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또다시 중고 매장 할인 럭키백 이벤트를 시작한 모양인데, 결국 할인을 미끼로 에코백을 하나 더 사라는 이야기가 되고 보니 적잖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럭키백 이벤트 때마다 꼬박꼬박 구입한 까닭에 16주년 에코백 하나, (지금까지 구입한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모래고양이 에코백 하나, 저 악명 높은 "빨간물" 에코백 둘 (원래 구입한 "캐리" 에코백에다가 나중에 추가 배송된 정상 제품도 있으니까), 그리고 작년에 정말정말정말 디자인 구려서 진짜진짜진짜 사기 싫었는데 억지로 샀던 초록색 에코백까지 해서, 알라딘 에코백만 무려 다섯 개에 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요즘 들어 에코백을 사은품으로 주는 곳이 워낙 많다 보니, 굳이 내 돈을 주고 구입하지 않아도 정말 처치곤란 수준으로 집에 많다는 거다. 심지어 이마트 "수달" 가방 같은 비닐 백도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비록 재사용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과연 저게 환경 보호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에코백의 본래 의도는 환경 보호였다고 (따라서 처음에는 플래카드처럼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을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은 본래 의도와 달리 에코백 자체가 유행처럼 된 것 같기도 하고, 그 제작에 필요한 자원과 비용을 따지면 오히려 "안티-에코 백" 같기도 하다.


당장 알라딘 박스만 뜯어 보아도 이런저런 비닐 포장재가 수두룩한데, 무려 20년 묵었다고 자랑하는 이 회사에서 정말 환경을 생각했다면, 에코백을 팔 시간에 차라리 자기네가 담아 보내는 이 비닐 쓰레기를 재활용할 방법이나 (하다못해 고객이 비닐 포장재를 가까운 중고 매장으로 다시 가져오면 받아서 재활용한다거나) 고민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간 상기한 이유로 해서 올해는 처음으로 알라딘 럭키백을 구입하지 않을 작정이다. 에코백이라면 이미 많고,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되는지도 의심스러우며, 다른 무엇보다도 가격이 무려 1만 3천 원이나 하는데 겨우 5만 원밖에 할인이 안 되니까...



[24. 01. 30. 추가] 이후로도 알라딘에서는 계속해서 "에코 백"이라는 미명 하에 "안티-에코 백"을 만들아낼 뿐만 아니라, "사은품"이나 "한정판"이라는 명목 하에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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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동안 곤충화가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1647-1717)에 관한 책을 읽었다. 바깥양반이 오전에 책을 읽기에, 배경 음악 삼으라고 실비우스 레오폴드 바이스의 류트 작품집 ARS MELANCHOLIAE 를 꺼내 틀어준 게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재킷을 보니 어디서 본 듯한 꽃과 나비 그림이 있었다. 혹시 얼마 전에 구입한 독일 여류 화가의 작품인가 싶어서 책장을 뒤져 <곤충 책: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수리남 곤충의 변태>(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지음, 윤효진 옮김, 양문, 2004)를 도로 꺼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중 하나인 ‘자단나무’ 그림이었다. 구입해 놓고 아직 읽을 기회가 없었기에, 이참에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싶어서 나카노 교코의 메리안 전기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김성기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3)와 함께 꺼내놓았다.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에 제법 이름을 날리던 화가 겸 출판인이었으며, 훗날 마리아가 남편의 성 대신에 아버지의 성을 드러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어머니는 화가 메리안의 후처로 들어가 딸과 아들을 낳고 남편과 사별했으며, 이후 또 다른 화가 겸 출판인과 재혼했다. 마리아는 새아버지의 관심과 후원 속에서 그림 및 동판화를 비롯한 출판 업무를 배웠으며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략 아버지가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격이었다) 이후 역시나 화가로 함께 일하던 남편과 결혼해서 뉘른베르크로 진출했다. 하지만 남편이 사업과 가정 모두를 등한시하고 바깥으로 나돌자, 마리아는 가사뿐만 아니라 출판과 그림 교습 등을 통해서 생계까지 떠맡게 되었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각별히 관심을 두던 꽃과 곤충을 묘사한 화집을 여러 권 간행해서 주목을 받았으며, 30대 후반에 남편을 떠나 의붓오빠가 머물던 라바디파 신앙 공동체에 한동안 몸담으며, 남편과의 재결합을 한사코 거부한 끝에 결국 이혼에 성공했다. 훗날 독일 경건주의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는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장 드 라바디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는 결국 와해되고 말았지만, 마리아가 머물던 공동체의 후원자가 마침 수리남 총독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낯선 열대 땅을 직접 밟고 그곳의 자연을 관찰하려는 열망을 품었다. 길고 어려운 교섭 끝에 그녀는 1699년에 둘째딸을 데리고 수리남에 가서 1년여 동안 현지의 자연을 관찰했고, 귀국 후 역작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를 간행해서 격찬을 얻었다.


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곤충을 좋아했으며, 특히 애벌레가 성충으로 변모하는 ‘변태’ 과정에 각별히 관심을 가졌다. “나는 소녀시절부터 곤충 연구에 몰두했다.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으로 누에 관찰을 시작한 후, 나는 다른 애벌레에서 이보다 훨씬 아름다운 나비와 나방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차츰 모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유충을 채집했다. 나는 어떤 사교 모임에도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이 연구에 매달렸다. 동시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 연습에 열중했다.”(<곤충 책>, 10쪽) 바로 이 점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12세기 일본의 단편 소설집 <쓰쓰미추나곤 모노가타리>에 나온 “벌레를 좋아하는 아가씨”와도 유사하다. 여기서 주인공인 대갓집 아가씨는 곤충, 특히 애벌레를 취미로 수집한다:


 

“세상 사람들은 꽃이다 나비다 하며 추켜세우는데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야. 인간이라면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의 근본을 알려고 해야 기품이 있는 게지.” 그녀는 온갖 징그러운 벌레를 채집하여 관찰용 상자에 넣게 하였다. “이게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봐야겠어.” “송충이가 속이 깊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네.” 앞머리는 기품 없는 부인네처럼 귀 뒤로 넘긴 채 아침저녁으로 손바닥에 송충이를 올려놓고 관찰하였다.(48쪽)

 

 

부모가 꼴사나운 짓을 한다며 나무라자, 아가씨는 오히려 당당하게 반론한다. “세상만사 그 과정을 지켜보고 끝을 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옵니다. (...) 사람들이 입는 비단도 결국은 누에에서 나온 거예요. 나비가 되어 버리면 이제 끝이니 쓸모가 없지요.”(50쪽) 이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두 망측하고도 이상하다고 여기는데, 한 대갓집 아들이 도리어 흥미를 갖고 아가씨를 찾아와서 역시나 아이들을 시켜 애벌레를 채집하기에 바쁜 상대방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재치 있게도 역시나 곤충을 소재로 연시(戀詩)를 써서 보낸다:

 

 

털벌레 같은 그대 모습 본 뒤로 잊을 수 없어

당신을 데리고 가 지켜주고 싶어라


 

그러자 아가씨도 한 술 더 떠서 이런 답장을 보낸다:


 

털벌레처럼 세상 사람과 다른 마음 가진 나

당신 이름 듣고서 그때야 답하리라


 

그러자 남자도 이렇게 답장한다:


 

털벌레처럼 보이는 당신 눈썹 털끝만큼도

당신과 닮은 사람 어디에도 없어요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째서인지 저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뒷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질 것이다”라면서 뚝 이야기를 끊어 버린다. 어쩐지 독자로선 고도의 낚시질에 걸려든 느낌마저 든다. 여하간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도 만만치 않아서, 어려서는 물론이고 결혼 이후에도 종종 애벌레를 수집해서 변태 과정을 관찰했고, 곤충 표본을 만들어서 판매하기도 했다. 나카노 교코는 이에 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평범한 모습으로 태어난 소녀는 그 눈부신 환생, 드라마틱한 변화에 용기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여성이라면 누구든 소녀 시절에는 예쁘고 멋지게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나비만큼 그런 소녀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존재가 또 있을까.”(63쪽)


당시의 과학계에서는 곤충 유충과 성충의 관계가 명확히 정립되지는 않았다. 즉 누에에서 나방이 나오는 등의 몇 가지 사례는 사실로 인정되었지만, 그 외의 나머지 곤충은 유충과 변태를 거쳐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오인되었던 것이다. 특히 해충은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되었다. 린네보다 두 세대 일찍 태어난 메리안은 관찰과 실험과 그림을 통해서 곤충의 변태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곤충학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메리안은 정식 과학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예술을 위해 과학을 활용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종종 잘못된 관찰이나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옥의 티들은 아쉽게도 훗날 그녀의 업적이 부당하게 과소평가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림 면에서 보자면, 한 장의 그림에 곤충의 알과 유충과 성충 모두를 보여주는 방식의 묘사법은 그녀가 처음 창시한 것이며, 오늘날 자연 도감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나카노 교코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한 장의 화폭에 곤충아 알, 유충, 번데기, 성충으로 변태하는 과정, 즉 ‘시간’을 표현했으며, 그것과 더불어 그 곤충의 먹이인 화초도 함께 묘사했다. 그리고 거기에 반드시 각 곤충들의 발견 장소와 변태 기간, 감상 같은 짧은 해설을 곁들였다. 이런 획기적인 작품은 무려 300년 뒤의 곤충 도감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곤충 도감의 기본적인 양식은 그녀가 최초로 고안해 낸 것이다.”(96쪽) 이것만 놓고 보아도 과학과 예술 모두에 걸친 메리안의 업적은 이미 확고히 인정받았다고 해야 맞겠다.


메리안의 화풍은 사실주의에 기반했지만, 종종 핵심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대상의 크기나 실존 기간 등에서 선의의 왜곡이 가해졌다. 한 세기 반 뒤에 탄생한 존 제임스 오듀본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평면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독특한 색감을 자랑하기 때문에 꽤나 인상적이다.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지금 나와 있는 관련서에 수록된 도판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다. <곤충 책>은 <수리남>의 초판 가운데 일부 내용을 빼고 옮긴 것이지만 (저자 사후 2판부터 수록된 악어와 도마뱀 등의 그림은 빠졌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흐리며, 일부 도판은 원서와 비교해서 좌우 반전 상태인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나카노 교코의 책에는 컬러 도판이 몇 장 수록되어 있지만, 본문의 흑백 도판은 차마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시커멓다.


메리안에 관한 약전은 <곤충 책>에 수록된 헬무트 데케르트의 “예술과 과학의 경계선에서: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의 업적”과 내털리 제먼 데이비스의 <주변부의 여성들>에 수록된 "마리아 지빌리 메리안: 변태"가 있다. <무서운 그림>의 저자 나카노 교코의 전기는 비록 일부 내용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과 함께 관련 정보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큰 도움이 된다. 그 외에도 그림과 박물학과 여행에 관련된 다른 책에서도 단편적인 서술을 찾을 수 있다. <마술의 그림들>(아니타 알부스 지음, 배진아 옮김, 생각의나무, 2005)과 <위대한 박물학자>(로버트 헉슬리 엮음, 곽명단 옮김, 21세기북스, 2009)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70가지 여행>(로빈 핸버리 테니슨 엮음, 남경태 옮김, 역사의아침, 2009)가 그런 책들이다.




[24. 01. 30. 추가] 메리안의 저서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와 <새로운 꽃 그림책>이 작년 연말에 번역,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어 추가해 본다. <곤충 책>이 절판된 다음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는데, 그 책의 문제점이었던 도판이 이번에는 제대로 인쇄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 사이에 아동용 전기도 몇 권 나온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좀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되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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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안방에 펼쳐놓은 책들을 정리했더니, 몇 달 전엔가 아도르노를 읽다가 갑자기 호프만스탈에 관해서 알아보겠다며 찾아달랬다가 읽지는 않고 책더미 밑에 파묻어 버린 책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인 빌리 하스의 <세기말과 세기초: 벨 에포크>(김두규 옮김, 까치글방 90, 까치, 1994)를 무심코 뒤적이다 보니, 그중 제3장 전반부가 알프레드 자리의 <위뷔 왕>에 관한 내용이어서 깜짝 놀랐다. 분명히 이전에 완독한 책이었는데, 그때에는 사전 지식이 없는 관계로 읽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던 셈이다.


이 작품은 하기오 모토의 만화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 제목이 A. 알바레스의 <자살의 연구>의 원제이자 권두에 인용된 예이츠의 “야만스러운 신”이란 발언에서 유래했고, 또 이 발언은 예이츠가 <위뷔 왕>의 초연을 보고 일기에 적은 감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이후 번역서인 <위뷔 왕>(동문선)과 <위비 왕>(연극과인간)을 모두 구입해 두기는 했지만, 막상 읽어보려고 해도 부조리극이라는 설명만 있을 뿐이고 저자의 이력이나 작품의 배경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선뜻 내키지 않던 참이었다.


여하간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싶어서 두 가지 판본을 대조하며 읽어보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쪽 모두 미진한 부분이 눈에 띄어서 <위뷔 왕>의 결정판 번역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부조리극이고 전위극이기 때문에 말장난이나 인용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역주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 역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오락가락하고, 이 판본에는 있지만 저 판본에는 없어서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어야 했다. 이왕 역주를 붙일 거면 좀 더 꼼꼼하게 붙였어야 하지 않을까.


번역의 의미에서도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서, 어떤 경우는 “일찍이 칼을 지녔던 가장 고귀한 가문을 대표하는”(동문선, 43쪽)과 “결코 검을 잡지 않았던 고귀한 족속을 대표하는”(연극과인간, 41쪽)처럼 아예 정반대의 뜻이 된다. 욕설과 관용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양쪽 번역본 모두 어떤 경우는 직역하고, 또 어떤 경우는 의역해서 일관성이 없었다. 특히 연극과인간 판본은 맞춤법조차도 틀린 문장이 적지 않아서 더욱 한심스러웠고, 심지어 어찌 된 영문인지 화폐 단위인 rixdale을 ‘리닥살’이라고 오역하기도 했다.


부록의 경우, 연극과인간 판본은 ‘인물 복장 설명’이 추가되어 있고, 동문선 판본은 저자의 기고문 “연극에 있어서 연극의 무용성에 관하여” 번역문과 저자의 연보, 참고문헌, 사진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역시나 차이가 있다. 시기를 따져 보니 동문선 판본이 연극과인간 판본보다 불과 3개월 더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나온 번역서가 기존 번역서를 참고만 했더라도 이렇게 엉터리가 나오진 않았을 것 같다. 어차피 얇은 책이라 보관의 부담이 적어 내버려두긴 했지만, 솔직히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번역서는 아니다.

 

폴란드의 용병 대장 ‘위뷔 영감’이 국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지만, 측근의 배신과 러시아군의 침략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보물을 챙겨 내뺀다는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디선가 들어 본 사극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 여하간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거기다가 어마어마한 욕설이며 말장난을 곁들여 내놓으니 첫 상연 때부터 작품 외적인 요소로 인해 의외의 괴작에 등극한 모양이지만, 어쩌면 지금은 역사적 의미밖에는 남지 않은 작품이 아닐까. 이래저래 기묘한 작품의 기묘한 번역본을 읽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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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룸프레스라는, 아직까지는 생소한 출판사에서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를 내놓았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내가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가 된 소설 <반바지 입은 당나귀>에 나오는 (나중에는 <반바지 당나귀>라고 제목과 표지를 바꿔서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신비스러운 소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저자는 <반바지 입은 당나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계속 나오는 소설을 두 편 더 썼는데, <이아생트>와 <이아생트의 정원>이라고 해서 양쪽 모두 "이아생트"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에 우연히 접한 <집을 떠난 빠스깔레>(김영철, 김태호 옮김, 청년사, 1990)라는 작품에서도 이아생트와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잠깐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아이와 강>인데, 김화영의 번역으로 1978년 처음 소개되었다가 지금은 역시나 같은 역자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재출간되었다.(그 외에도 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으로 소개된 <말리크로와>가 역시 보스코의 작품이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꺼내 보았더니 <집을 떠난 빠스깔레>와 <아이와 강>은 같은 내용이지만 삽화가는 서로 다르며, 특히 전자에는 "반바지 입은 당나귀"의 귀여운 모습이 묘사된 삽화도 있어서 각별한 재미를 전해준다. 반면 후자에는 "파스칼레의 노트"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 나오는 주요 동물과 도구에 관한 삽화가 들어 있는데, 이것 역시 민음사 판본에만 있는 깜짝 선물이다. 오랜만에 책을 꺼내 뒤적이며,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무려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 전인 1988년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내가 이 작품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요즘은 이래저래 책을 펼칠 때마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반세기 만에 다시 만난 이아생트가 한편으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서먹한 이유도 아마 그때문이리라.




[추가] 2014년 11월 초에 <반바지 입은 당나귀>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재간행되었다. 세 번째 갈아입은 옷인데, 이번에는 좀 더 오랜 수명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추가] 10년이 더 지난 2024년 5월에 <반바지 입은 당나귀> 3부작의 마지막 권인 <이아생트의 정원>이 문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다시 한 번 책장을 뒤져야 하나 싶어 난감하던 차에 딱 10년 전에 써 놓은 글이 있기에 다시 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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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재즈 음반을 조금씩 구입하면서 재즈에 관한 책도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하게 되었다. 스터즈 터클의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이매진, 2006)는 얼마 전에야 헌책방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이다.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저자의 이름이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약력을 살펴보니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을 반세기 가까이 진행한 유명한 저널리스트라고 했다. 그리고 <재즈>는 그가 1957년에 처음 펴낸 첫 번째 책으로, 루이 암스트롱에서 존 콜트레인에 이르는 재즈의 거장 13명의 약전이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자세하거나 흥미로운 음악 논픽션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좀 피상적인 내용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저널리스트라고 해서 기대했던 날카로운 통찰이나 흥미로운 일화 같은 것은 사실상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인 까닭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이 책에 나온 내용을 이후의 책들이 주로 참고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신선감이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이 책의 뒷날개에 붙어 있는 다음과 같은 공지였다. "이매진은 스터즈 터클의 선집을 계속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제야 다시 한 번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스터즈 터클이라는 이름을 도대체 어디서 들었더라?" 알라딘에서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이매진에서는 <재즈> 이후에 스터즈 터클의 책이 두 권 더 나와 있었다. 하나는 <일>(2007)이고, 또 하나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2008)였다. 그리고 검색 결과에서는 약간 의외의 한 가지 책이 있었는데, 바로 마샬 버만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이었다. 이건 <현대성의 경험: 단단한 것들은 공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의 저자가 이런저런 기회에 쓴 서평과 에세이를 모은 책인데, 이전에 그중 몇 챕터를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났다.

 

마샬 버만의 책에서 제4장은 "스터즈 터클 - 벽화 속에 살다"라는 제목이며, 우리나라에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1974년 작품에 대한 서평(역시 같은 해에 발표된)이었다. 이 챕터를 읽고 보니 미국에서 스터즈 터클이라는 언론인의 위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구술사의 대가로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만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한 권의 책으로 녹여내는 작가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 중에서는 <일>과 <희망>이 그런 경우이며, 그 외에도 대공황을 소재로 한 구술사가 유명하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스터즈 터클"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도 예전에 읽은 마샬 버만 때문인지 몰랐다.

 

얼마 뒤에 문득 마루에 여기저기 쌓아둔 책더미 (언젠가 읽어보려고 책장에서 꺼내 두었다가 차일피일 미루는 통에 그냥 방치된 것들) 중에서 판테온 출판사의 대표를 역임한 앙드레 쉬프랭의 책이 눈에 띄었다. 아마 다른 이유로 꺼내 놓았던 책인 모양인데, 어째서인지 문득 이 책에 "스터즈 터클"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문/사회 부문의 책을 많이 낸 출판사의 대표이다 보니, 어쩌면 그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색인을 찾아보니 정말로 그의 이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쉬프랭은 터클에게 구술사 시리즈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스터즈 터클(이 책에서는 "스터스 테르켈"로 표기되었다)과 일하던 기간을 쉬프랭은 "판테온에서 저자와 내가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친밀하게 보낼 수 있었던 기간"(83쪽)이라고 회고한다. 쉬프랭과 터클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 펴낸 책은 <디비전 거리>였고, 이후 <어려운 시절>, <좋은 전쟁>, <일> 등이 나와서 계속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은 1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고 일부 학교에서는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진다. 이쯤 되면 실물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싶어서, 그의 대표작 <일>을 주문했다. 신국판 크기에 무려 880쪽이나 되어서 꽉 찬 느낌을 주는 책이다.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이라는 부제는 아마도 한국어판 출판사에서 지어낸 것이 아닐까 싶은데,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사회의 "일"에 대한 상당히 그럴듯한 정의 같기도 하다. 이 책이 구술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그야말로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농부와 광부, 경찰관과 매춘부, 청소부와 운동선수, 무덤 파는 인부와 성직자, 그리고 기타 전문직을 포함한 133명의 독백이 길게, 또는 짧게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대목이라도 아무렇게나 골라 읽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의 말에 푹 빠져 버리게 말 정도로 흡인력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저자의 서문이다. "일"에 관한 책이다 보니 노동의 거룩함이나 땀의 소중함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서문은 다음과 같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 '일'을 주제로 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다. 여기에는 신체에 대한 폭력뿐 아니라 영혼에 대한 폭력도 포함된다. 이 책은 상처와 사고, 말다툼과 주먹다짐, 신경쇠약과 화풀이에 대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일상의 모멸감을 다루고 있다.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날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모든 사람이 일을 저주의 일종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해 하는 사람도 상당수이다. 애덤 코핸의 추천사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일>의 구술사는 먼 과거에서 보내온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다. 1970년대 초는 구경제가 쇠퇴하고 현대적인 경영 기법과 컴퓨터 덕분에 미국의 일터가 바뀌기 시작하던 때였다. 지난 30년간 생산성은 치솟아 올랐으나 일의 만족도는 급락했다. <일>을 읽으면 과연 일터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자서전의 한 챕터를 "스터즈"에게 바치고 있는데,[*] 그의 말은 이 저널리스트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터켈이 사람들에게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지금 옆자리에 앉은 이 사람과는 유익하고 긴 대화가 가능하겠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중 한 권을 골라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제 그의 옆자리에 앉은 셈이 된다. 당신을 책 읽기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586쪽)[**] 에버트의 설명대로라면 스터즈 터클은 어마어마한 매력의 소유자인 셈이다. 누구하고나 친구가 되고, 누구에게서나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보유한.


스터즈 터클은 아주 독창적인 작가이거나 뛰어난 문장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특이한 작가였다. "당신이 그를 만났다면, 그는 당신의 친구가 됐을 것이다. 그런 일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와 베스트셀러 20권을 위해 인터뷰했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그는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동시대 사람들의 구술사를 글로 옮겼다. 대화를 할 때 그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할 수 있었다." 에버트의 말에 따르면, 터클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호기심은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Curiosity didn't kill this cat)."


스터즈 터클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고 나서도 마샬 버먼의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상당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그것도 위트 있게 쓰는 사람이다. 이 선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혼란에 휘말리다: 맑스주의와 몇 가지 모험들"이다.(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경구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그 역(逆)이다." 결국 공산주의도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평생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어렵게 살아간 자기 아버지를 회고한다.

 

이전에 분명히 읽었다가 또다시 까먹은 것이겠지만, 이 장에서 저자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거듭해서 인용한다. 그 희곡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읽기 위해서 책을 꺼내 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판본은 <세계의 현대 희곡>(열음사, 1990)에 수록된 오화섭의 번역인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예전과는 달리 오래 된 말투 같은 것이 약간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와 샘 셰퍼드의 <매장된 아이> 등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버릴 수가 없는 소중한 판본이기도 하다.

 

저자가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기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희곡에 묘사된 주인공은 실제로도 우리 대부분이 인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작품에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한때는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지금은 늙고 무능하다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노인. 한때는 최고의 미식축구 유망주인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지만, 지금은 실업자에 반항아인 말썽꾸러기 아들을 둔 아버지. 하지만 그 아들에게도 할 말은 있었고, 아버지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 이 희곡의 서글픈 줄거리이다.

 

윌리 로먼의 모습이야말로 아버지의 "전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평생 책상 앞에 앉아있는 책상물림인 나로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낯설음과 짜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감정을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 마이클 더다의 <오픈 북>에 나타난 저자의 한 마디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도 자기 아버지가 일하던 철공소인지 공장인지에서 아버지 대신 며칠 일하면서, 그 노동의 강도에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자기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한 덕분에 자기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몸둘 바를 몰랐다던가.


나 같은 책상물림이 하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가 "정신 노동"인데, 사실 이건 신체 노동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머리 쓰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 쌓인다 한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온 몸이 땀에 젖는 신체 노동에 비하자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인지 가끔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는 내가 정말로 "일"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빌어먹은 세상은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스터즈 터클의 저서 <일>의 서문은 브루클린에서 일하던 한 소방관의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소방수는,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품 안에 아기를 안고 불 속을 빠져나오는 소방수를 보셨을 겁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셨을 테죠. 이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현실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은행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돈이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요. 아홉 시 출근에 다섯 시 퇴근?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선생님이 보는 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



어쩌면 에릭 호퍼가 지식인이기 이전에 부두 노동자라는 신분을 끝까지 유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일기를 보면, 글을 쓰거나 강연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에겐 적지 않은 유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두에서 며칠이나 일을 공치고 난 끝에 간신히 힘든 하역 작업을 며칠간 해서 번 돈보다는, 오히려 잡지에 글을 한 편 기고해서 얻은 고료가 더 많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울러 신체 노동은 정신 노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가 노동으로 인해 생각이 끊긴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생각조차도 하기 어려우니, 집필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내가 에릭 호퍼를 읽으며 새삼 감탄하는 까닭은, 그가 이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의 가면을 쓰고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결국 거부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부두 노동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을 쉽게 낙관하지 않을 정도로 영리한 인물이며, 이는 아마도 그가 현실과 이론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바라본 인간은 뭔가 일관적이고 통일적이며 무모순한 존재인 것만 같다. 지식인이 종종 현실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이런저런 어마어마한 수사를 내놓는 것도 아마 그런 착각 때문이리라. 


하지만 호퍼의 주장은 희망을 이야기할 망정 미래를 낙관하지는 않고, 뭔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호퍼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노동자 출신의 철학자"라는 딱지만 놓고 보면 뭔가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오히려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며 일면 보수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퍼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직접 땀 흘리며 일해본 적 없는 지식인이 오히려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가 오히려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 이상하겠는가?


호퍼의 주장은 아주 세련되거나 탁월하지는 않다. 대부분은 독학을 통해 얻은 지식이고, 사유의 폭이나 깊이도 대단하지 않다. 그래도 그의 주장이 흥미로운 까닭은 여전히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이론을 통해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 실제 사례에 해당하는 인간을 찾아 나서는 일반적인 지식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즉 현실에서 인간을 접하며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 실제 사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아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료의 활용에서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에서는 종종 빛나는 부분이 드러난다.


특히 에릭 호퍼의 자서전은 스터즈 터클의 책과 나란히 놓고 읽어볼 만한 또 다른 "구술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최근에 한꺼번에 간행된 세 권의 책 중에서는 저자가 일과 사색을 병행하던 시기의 일기인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가 특히 좋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라는 책에 수록된 "자동화, 여가, 대중"이라는 글의 한 대목, 즉 호퍼가 일하던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자동 하역 시스템이 처음 가동되던 때의 일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평소 같으면 몇 사람이 직접 들어 날라야 했던 1톤짜리 신문용지 롤이 기계의 힘으로 척척 운반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호퍼는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신과 접전을 벌이면서 이제 에덴동산의 문 앞까지 다시 치고 올라왔다. 여호와와 그의 천사들은 번쩍이는 칼을 들고 에덴의 요새에 잠복해 있고, 우리 인간들은 자동화 기계를 가지고 에덴동산의 문을 쾅쾅 두드린다. 바로 그곳, 여호와와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되리라'라는 여호와의 칙령이 무효임을 선포할 것이다. (58쪽)



호퍼의 생전에 "일"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인간의 힘과 땀을 요하던 노동이, 어느새 석유와 기계를 요하는 노동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일이 곧 노동이 아니라, 인간 대신 일하는 기계를 관리 감독하는 것이 노동이 되었다. 호퍼의 감탄 속에는 일면 불안이 엿보인다. 은행에서 돈을 세면서도 이건 뭔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전직한 소방수의 경우처럼, 호퍼도 어쩌면 기계의 힘을 빌린 일은 진정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기계의 도입과 더불어 인간은 일이 불필요한 에덴 동산의 지복으로 거슬러 올라갈 듯 기고만장해졌지만, 실제로는 호퍼의 사망으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지상 천국은 도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터즈 터클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비인격화된 것만큼이나 비인간화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일을 싫어하고 증오하게 된 것도 그래서는 아니었을까? 간단한 기계 조작만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일과 접점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결국 일에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쯤 되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되리라"던 하느님의 명령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일을 통해 흘려야 하는 땀을 헬스클럽에서 인위적으로 흘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우리가 진정한 일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런가 하면 에드워드 머로의 <내가 믿는 이것>의 리메이크에 해당하는 <라디오 쇼>(세종서적, 2009)의 서문도 스터즈 터클의 글이다. 작정하고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짬짬이 번역된 그의 글이나, 또는 그에 관한 글을 더 찾아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 번역서의 해당 구절에는 오역이 있어서 새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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