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홍매의 <이견지>에 이어서 청 원매의 <자불어>를 읽기 시작했다.(번역서 제목은 무려 <청나라 귀신요괴전>인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자불어>로 적는다. <삼국전투기>도 아니고, 원...) <이견지>보다는 <요재지이>에 가까운 느낌이라서 재미있기는 한데, 막상 책을 펼쳐 서문을 읽자마자 첫 페이지에서부터 황당한 오류가 등장한다.
"괴, 역, 난, 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용혈(龍血), 귀거(鬼車) 등에 대해선 <주역> "계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23쪽) 그러면서 "귀거"를 각주에 네 줄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호랑나빗과에 속한 나비의 한 가지. 날개는 옅은 녹황색 또는 어두운 황색으로 검은 줄무늬와 얼룩얼룩한 무늬가 있다 (...) 학명은 Papilio xunthus."
그런데 문맥을 보면 "용혈"과 "귀거" 모두 앞 문장에서 말한 "괴력난신"의 사례라고 봐야 할 것 같으니, 각주에서 "용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라고 설명한 전자와 달리 후자만 실존하는 곤충의 일종이라고 무려 "학명"까지 들먹이면서 설명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 거다. 즉 "귀거"도 "용혈"처럼 상상의 물체라고 봐야 맞지 않을까?
구글링해 보니 "귀거"(鬼車)는 "귀조(鬼鳥), "구두조"(九頭鳥), "구봉"(九鳳)이라는 상상의 새, 즉 봉황의 일종을 가리킨다는 검색 결과가 줄줄이 나온다. 즉 <산해경>에서는 "구두조"로 나오고 <본초>에서는 "귀거"로 나온다니, 위의 문장에 나온 "귀거"도 이것이라고 해야 "용"과 "봉"을 나란히 언급하는 셈이어서 문맥에 어울리겠다 싶었다.
검색해 보니 출간 당시 <한국경제>에 게재된 서평에서는 의외로 이 대목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서언에서부터 '괴력난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지만 용혈(龍血: 용의 피)과 귀차(鬼車: 상상 속의 괴물 새) 등에 대해선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언급한 바 있다' 고 당당하게 밝힌다." 즉 "귀거"를 "귀차"로 바꾸어 인용한 것이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맨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책이 출간되고 나서 보도자료를 작성할 때에 "귀거/귀차"의 오류가 뒤늦게나마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책은 못 고쳐도 기사는 정확하게 내려고 시도했던 것일까? 하지만 보도자료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해도, 알라딘의 미리보기에는 여전히 "귀거"로 남아 있다는 점은 의아하다.
또 다른 가능성은 <한국경제> 서평을 작성한 기자가 "귀거"의 오류를 용케 파악하고 스스로 "귀차"라고 바꿔 적으면서 "상상 속의 괴물 새"라는 설명까지 알아서 덧붙였다는 것인데, 이전에도 다른 신문에서 고전 번역의 오류를 지적한 서평으로 인해 번역가와 기자 간에 한동안 설전이 벌어졌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것도 충분히 있음직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주역> "계사"의 해당 부분을 살펴보았더니, 결국에는 나비 "귀거"와 봉황 "귀차" 모두 잘못된 설명이었다. 즉 38괘 "화택규"(火澤睽)를 보면 "견시부도, 재귀일거(見豕負涂, 載鬼一車)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내가 가진 김인환 역본 <주역>에서는 이 부분을 "진흙을 뒤집어 쓴 돼지와 귀신을 실은 수레"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결국 <주역>에서는 한 단어 "귀거"(鬼車)가 아니라 "귀 + 거"(鬼 + 車)를 뜻하므로, 봉황도 아니고, 괴물 새도 아니고, 나비는 더더욱 아니며, 문자 그대로 "귀신 + 수레"라고 해석해야 맞다. 애초에 번역/편집/기사 작성 과정에서 저자가 말한 <주역>의 해당 내용이 무엇인지만 확인해 보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오류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물론 전체 내용을 좌우할 중대한 오류까지는 아니고, 각주 하나 틀렸다고 해서 <청나라 귀신요괴전>이 <청나라 나비채집기>로 바뀌는 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제목부터 굳이 "귀신요괴전"이라고 대놓고 선전하는 책이 막상 서문 첫 쪽부터 "귀신 + 수레"를 Papilio xunthus 나비로 오해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번역자/편집자가 작업 중에 귀신요괴에게 씌어 생긴 오류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겠다만... 결과적으로는 글항아리 출판사에 대한 불신만 한 겹 더 늘어난 셈이다. 책 내놓는 것만 보면 딱 내 취향인데, 무지 두꺼운 책을 무지 비싼 값에 팔면서도 편집은 순 엉터리라 오류가 속출하는 것을 보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