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재즈 음반을 조금씩 구입하면서 재즈에 관한 책도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하게 되었다. 스터즈 터클의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이매진, 2006)는 얼마 전에야 헌책방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이다.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저자의 이름이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약력을 살펴보니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을 반세기 가까이 진행한 유명한 저널리스트라고 했다. 그리고 <재즈>는 그가 1957년에 처음 펴낸 첫 번째 책으로, 루이 암스트롱에서 존 콜트레인에 이르는 재즈의 거장 13명의 약전이 수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자세하거나 흥미로운 음악 논픽션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좀 피상적인 내용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저널리스트라고 해서 기대했던 날카로운 통찰이나 흥미로운 일화 같은 것은 사실상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인 까닭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이 책에 나온 내용을 이후의 책들이 주로 참고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신선감이 떨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은, 이 책의 뒷날개에 붙어 있는 다음과 같은 공지였다. "이매진은 스터즈 터클의 선집을 계속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제야 다시 한 번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스터즈 터클이라는 이름을 도대체 어디서 들었더라?" 알라딘에서 저자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이매진에서는 <재즈> 이후에 스터즈 터클의 책이 두 권 더 나와 있었다. 하나는 <일>(2007)이고, 또 하나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2008)였다. 그리고 검색 결과에서는 약간 의외의 한 가지 책이 있었는데, 바로 마샬 버만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이었다. 이건 <현대성의 경험: 단단한 것들은 공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의 저자가 이런저런 기회에 쓴 서평과 에세이를 모은 책인데, 이전에 그중 몇 챕터를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났다.
마샬 버만의 책에서 제4장은 "스터즈 터클 - 벽화 속에 살다"라는 제목이며, 우리나라에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1974년 작품에 대한 서평(역시 같은 해에 발표된)이었다. 이 챕터를 읽고 보니 미국에서 스터즈 터클이라는 언론인의 위상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구술사의 대가로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만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을 한 권의 책으로 녹여내는 작가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 중에서는 <일>과 <희망>이 그런 경우이며, 그 외에도 대공황을 소재로 한 구술사가 유명하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스터즈 터클"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도 예전에 읽은 마샬 버만 때문인지 몰랐다.
얼마 뒤에 문득 마루에 여기저기 쌓아둔 책더미 (언젠가 읽어보려고 책장에서 꺼내 두었다가 차일피일 미루는 통에 그냥 방치된 것들) 중에서 판테온 출판사의 대표를 역임한 앙드레 쉬프랭의 책이 눈에 띄었다. 아마 다른 이유로 꺼내 놓았던 책인 모양인데, 어째서인지 문득 이 책에 "스터즈 터클"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문/사회 부문의 책을 많이 낸 출판사의 대표이다 보니, 어쩌면 그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색인을 찾아보니 정말로 그의 이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쉬프랭은 터클에게 구술사 시리즈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스터즈 터클(이 책에서는 "스터스 테르켈"로 표기되었다)과 일하던 기간을 쉬프랭은 "판테온에서 저자와 내가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친밀하게 보낼 수 있었던 기간"(83쪽)이라고 회고한다. 쉬프랭과 터클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춰 펴낸 책은 <디비전 거리>였고, 이후 <어려운 시절>, <좋은 전쟁>, <일> 등이 나와서 계속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일>은 1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고 일부 학교에서는 교재로 사용되었다는 등의 일화가 전해진다. 이쯤 되면 실물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싶어서, 그의 대표작 <일>을 주문했다. 신국판 크기에 무려 880쪽이나 되어서 꽉 찬 느낌을 주는 책이다.
"누구나 하고 싶어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이라는 부제는 아마도 한국어판 출판사에서 지어낸 것이 아닐까 싶은데,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사회의 "일"에 대한 상당히 그럴듯한 정의 같기도 하다. 이 책이 구술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그야말로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농부와 광부, 경찰관과 매춘부, 청소부와 운동선수, 무덤 파는 인부와 성직자, 그리고 기타 전문직을 포함한 133명의 독백이 길게, 또는 짧게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대목이라도 아무렇게나 골라 읽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의 말에 푹 빠져 버리게 말 정도로 흡인력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저자의 서문이다. "일"에 관한 책이다 보니 노동의 거룩함이나 땀의 소중함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서문은 다음과 같이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 '일'을 주제로 한 이 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대한 책이다. 여기에는 신체에 대한 폭력뿐 아니라 영혼에 대한 폭력도 포함된다. 이 책은 상처와 사고, 말다툼과 주먹다짐, 신경쇠약과 화풀이에 대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일상의 모멸감을 다루고 있다.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날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공이다."
물론 이 책에 나온 모든 사람이 일을 저주의 일종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해 하는 사람도 상당수이다. 애덤 코핸의 추천사에 수록된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일>의 구술사는 먼 과거에서 보내온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아쉬움이 담겨 있다. 1970년대 초는 구경제가 쇠퇴하고 현대적인 경영 기법과 컴퓨터 덕분에 미국의 일터가 바뀌기 시작하던 때였다. 지난 30년간 생산성은 치솟아 올랐으나 일의 만족도는 급락했다. <일>을 읽으면 과연 일터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자서전의 한 챕터를 "스터즈"에게 바치고 있는데,[*] 그의 말은 이 저널리스트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터켈이 사람들에게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비결 가운데 하나는, '지금 옆자리에 앉은 이 사람과는 유익하고 긴 대화가 가능하겠다'는 인상을 상대방에게 주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중 한 권을 골라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이제 그의 옆자리에 앉은 셈이 된다. 당신을 책 읽기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586쪽)[**] 에버트의 설명대로라면 스터즈 터클은 어마어마한 매력의 소유자인 셈이다. 누구하고나 친구가 되고, 누구에게서나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보유한.
스터즈 터클은 아주 독창적인 작가이거나 뛰어난 문장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 특이한 작가였다. "당신이 그를 만났다면, 그는 당신의 친구가 됐을 것이다. 그런 일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와 베스트셀러 20권을 위해 인터뷰했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그는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동시대 사람들의 구술사를 글로 옮겼다. 대화를 할 때 그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할 수 있었다." 에버트의 말에 따르면, 터클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호기심은 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다(Curiosity didn't kill this cat)."
스터즈 터클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고 나서도 마샬 버먼의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다. 상당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이고, 그것도 위트 있게 쓰는 사람이다. 이 선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혼란에 휘말리다: 맑스주의와 몇 가지 모험들"이다.(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경구다.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그 역(逆)이다." 결국 공산주의도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평생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어렵게 살아간 자기 아버지를 회고한다.
이전에 분명히 읽었다가 또다시 까먹은 것이겠지만, 이 장에서 저자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거듭해서 인용한다. 그 희곡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읽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읽기 위해서 책을 꺼내 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판본은 <세계의 현대 희곡>(열음사, 1990)에 수록된 오화섭의 번역인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예전과는 달리 오래 된 말투 같은 것이 약간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와 샘 셰퍼드의 <매장된 아이> 등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버릴 수가 없는 소중한 판본이기도 하다.
저자가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기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희곡에 묘사된 주인공은 실제로도 우리 대부분이 인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작품에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한때는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지금은 늙고 무능하다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노인. 한때는 최고의 미식축구 유망주인 자랑스러운 아들을 두었지만, 지금은 실업자에 반항아인 말썽꾸러기 아들을 둔 아버지. 하지만 그 아들에게도 할 말은 있었고, 아버지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이 이 희곡의 서글픈 줄거리이다.
윌리 로먼의 모습이야말로 아버지의 "전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평생 책상 앞에 앉아있는 책상물림인 나로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낯설음과 짜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모순되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감정을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 마이클 더다의 <오픈 북>에 나타난 저자의 한 마디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도 자기 아버지가 일하던 철공소인지 공장인지에서 아버지 대신 며칠 일하면서, 그 노동의 강도에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자기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한 덕분에 자기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몸둘 바를 몰랐다던가.
나 같은 책상물림이 하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가 "정신 노동"인데, 사실 이건 신체 노동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머리 쓰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 쌓인다 한들, 팔다리가 욱신거리고 온 몸이 땀에 젖는 신체 노동에 비하자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인지 가끔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있는 내가 정말로 "일"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의문을 품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빌어먹은 세상은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스터즈 터클의 저서 <일>의 서문은 브루클린에서 일하던 한 소방관의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소방수는,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품 안에 아기를 안고 불 속을 빠져나오는 소방수를 보셨을 겁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셨을 테죠. 이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현실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은행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돈이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요. 아홉 시 출근에 다섯 시 퇴근?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선생님이 보는 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
어쩌면 에릭 호퍼가 지식인이기 이전에 부두 노동자라는 신분을 끝까지 유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의 일기를 보면, 글을 쓰거나 강연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에겐 적지 않은 유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두에서 며칠이나 일을 공치고 난 끝에 간신히 힘든 하역 작업을 며칠간 해서 번 돈보다는, 오히려 잡지에 글을 한 편 기고해서 얻은 고료가 더 많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울러 신체 노동은 정신 노동을 방해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가 노동으로 인해 생각이 끊긴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대목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생각조차도 하기 어려우니, 집필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내가 에릭 호퍼를 읽으며 새삼 감탄하는 까닭은, 그가 이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의 가면을 쓰고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결국 거부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부두 노동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을 쉽게 낙관하지 않을 정도로 영리한 인물이며, 이는 아마도 그가 현실과 이론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바라본 인간은 뭔가 일관적이고 통일적이며 무모순한 존재인 것만 같다. 지식인이 종종 현실에 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이런저런 어마어마한 수사를 내놓는 것도 아마 그런 착각 때문이리라.
하지만 호퍼의 주장은 희망을 이야기할 망정 미래를 낙관하지는 않고, 뭔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호퍼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노동자 출신의 철학자"라는 딱지만 놓고 보면 뭔가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오히려 냉소적이고 비관적이며 일면 보수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퍼를 비난할 수 있을까? 직접 땀 흘리며 일해본 적 없는 지식인이 오히려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직접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가 오히려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 이상하겠는가?
호퍼의 주장은 아주 세련되거나 탁월하지는 않다. 대부분은 독학을 통해 얻은 지식이고, 사유의 폭이나 깊이도 대단하지 않다. 그래도 그의 주장이 흥미로운 까닭은 여전히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이론을 통해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 실제 사례에 해당하는 인간을 찾아 나서는 일반적인 지식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 즉 현실에서 인간을 접하며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 실제 사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아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료의 활용에서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에서는 종종 빛나는 부분이 드러난다.
특히 에릭 호퍼의 자서전은 스터즈 터클의 책과 나란히 놓고 읽어볼 만한 또 다른 "구술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최근에 한꺼번에 간행된 세 권의 책 중에서는 저자가 일과 사색을 병행하던 시기의 일기인 <부두에서 일하며 사색하며>가 특히 좋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라는 책에 수록된 "자동화, 여가, 대중"이라는 글의 한 대목, 즉 호퍼가 일하던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자동 하역 시스템이 처음 가동되던 때의 일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평소 같으면 몇 사람이 직접 들어 날라야 했던 1톤짜리 신문용지 롤이 기계의 힘으로 척척 운반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호퍼는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신과 접전을 벌이면서 이제 에덴동산의 문 앞까지 다시 치고 올라왔다. 여호와와 그의 천사들은 번쩍이는 칼을 들고 에덴의 요새에 잠복해 있고, 우리 인간들은 자동화 기계를 가지고 에덴동산의 문을 쾅쾅 두드린다. 바로 그곳, 여호와와 천사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되리라'라는 여호와의 칙령이 무효임을 선포할 것이다. (58쪽)
호퍼의 생전에 "일"의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인간의 힘과 땀을 요하던 노동이, 어느새 석유와 기계를 요하는 노동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일이 곧 노동이 아니라, 인간 대신 일하는 기계를 관리 감독하는 것이 노동이 되었다. 호퍼의 감탄 속에는 일면 불안이 엿보인다. 은행에서 돈을 세면서도 이건 뭔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전직한 소방수의 경우처럼, 호퍼도 어쩌면 기계의 힘을 빌린 일은 진정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기계의 도입과 더불어 인간은 일이 불필요한 에덴 동산의 지복으로 거슬러 올라갈 듯 기고만장해졌지만, 실제로는 호퍼의 사망으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도록 그런 지상 천국은 도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터즈 터클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비인격화된 것만큼이나 비인간화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일을 싫어하고 증오하게 된 것도 그래서는 아니었을까? 간단한 기계 조작만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일과 접점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결국 일에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쯤 되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되리라"던 하느님의 명령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일을 통해 흘려야 하는 땀을 헬스클럽에서 인위적으로 흘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우리가 진정한 일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런가 하면 에드워드 머로의 <내가 믿는 이것>의 리메이크에 해당하는 <라디오 쇼>(세종서적, 2009)의 서문도 스터즈 터클의 글이다. 작정하고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짬짬이 번역된 그의 글이나, 또는 그에 관한 글을 더 찾아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 번역서의 해당 구절에는 오역이 있어서 새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