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에 인터넷 헌책방에서 주문한 헤겔의 <철학사 1>이 도착했다. 예전에 신촌 지하 헌책방에서 (매장도 지하에 있고, 운영 방식도 일본의 지하 아이돌과 비슷해서, 구매액이 일정 한도를 넘어야만 사장님과 악수회도 가능하다) 계산을 마치고 보니 사장님 등 뒤의 책장에 그 책이 꽂혀 있는데, 누군가 예약한 것인 듯해서 놓쳤다가 이번에야 다른 헌책방에서 샀다.
<철학사 1>은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헤겔학총서' 제9권이다. 제목에 1이라고 나와 있으니, 혹시 2나 3은 없나 찾아볼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1권만 나오고 말았다.(자매품으로 돈 드릴로의 <마오 II>가 있다). ISBN에 '세트' 표시를 한 모양인지 일부 도서관에서는 <철학사 1-2>라고 잘못 표기했는데, 심지어 서울대 도서관에서도 그렇게 잘못 적었다.
'헤겔학총서'는 대부분 임석진의 주도로 지식산업사에서 간행한 헤겔 관련서 시리즈를 가리키는데 지금은 모두 절판되었다. 그중에서 헤겔의 주저인 <정신현상학>과 <법철학>은 훗날 한길사에서 재간행되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역시나 절판인데, 혹시 <대논리학>의 경우처럼 다른 출판사에서 재간행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임석진의 헤겔 번역은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정신현상학>이 최초였으며, 이걸 나중에 지식산업사로 옮겨 재간행하면서 '헤겔학총서'라는 총서명을 쓰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현재 알라딘에서는 총서명이나 역자명으로 검색해도 일부만 나오므로 (물론 서지 정보는 등록되어서 '헤겔 + 지식산업사'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2. <정신현상학 I-II>, 임석진 옮김, 1988
3. <헤겔 연구 4>, 한국헤겔학회 편저, 1988
4. <헤겔의 노동의 개념>, 임석진 지음, 1990
5-6. <법철학>, 임석진 옮김, 1989. (상하 분권에서 훗날 합본)
7. <역사 속의 이성>, 임석진 옮김, 1992
8. <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 임석진 옮김, 1989
9. <철학사 1>, 임석진 옮김, 1996
(10). <종교철학>, 최신한 옮김, 1999
'헤겔학총서'는 그 이름에 걸맞게끔 초기에는 임석진의 헤겔 번역서뿐만 아니라 헤겔 연구서며 학회지까지도 포함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임석진의 헤겔 번역서 위주로 굳어진 듯하다. 다만 마지막 권인 <종교철학>은 표지에 '헤겔학총서'가 아니라 '헤겔총서'라고만 나와 있고 연번도 나와 있지 않으므로, 어쩌면 별개의 단행본인지 시리즈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헤겔 저서를 넣어 둔 책장을 뒤지다 보니, 임석진의 저서도 두 권이나 나온다. <시대와 변증법: 헤겔철학의 한국적 수용과 그 전개>(청사, 1979)와 <헤겔 변증법의 모색과 전망>(종로서적, 1985)은 저자가 여러 지면에 기고한 철학 관련 에세이를 엮은 책들인데, 해외 학회 참석 당시 아도르노와 블로흐와 볼노브 등을 만난 일에 대한 회고도 짧게나마 실려 있다.
헤겔 번역서라면 예전 을유문화사의 <철학강요(백과)>와 삼성출판사의 <역사철학강의>와 지학사의 <대논리학>이 있었고, 이후 신학이며 자연과학 분야의 강의록도 간행되었다고 알고 있다. 최근 들어서도 <정신현상학>과 <백과>의 새로운 번역본을 비롯해서 관련서가 꾸준히 나오는 듯한데, 유독 임석진의 번역서만큼은 절판 상태가 지속되는 듯하니 의아한 일이다.
임석진은 독일 유학 당시 방북 사실을 박정희 정권에 제보해 이른바 '동백림 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는데, '밀고자' 꼬리표가 달려서인지 이후로는 대외 활동보다 학술 연구에만 전념한 듯하다. 훗날 김형효도 전두환 정권에 협조했다가 '부역자' 꼬리표가 달려서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던데,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 자기 분야에서 대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
[*] 여하간 기회 있을 때마다 헤겔 책을 꾸준히 모아 온 나귀님이기는 한데, 막상 완독한 것은 몇 가지 안 되니 민망한 일이다. 가장 최근에 뒤적여 본 것은 <법철학>이었는데, 레드벨벳의 노래 "덤덤"에 나오는 "이성적인 감각"이라는 기묘한 표현이 무려 헤겔에게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성적인 감각들을 헛갈리게 해"라는 저 가사의 맥락을 보면, 결국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은데, '이성'이면 '이성'이고 '감각'이면 '감각'이지 어떻게 '이성적인 감각'이 가능한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구글링해 보니 의외로 "이성적인 감각"이란 표현이 헤겔의 <법철학> 제3부 "인륜" 제398절에 나온다고 하기에 부랴부랴 임석진 번역본을 펼쳐보게 되었다. "이성적 고찰을 위한 이념의 의식이란 구체적이며 또한 이런 한에서 그것은 스스로 이념의 감각이기도 한 바로 이 이성적 감각에 다름 아닌 참다운 실천적 감각과 합치되거니와 결코 이러한 감각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수행되는 업무나 제한된 영역의 지평과 혼동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지식산업사, 480쪽). 가뜩이나 둔한 나귀님 머리로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헤겔이 보증한 이상에는 레드벨벳이 노래한 "이성적인 감각"도 아주 근거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이 유일한 소득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레드벨벳은 헤겔주의자인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 문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난번 말이 많았던 아이린의 '갑질' 논란부터 <정신현상학>에서 소개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현실 사례일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이니, 어쩐지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케이팝 문화 뒤편에 도사린 독일 관념론자의 짙은 그림자를 목격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