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매의 <이견지>를 완독했다. 원저의 5분의 1 분량인 "갑지"와 "을지"만 번역하고 주석한 것인데도 450페이지 내외로 네 권 분량이니 상당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학진 총서 중에서도 세창출판사 발간분은 유독 글자가 크고 행간이 넓으며 가격이 비싸서 전반적으로 분량 뻥튀기의 혐의가 짙다.(학고방 발간분도 마찬가지인데, 예전 소명출판 발간분으로 환산했다면 훨씬 더 짜임새 있는 편집이라서 쪽수가 훨씬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세간의 여러 이야기를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는 필기문학에 해당하고, 내용 중 상당수는 귀신이나 요괴나 저승에 관한 일화이므로 지괴문학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다만 청대의 <요재지이>나 <자불어>처럼 단편소설의 형태를 완전히 취하기보다는, 북송대의 <태평광기>에 총정리된 더 이전 시대의 지괴문학처럼 분량과 서술 모두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다 만 것처럼 살짝 미진한 느낌을 주는 일화가 대부분이어서, 딱히 아주 재미있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 번역본의 의의는 역주자의 말마따나 중국에서도 아직 백화로 완역되지 않은 책을 옮겼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문장이 어색하거나 뜻이 잘 통하지 않는 부분이 가끔 있다는 점은 아쉽다.(예를 들어 권4의 "호극기의 꿈"에서는 "미처 들어올 틈도 없이 나 혼자 들어가"를 "미처 들어올[進] 틈도 없이 나 혼자 먼저[先] 들어가"로 수정해야만, 바로 뒤에 나오는 <논어>의 "선진(先進)" 편명과 어울려서 뜻이 통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일화를 한 편 고르라면 "갑지" 권6에 수록된 "교활한 서리의 간계"를 들고 싶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공부를 많이 해도,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까지는 아님을 사실을 최근 들어 여러 가지로 절감하는 까닭인지, 어쩐지 유독 기억에 남은 일화가 되고 말았다:
복주의 늙은 서리인 하화라는 자는 치평연간(1064-1067)부터 서리로 일했고, 정화연간(1111-1118)에는 나이와 공로가 많다고 하여 관원이 되었으니, 시작부터 따지자면 무려 48년이나 일하였다. 한 번은 자신이 복주의 여러 무관을 모셨는데, 우리 서리들에게 휘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속일 수 없는 사람이라곤 오직 두 사람뿐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정사맹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나기(羅畸)였다.
나기는 매우 주도면밀해서 처음에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후에는 역시 파고들 만한 틈이 있었다. 나기는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그 의의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진정 소득이 있으면 아주 기뻐하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반면 뜻을 깨닫지 못하면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렸다. 서리들은 그가 길게 휘파람을 불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문서를 들고 들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비록 교묘한 속임수가 숨겨져 있더라도 대충 보고 묻지 않아 통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엔 조그만 거짓이나 사기라도 적발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기를 속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하화가 말하길,
"저 사람은 독서를 좋아하는데도 우리에게 당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이견지 갑지> 1권, 28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