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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설거지 하면서 틀어놓은 뉴스에 하버드 대학 총장이 최근 있었던 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때문에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와 난타를 당했다고 나온다. 일부 학생들이 이스라엘/유대인을 비난하는 수위 높은 발언을 내놓은 것이야말로 반유대주의가 아니냐며 한 의원이 유도 질문을 던지자, 이에 총장이 "문맥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슬쩍 빠져나가려다가 '당신, 완전히 반유대주의자 아니냐' 하는 식으로 트집을 잡혀 몰매를 맞는 모양이다.


귀로 듣기만 할 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화면을 보니 문제의 하버드 총장은 무려 흑인에 심지어 여자다.(그 학교 역사 368년 만에 흑인으로는 최초이고,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총장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름조차 클로딘 게이라서 진짜 동성애자라면 묘하겠다 싶었는데, 록산 게이의 사촌이라지만 그쪽 성향까진 아닌 모양이다.(나중에 SNL의 패러디에서도 하원의장이 "본인 이름 갖고 농담 하시려면 지금 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니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하다).


하버드 총장의 답변도 물론 그 자체로 틀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 멋진 답변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백인/여성 의원을 향해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당신이 내게 무리한 유도 질문을 던진 것이 인종차별이 아니듯이!' 라고 응수했어도 따끔한 일침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과거 베트남전 반대 시위 논란에서 '아이고, 정말! 애들이 한 일 가지고!'라며 일갈했다던 한나 아렌트의 말도 괜찮았겠고.(물론 자칫 엉뚱한 데로 또 불똥이 튈 수 있지만).


하지만 청문회 영상을 찾아 보니 현장 분위기가 꽤 살벌해서 방어적인 답변도 불가피했던 것 같다. 문제의 백인/여성 의원은 우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대학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고, 곧이어 '인티파다, 즉 유대인 제거 선동은 반유대주의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즉 애초부터 하버드 총장이 흑인임을 감안하고 인종차별에서 반유대주의로 넘어가게 유도했던 셈인데, 결국 '김일성 개새끼 해봐!' 식으로 예/아니오 답변을 강요했으니 무례한 행동이다.


여하간 적절한 일침으로 뭐가 있나 궁리하다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것이라는 인용문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 최근의 무력 충돌 사태에 적용할 만한 레비의 이스라엘 관련 발언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심지어 이 인용문에도 진실/거짓이 혼재된 기묘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흥미가 생겼다. 나도 <뉴요커>에 게재된 어느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2002년에 <뉴요커>의 한 필자가 프리모 레비의 전기에 대한 서평을 기고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라고 그 책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인용문은 레비의 발언에 타인의 발언이 뒤섞인 형태로 와전된 것이었다. 즉 나중에 이탈리아 학자들이 추적해서 밝혀냈듯이, 레비의 실제 발언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까지만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뒤에 나오는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에 레비와 인터뷰를 행한 이탈리아 매체의 기자가 덧붙인 일종의 부연, 또는 논평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그 의견을 발언할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는 볼테르의 유명한 인용문이 실제로는 그의 발언이 아니라 그의 전기 작가가 창작한 요약에 불과했다는 것과도 유사한 와전 사례인 셈이다.


여하간 잘못 인용되었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지만, 레비의 말과 타인의 말이 뒤섞인 해당 인용문이야말로 오늘날의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한 마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선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무차별 살상 자체도 전쟁 범죄인 것은 맞지만, 그 근본 원인이 이스라엘 측에 있음을 감안해 보면 이후의 가자 지구 전투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 범죄를 정당화하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느 한쪽이 전적인 피해자 행세를 할 수는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이번 미국 대학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둘러싼 논란은 보수 진영에서 극소수의 주장을 대다수의 주장인 듯 실제보다 과장한 면도 충분히 있어 보이지만, 여러 대학 총장의 입장/거취에 대해서까지도 압박이 나왔다는 점에서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정치적 공정성이니 문화적 다양성 같은 자칭 진보적 가치의 오/남용으로 온갖 불편러가 늘어나면서 눈치보기가 만연한 것은 한국 공교육에서나 미국 고등교육에서나 큰 문제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이 80년 가까이 누린 억울한 희생양/소수자의 특권적 지위도 이스라엘의 거듭된 실책으로 조만간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물론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이스라엘 국민은 별개라는 것이 유명한 "홀로코스트 산업" 비판의 핵심이지만). 자기 민족에게는 공감과 배려를 바라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억압과 외면을 일삼은 까닭에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대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닦는 셈이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 글을 써놓고 프리모 레비의 인용문 번역이 있나 궁금해서 서경식 책을 찾느라 며칠 묵히다 보니, 마침 다른 책에 가려 못 보고 넘어갔던 그 책을 바로 그 날에 저자 타계 소식이 들려오기에 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시에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라 했건만 이제는 '세월도 가고 나도 따라간다'는 느낌이 더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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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 홍매의 <이견지>에 이어서 청 원매의 <자불어>를 읽기 시작했다.(번역서 제목은 무려 <청나라 귀신요괴전>인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자불어>로 적는다. <삼국전투기>도 아니고, 원...) <이견지>보다는 <요재지이>에 가까운 느낌이라서 재미있기는 한데, 막상 책을 펼쳐 서문을 읽자마자 첫 페이지에서부터 황당한 오류가 등장한다.


"괴, 역, 난, 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용혈(龍血), 귀거(鬼車) 등에 대해선 <주역> "계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23쪽) 그러면서 "귀거"를 각주에 네 줄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호랑나빗과에 속한 나비의 한 가지. 날개는 옅은 녹황색 또는 어두운 황색으로 검은 줄무늬와 얼룩얼룩한 무늬가 있다 (...) 학명은 Papilio xunthus."


그런데 문맥을 보면 "용혈"과 "귀거" 모두 앞 문장에서 말한 "괴력난신"의 사례라고 봐야 할 것 같으니, 각주에서 "용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라고 설명한 전자와 달리 후자만 실존하는 곤충의 일종이라고 무려 "학명"까지 들먹이면서 설명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 거다. 즉 "귀거"도 "용혈"처럼 상상의 물체라고 봐야 맞지 않을까?


구글링해 보니 "귀거"(鬼車)는 "귀조(鬼鳥), "구두조"(九頭鳥), "구봉"(九鳳)이라는 상상의 새, 즉 봉황의 일종을 가리킨다는 검색 결과가 줄줄이 나온다. 즉 <산해경>에서는 "구두조"로 나오고 <본초>에서는 "귀거"로 나온다니, 위의 문장에 나온 "귀거"도 이것이라고 해야 "용"과 "봉"을 나란히 언급하는 셈이어서 문맥에 어울리겠다 싶었다.


검색해 보니 출간 당시 <한국경제>에 게재된 서평에서는 의외로 이 대목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서언에서부터 '괴력난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지만 용혈(龍血: 용의 피)과 귀차(鬼車: 상상 속의 괴물 새) 등에 대해선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언급한 바 있다' 고 당당하게 밝힌다." 즉 "귀거"를 "귀차"로 바꾸어 인용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맨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책이 출간되고 나서 보도자료를 작성할 때에 "귀거/귀차"의 오류가 뒤늦게나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책은 못 고쳐도 기사는 정확하게 내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하지만 보도자료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알라딘의 미리보기에는 여전히 "귀거"로 남아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한국경제> 서평을 작성한 기자가 "귀거"의 오류를 용케 파악하고 스스로 "귀차"라고 바꿔 적으면서 "상상 속의 괴물 새"라는 설명까지 알아서 덧붙였다는 것인데, 이전에도 다른 신문에서 고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한 서평으로 인해 번역가와 기자 간에 한동안 설전이 벌어졌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것도 충분히 있음직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주역> "계사"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았더니, 결국에는 나비 "귀거"와 봉황 "귀차" 모두 잘못된 설명이었다. 즉 38괘 "화택규"(火澤睽)를 보면 "견시부도, 재귀일거(見豕負涂, 載鬼一車)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내가 가진 김인환 역본 <주역>에서는 이 부분을 "진흙을 뒤집어 쓴 돼지와 귀신을 실은 수레"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결국 <주역>에서는 한 단어 "귀거"(鬼車)가 아니라 "귀 + 거"(鬼 + 車)를 뜻하므로, 봉황도 아니고, 괴물 새도 아니고, 나비는 더더욱 아니며, 문자 그대로 "귀신 + 수레"라고 해석해야 맞다. 애초에 번역/편집/기사 작성 과정에서 저자가 말한 <주역>의 해당 내용이 무엇인지만 확인해 보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오류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전체 내용을 좌우할 중대한 오류까지는 아니고, 각주 하나 틀렸다고 해서 <청나라 귀신요괴전>이 <청나라 나비채집기>로 바뀌는 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제목부터 굳이 "귀신요괴전"이라고 대놓고 선전하는 책이 막상 서문 첫 쪽부터 "귀신 + 수레"를 Papilio xunthus 나비로 오해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번역자/편집자가 작업 중에 귀신요괴에게 씌어 생긴 오류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겠다만... 결과적으로는 글항아리 출판사에 대한 불신만 한 겹 더 늘어난 셈이다. 책 내놓는 것만 보면 딱 내 취향인데, 무지 두꺼운 책을 무지 비싼 값에 팔면서도 편집은 순 엉터리라 오류가 속출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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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의 <이견지>를 완독했다. 원저의 5분의 1 분량인 "갑지"와 "을지"만 번역하고 주석한 것인데도 450페이지 내외로 네 권 분량이니 상당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학진 총서 중에서도 세창출판사 발간분은 유독 글자가 크고 행간이 넓으며 가격이 비싸서 전반적으로 분량 뻥튀기의 혐의가 짙다.(학고방 발간분도 마찬가지인데, 예전 소명출판 발간분으로 환산했다면 훨씬 더 짜임새 있는 편집이라서 쪽수가 훨씬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세간의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는 필기문학에 해당하고, 내용 중 상당수는 귀신이나 요괴나 저승에 관한 일화이므로 지괴문학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청대의 <요재지이>나 <자불어>처럼 단편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취하기보다는, 북송대의 <태평광기>에 총정리된 더 이전 시대의 지괴문학처럼 분량과 서술 모두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다 만 것처럼 살짝 미진한 느낌을 주는 일화가 대부분이어서, 딱히 아주 재미있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 번역본의 의의는 역주자의 말마따나 중국에서도 아직 백화로 완역되지 않은 책을 옮겼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문장이 어색하거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가끔 있다는 점은 아쉽다.(예를 들어 권4의 "호극기의 꿈"에서는 "미처 들어올 틈도 없이 나 혼자 들어가"를 "미처 들어올[進] 틈도 없이 나 혼자 먼저[先] 들어가"로 수정해야만, 바로 뒤에 나오는 <논어>의 "선진(先進)" 편명과 어울려서 뜻이 통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일화를 한 편 고르라면 "갑지" 권6에 수록된 "교활한 서리의 간계"를 들고 싶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해도,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까지는 아님을 사실을 최근 들어 여러 가지로 절감하는 까닭인지, 어쩐지 유독 기억에 남은 일화가 되고 말았다:


복주의 늙은 서리인 하화라는 자는 치평연간(1064-1067)부터 서리로 일했고, 정화연간(1111-1118)에는 나이와 공로가 많다고 하여 관원이 되었으니, 시작부터 따지자면 무려 48년이나 일하였다. 한 번은 자신이 복주의 여러 무관을 모셨는데, 우리 서리들에게 휘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곤 오직 두 사람뿐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정사맹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나기(羅畸)였다.


나기는 매우 주도면밀해서 처음에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후에는 역시 파고들 만한 틈이 있었다. 나기는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그 의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진정 소득이 있으면 아주 기뻐하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반면 뜻을 깨닫지 못하면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렸다. 서리들은 그가 길게 휘파람을 불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문서를 들고 들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비록 교묘한 속임수가 숨겨져 있더라도 대충 보고 묻지 않아 통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엔 조그만 거짓이나 사기라도 적발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기를 속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하화가 말하길,


"저 사람은 독서를 좋아하는데도 우리에게 당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이견지 갑지> 1권, 2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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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헌트의 <무엇이 역사인가>를 완독했다. 저자는 이 분야의 원로라고 알고 있는데 트럼프 시대를 맞아 역사와 거짓말에 관한 설명으로 시작한 이 개론서는 아쉽게도 저자의 명성에 버금갈 만한 통찰까지는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보통 원로 학자가 말년에 개론서를 쓰면 내용은 두말할 것 없고 몇 가지 일화만 가지고도 충분히 깊은 인상을 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기대가 컸던 까닭인지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런 것을 찾기 힘들었다.


그 만만찮은 가격에 비하자면 책의 내용도, 분량도, 심지어 편집도 영 충실하지는 않고 문자 그대로 얄팍했다고나 할까. 쓸데 없이 병기한 영어 단어는 종종 철자가 틀려먹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혼동하는가 하면 6년과 60년을 혼동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13,000원이라는 정가도 알고 보니 1,300원을 잘못 적은 것이었을 수 있겠는데, 지금의 꼬락서니를 보자면 그조차도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나올 법해 보인다.



[*] 무슨 책이 나와 있나 보니 <인권의 발명> 빼고는 다 갖고 있는 셈인 것 같은데, 실제로 읽은 책은 <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와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뿐인 것도 같다.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는 예전에 누가 바깥양반 통해서 빌려달라고 청해서 빌려줬던 것도 같은데 돌아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책이 많아서 그런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이제는 있는 책도 없는 줄 알고, 없는 책도 있는 줄 알고,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아니,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이 아니라 <피임의 역사>였나? 아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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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샵을 뒤적뒤적 하다 보니 그 사이에 의외로 체스터튼 책이 여럿 번역되었기에 뭐가 있나 클릭클릭 하다가 북스피어에서 나온 번역서를 아직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그 시리즈에서도 엘러리 퀸 같은 것은 영 번역이 엉망이다). 마침 알라딘에 중고가 있어서 다른 책 구입할 때 슬그머니 섞어서 구입해 펼쳐 보니, 맨 앞에 "성공과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책의 오류"와 "부의 숭배"라는 에세이가 등장한다. 전자는 "모자 쫓기"와 함께 예전 을유 세계문학전집의 <영미수필선>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후자는 이번에 처음 읽는 듯하다.


두 가지 에세이 모두 "성공론"이나 "부자 되는 법" 같은 자기계발 서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성공이라는 것 자체가 기준부터 모호하고, "성공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식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결국 부와 탐욕을 신비화하며 사람을 속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이런 표현을 선호한다면, 성공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이 성공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이 무엇일 뿐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백만장자는 백만장자이기에 성공했고, 당나귀는 당나귀이기에 성공했다.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은 살아 있기에 성공했다."(22쪽)


물론 시대가 많이 달라졌으니 체스터튼의 일갈도 지금 와서 고스란히 적용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부와 성공을 노골적으로 바라는 것이 일반화된 세상에서 사라진 가치를 환기시킨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백 년 전에는 근면한 견습공에 대한 이상이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열심히 일하면 모두 시장이 될 수 있다고 배웠다. 이는 거짓이었지만 고결했고, 일말의 도덕적인 진실도 품고 있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절제는 가난한 이가 부유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이가 자신을 존중하게 되는 데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30-31쪽)


사람마다 각자의 상황이 다를 터이니, 어떤 한두 가지 조언을 만사에 적용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체스터튼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높이뛰기 금메달리스트가 줄 수 있는 조언이라고 해야 '힘껏 달리고, 높이 솟구치라'는 정도의 일반론에 그치지 않을까. 그런데도 여기서 더 구체적인 조언을 바라며 땅 짚고 헤엄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심심찮게 보도되는 뉴스에서처럼 각종 투자 사기에 휘말려서 거액을 날리게 되는 터일 것이고 말이다. 체스터튼은 성공에 대한 조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지적했지만, 어쩌면 조언 자체는 유효하지만 실천이 어렵다고 봐야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체스터튼의 시대와 달리 최근에는 실제로 수십억과 수백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각종 "성공론"과 "부자 되는 법"을 저술하고 있는 모양인데, (벌써부터 수십 개씩 붙은 서평으로 미루어 보면) 그런 "찐" 부자들의 책도 딱히 새롭거나 특별한 조언을 담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물론 진짜 아이러니는 이런 평범한(?) 부자들이 책이며 강연으로 각종 비법을 공개하느라 바쁜 사이, 자수성가로 아예 재벌이 된 누군가는 정부 당국 조사에 불려다니느라 바쁘고, 또 누군가는 무슨 이유에선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는 점이겠지만 말이다.






[*] 체스터튼의 책을 사러 들어갔다가 "하와이대저택"이라는 광고 문구가 뜨기에 혹시 최근 화재가 벌어진 그 섬동네의 재건이나 건축에 관한 내용인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의외로 무슨 부자 출신 성공 강사의 책이라고 해서 살짝 김이 빠졌다. 올해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세이노의 가르침>도 신문 연재분을 살펴보니 조언 자체는 어딘가 옛 어른들 말씀과 별 차이 없는 것 같고, 뭐, 이 사람은 그렇게 살았나보다 정도의 느낌이라서 몇 개 살펴보다 말았는데, 그걸 금과옥조로 여기고 출간 전에 제본까지 해서 돌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예전에도 미네르바인가 뭔가가 있었지). 똑같은 말이라도 돈 없는 어른이 하면 꼰대의 라떼질이고 돈 있는 어른이 하면 불변의 진리인가 싶기도 했는데, 사실 누군가가 돈벌이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특질에서 비롯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즉 한두 마디, 또는 한두 권 설명으로 전수될 만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똑같은 교과서로 공부했는데 왜 누구는 1등 하고 누구는 꼴등 하느냐는 거다). 문득 예전에 홍대 앞 헌책방에서 누군가가 팔아치운 자기계발서 수백 권을 본 기억이 난다. 재테크를 하겠다면서 성공이며 부에 관한 자기계발서만 잔뜩 사서 읽다가 중도작파하고 팔아치웠다는 이야기를 주인으로부터 들은 다른 손님이 (아마도 항상 과학책만 찾아 다닌다고 해서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서 "과학 아저씨"로 통하던 중년 남성이 아니었나 싶은데) 혀를 차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결국 문자 그대로 '성공에 투자' 한 격이 아닐지" 하기에 그것도 제법 그럴듯한 평가로구나 싶었다. 어쩌면 지금 와서 온갖 "성공론"과 "부의 법칙"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도 비슷한 상황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막상 쓰고 보니 지난 달 카드값도 빵꾸난 나귀님이 할 말은 아닌 것도 같고 좀 그렇다.(클렘페러 박스 때문이야...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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