 수긍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나저나 저 영화의 소재인 육영수 피격 사건에서 한 가지 아이러니는 당시 경호를 담당한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실제 '암살'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연구에 전념하여 <암살사 연구>라는 저서까지 내놓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당시로선 독보적인 암살 방지법의 전문가였던 셈인데, 정작 육영수 피격 사건에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난받고 물러났다.


나귀님은 예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그 책을 구입해서 갖고 있는데, 정확한 제목은 <(대통령 경호를 위한) 암살사 연구>이고, 발행처는 대통령 경호실이며, 발행일은 1971년 6월 20일인 비매품이다. 케이스를 벗기면 겉표지 한쪽에 "대외비"라고 적혀 있고, 속표지 다음의 "주의사항" 한쪽에 [ /500]이라고 인쇄되어 있어서 결국 500부 한정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통은 [ /500]의 빈칸에 연번을 적어 넣게 마련인데, 나귀님이 산 책에는 아무 표시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은 재고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의사항에는 "(1) 이 著書는 室員에 限하여 閱讀토록 할 것 (2) 이 著書는 複製, 複寫, 拔萃할 수 없으며 秘密文件에 준하여 管理할 것"이라는 지침이 나온다. 인명 등의 주석은 별책으로 첨부했다.


본문은 서론, 연구 목적과 의의, 개념 소개에 이어 서양 고대, 중세, 현대의 사례를 소개하고 러시아, 미국, 일본, 구한말의 사례로 넘어갔다가, 현대 각국의 지도자 경호 제도를 소개하며 마무리된다. 부록으로 "세계암살사건일람" 도표와 "정리의궤 반차도"와 "능행도"의 도판이 수록되었는데, 아마도 조선 시대 국왕 경호의 실제 모습을 예시하는 의도인 듯하다.


1971년의 <암살사 연구> 이후 박종규는 1973년에 <암살사 연구 (속편)>도 간행했는데, 불과 1년 뒤에 육영수 피격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몰락을 예견한 셈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이 책의 간행을 중심으로 '암살을 연구했지만 정작 막진 못한 경호실장' 이야기를 영화화했다면 오히려 더 그럴싸하진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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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작가 앤 카슨이 202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모양이다.(사실 '그' 성별에 '그' 지역이면 오히려 오츠나 애트우드가 받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나귀님도 몇 권 읽어본 작가이니 반갑기도 하고, 서양 고전을 바탕에 깔고 현대적 재해석을 도모한 독특한 작품 세계가 꽤 인상적이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히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나 수긍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저 작가의 저서인 <남편의 아름다움>에 나오는 "한정된 교미"를 황당한 오역의 사례로서 종종 언급했던 나귀님이다. 원래는 유대교에서 토라(모세오경)의 신선함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번 읽어도 항상 새로운 토라'를 '여러 번 박아도 항상 처녀 같은 영양의 음문'에 비유한 구절을 재인용한 것이어서 "좁은 음문"(narrow sex)이라고 번역했어야 한다.


이걸 발견했을 즈음, 김훈이 신작 소설에서 갓난 딸의 기저귀를 갈다 목격한 '음문'을 묘사했다가 소아성애 운운 하는 비난까지 받고 있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페미니즘이 득세하는 판에 모두들 기피하는 '음문'을 언급하고, 심지어 '좋은 조임'까지도 강조한 앤 카슨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한남' 작가라 불러야 하지 않나 싶어서 뭔가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었다.


김훈은 이 분야에서 전적(?)이 화려한데, <칼의 노래>에선 며칠 씻지 않은 여성의 음문에서 나는 냄새를 '젓국'에 비유하기도 했었다. 흥미롭게도 앤 카슨 역시 <남편의 아름다움>에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잘 안 씻는 여자'에게 가버린 남자를 언급했으니, 이것 역시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자야말로 본색은 '마초한남충개저씨'가 아닐까 의문을 품게 하는 단서이다.


체취에 대한 집착은 중세 시대에나 유행한 줄 알았더니, 향수 전문가 루카 투린의 전기에서 어느 조향사는 '며칠 씻지 않은 여자의 냄새'가 나는 향수를 최상급이라며 소개하기도 했고, 수년 전부터 SNS를 통해 미국 십대 소녀 사이에서 유행한 이성 유혹법 중에 음문 분비물을 향수 대신 몸에 묻히는 '바빙'(vabbing)도 있었다니, 결국 유행도 돌고 도는 듯하다.


일본 만화 중에 <땀과 비누>라는 것도 있어서, 체질상 땀이 많은 여자와 그 냄새에 반해 노상 '킁카킁카' 하는 남자의 어딘가 살짝 민망한 로맨스였는데, 어째서인지 뒤로 갈수록 체취에 관한 이야기는 적어지고 일반적인 직장인 연애담에 불과해져서 실망스러웠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사람이건 짐승이건 각종 '꼬순내'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상 본능이 아닐까.


여하간 이래저래 민망한 이야기이지만, 또 일상의 일부분이기도 하니, 굳이 그걸 글로 써서 널리 알린 행동도 주책맞을 수는 있어도 비난 받을 만한 일까진 아니다. 추위에 새파래진 갓난아기의 음문이건, 좁디좁은 영양의 음문이건,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냄새(카슨의 표현으로는 "당신 가랑이 사이의 맛")건 간에, 작중 인물의 발언일 뿐 작가의 취향은 아닐 테니까.


아직 앤 카슨의 책을 다 읽어 보지는 않은 나귀님이니 기껏 그중 몇 권에 나온 음문과 체취 같은 지엽적인 묘사만 가지고 그의 성향이나 지향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문제의 언급을 비롯해서 각종 서양 고전에서 나온 인용문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는 점은 저 고전학자 출신 작가의 독창성인 동시에 한계선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서 찾아 본 신간 중에는 난다에서 나온 시집이 여럿 있었는데, 거기서도 각종 인명과 서명과 주석이 잔뜩 널린 것을 보면서, 나귀님처럼 고전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몰라도 일반적인 독자라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한정된 교미"처럼 번역자 단계에서부터 잘 소화를 못해 발생한 오류도 적지 않을 테니.


물론 판매야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의 후광에다가, '산 놀란이 죽은 호메로스를 깨운' 사례처럼 유행에 열광하는 순진한 독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 이전에는 '시는 어렵다! 서사시는 더 어렵다!'고 반발하다가, 이제는 '호메로스를 보자! 놀란은 더 보자!'고 외치는 상황이니, 조만간 '레이철 카슨은 틀렸다! 앤 카슨이 옳다!'고 하진 않을까.


한편으로는 고전 인용문을 벗겨내어 '발가벗은'(?) 앤 카슨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반드시 구름에 올라타야만 하늘을 노닐 수 있던 열자를 향해 '자네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다'며 꼬집은 장자의 말도 떠오르기 때문이다. 카슨도 가끔 인용에 창작을 슬쩍 뒤섞긴 하지만, 아예 인용서와 인용문마저 허구로 지어냈던 보르헤스 정도까진 아닌 듯하니까.


게리온 단편을 번역하다 빡쳐서(?) 아예 개작까지 만들었다는 <빨강의 자서전>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게리온 단편의 개요, 번역(그런데 창작을 곁들인), 연구 과제를 줄줄이 늘어놓은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여전히 고전학자이지 작가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다. 제발트의 작품처럼 카슨의 작품도 결국 에세이의 연장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심지어 <녹스>와 <플로트>라는 작품은 그 외양부터 오늘날 일반적인 형태의 책과는 상당히 다르니, 어쩌면 앤 카슨이야말로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형식 면에서는 가장 파격적인 축에 속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파격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격언도 있는 만큼, 최종적인 평가까지는 아직 좀 더 기다려 보아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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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섬 남쪽의 작은 어촌 버지오 인근의 좁은 만에 길이 20미터 가량의 참고래(긴수염고래) 한 마리가 갇혀 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파도가 높을 때에 해안에서 먹잇감인 청어를 쫓다가 어찌어찌 그곳까지 들어왔지만, 도로 나가려고 해도 안쪽은 가뜩이나 물이 얕고 절벽 사이의 입구도 좁아 사실상 꼼짝달싹 못하고 갇힌 것이다.


마침 버지오에 머물던 동물학자 겸 저술가 팔리 모와트(1921-2014)는 뒤늦게야 소식을 접하고, 야생 상태의 고래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흥분하며 달려가지만, 막상 고래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자마자 경악하고 만다. 지역민이 고래를 향해 총을 쏘는가 하면, 관광객이 큰 배를 타고 무기력한 고래를 위협하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분노한 모와트는 고래를 괴롭히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경찰관에게도 신고하지만, 시건방진 외지인의 주제 넘은 간섭이라 생각한 까닭인지 모두들 시큰둥하게 외면하기만 한다. 모와트는 안타까운 마음에 고래를 구할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언론을 통해 바깥 세상에도 알리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래는 죽어 버린다.


모와트가 이때의 체험을 회고한 논픽션이 <고래 죽이기(A Whale for the Killing)>(1972)인데, 1981년에는 동명의 TV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나귀님도 1987년에 KBS <토요명화>에서 <고래를 쫓는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그 영화를 먼저 접했다가, 나중에 <개가 되기 싫었던 개>의 옛 번역본 가운데 하나의 역자후기를 통해 그 원작자도 모와트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저 작가가 뉴펀들랜드의 작은 어촌에서 살게 된 까닭은, 또 다른 저서 <안 뜨려는 배>에 묘사된 것처럼 가뜩이나 고장이 잦은 돛배를 몰고 여행하다가 그곳에서 한동안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탓이었다. 하지만 고래 사건을 외부에 알리면서부터는 지역민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졌고, 마치 쫓겨나듯이 다시 돛배를 몰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는 것이 모와트의 회고다.


특정 지역의 동물 자원에 대한 외부인의 지나친 간섭에 지역민이 반발한 사례는 '리키의 세 딸들'인 침팬지 연구자 제인 구달, 고릴라 연구자 다이앤 포시, 오랑우탄 연구자 비루테 갈디카스도 모두 겪은 바였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보호 주장도 일리는 있었지만, 포시의 경우에는 이를 지나치게 과격하게 밀어붙이다가 큰 반발을 사서 결국 피살당하고 말았다.


물론 지역민의 입장에서도 반발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안 뜨려는 배>에서 모와트도 언급했듯, 그곳에서 고래가 얕은 웅덩이에 갇히거나 바위 틈에 끼이는 일은 그리 드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통행이 불편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죽어서 부패하게 되면 그 악취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지역민에게야 이런 고래는 그저 성가신 골칫거리일 뿐이다.


이처럼 모두에게 각자의 이유가 있고, 사안마다 현실적인 한계가 있으니, 고래가 되었건 고릴라가 되었건 간에 지킬 수 있는 것은 지키되, 지킬 수 없는 것까지도 무리하게 지키라고 요구하진 말 일이다. 팔리 모와트도 불쌍한 고래에게 총을 쏘아 괴롭히는 잔혹 행위에는 항의했지만, 그렇다고 저 '리워야단'을 구출한다는 불가능한 일까지 한사코 요구하진 않았으니.


그나저나 오래 전에 본 영화며 그 원작 논픽션을 새삼스레 떠올린 까닭은 당연히 최근 부산의 해안 공원에 나타난 상어 한 마리 때문이다. 서식지로서는 딱히 좋은 환경도 아니고, 먹이 활동도 전무하다는 점 때문에 전문가들은 우려를 나타냈고, 지역 관청에서도 외부로의 유도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한 상황이니,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할 따름이다.


뉴스에 따르면 평소 방문객도 많지 않던 공원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인근 편의점과 커피숍의 매출이 급증하며 관광 효과가 드러나자, 상어에게 '부캉이'라는 별명이 생겨나고 지자체 차원에서도 마스코트 채택과 관련 상품화가 고려되는 등 그 파급 효과가 상당한 모양이다.(하지만 사람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는 동물을 마스코트화하는 것이 과연 좋을까?)


구경꾼 입장에서는 수족관의 인공 상태가 아닌 자연 상태의 상어를 불과 몇 미터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반기는 듯하다. 심지어 상어를 몰아내려는 경찰과 소방의 시도에 반발하며 오히려 '부캉이'를 응원하고 있으니, 어쩌면 지난번 동물원 탈출 소동의 와중에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응원이 대상이 된 '늑구'처럼 감정 이입이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온 자연'의 사례로서가 아니라 기후 변화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국 상어 한 마리의 삶에서의 교란만이 아니라, 바다며 지구 전체의 질서에서의 교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까. 물론 사람들은 늑구 때처럼 이번에도 가뜩이나 답답하던 일상에서의 교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 <고래 죽이기>에서 팔리 모와트는 얕은 물에 갇혀 죽어가는 고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괴로운 마음에 다음과 같이 썼다:


"갇혀 있는 것은 고래만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고래와 함께 갇혀 있었다. 고래의 삶의 자연적인 패턴이 교란되었다고 치면, 우리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경계가 뚜렷한 우리의 삶의 질서 속으로 뭔가 놀라운 신비가 침입한 셈이었다. 지상의 두 발 동물인 우리로선 그 신비를 차마 측량할 수 없기에, 본능적인 두려움과 폭력과 증오를 가지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심해에서 온 이 수수께끼는 삶에 대한 인간의 치유불가능한 무지를 나타내는 척도였다. 이 장소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의 핵심이 되어 버린 이 불가해한 비밀을 거울 삼아 우리는 스스로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춰보았으니... 그 얼굴은 추악했다."("The Deeps", excerpts from A WHALE FOR THE KILLING, 1972, in THE WORLD OF FARLEY MOWAT: A SELECTION FROM HIS WORKS.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Peter Davidson. Boston: An Atlantic Monthly Press Book, an imprint of Little, Brown and Company, 1980, 2nd printing, p.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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