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설거지 하면서 틀어놓은 뉴스에 하버드 대학 총장이 최근 있었던 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때문에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와 난타를 당했다고 나온다. 일부 학생들이 이스라엘/유대인을 비난하는 수위 높은 발언을 내놓은 것이야말로 반유대주의가 아니냐며 한 의원이 유도 질문을 던지자, 이에 총장이 "문맥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슬쩍 빠져나가려다가 '당신, 완전히 반유대주의자 아니냐' 하는 식으로 트집을 잡혀 몰매를 맞는 모양이다.


귀로 듣기만 할 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화면을 보니 문제의 하버드 총장은 무려 흑인에 심지어 여자다.(그 학교 역사 368년 만에 흑인으로는 최초이고,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총장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름조차 클로딘 게이라서 진짜 동성애자라면 묘하겠다 싶었는데, 록산 게이의 사촌이라지만 그쪽 성향까진 아닌 모양이다.(나중에 SNL의 패러디에서도 하원의장이 "본인 이름 갖고 농담 하시려면 지금 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니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하다).


하버드 총장의 답변도 물론 그 자체로 틀린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보다는 더 멋진 답변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백인/여성 의원을 향해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당신이 내게 무리한 유도 질문을 던진 것이 인종차별이 아니듯이!' 라고 응수했어도 따끔한 일침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과거 베트남전 반대 시위 논란에서 '아이고, 정말! 애들이 한 일 가지고!'라며 일갈했다던 한나 아렌트의 말도 괜찮았겠고.(물론 자칫 엉뚱한 데로 또 불똥이 튈 수 있지만).


하지만 청문회 영상을 찾아 보니 현장 분위기가 꽤 살벌해서 방어적인 답변도 불가피했던 것 같다. 문제의 백인/여성 의원은 우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대학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가?'라고 질문하고, 곧이어 '인티파다, 즉 유대인 제거 선동은 반유대주의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즉 애초부터 하버드 총장이 흑인임을 감안하고 인종차별에서 반유대주의로 넘어가게 유도했던 셈인데, 결국 '김일성 개새끼 해봐!' 식으로 예/아니오 답변을 강요했으니 무례한 행동이다.


여하간 적절한 일침으로 뭐가 있나 궁리하다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것이라는 인용문이 떠올랐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 최근의 무력 충돌 사태에 적용할 만한 레비의 이스라엘 관련 발언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심지어 이 인용문에도 진실/거짓이 혼재된 기묘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흥미가 생겼다. 나도 <뉴요커>에 게재된 어느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2002년에 <뉴요커>의 한 필자가 프리모 레비의 전기에 대한 서평을 기고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라고 그 책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인용문은 레비의 발언에 타인의 발언이 뒤섞인 형태로 와전된 것이었다. 즉 나중에 이탈리아 학자들이 추적해서 밝혀냈듯이, 레비의 실제 발언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유대인이다"까지만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뒤에 나오는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인에게 유대인이다"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에 레비와 인터뷰를 행한 이탈리아 매체의 기자가 덧붙인 일종의 부연, 또는 논평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그 의견을 발언할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는 볼테르의 유명한 인용문이 실제로는 그의 발언이 아니라 그의 전기 작가가 창작한 요약에 불과했다는 것과도 유사한 와전 사례인 셈이다.


여하간 잘못 인용되었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지만, 레비의 말과 타인의 말이 뒤섞인 해당 인용문이야말로 오늘날의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한 마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선 하마스의 기습 공격과 무차별 살상 자체도 전쟁 범죄인 것은 맞지만, 그 근본 원인이 이스라엘 측에 있음을 감안해 보면 이후의 가자 지구 전투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전쟁 범죄를 정당화하기에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느 한쪽이 전적인 피해자 행세를 할 수는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이번 미국 대학의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둘러싼 논란은 보수 진영에서 극소수의 주장을 대다수의 주장인 듯 실제보다 과장한 면도 충분히 있어 보이지만, 여러 대학 총장의 입장/거취에 대해서까지도 압박이 나왔다는 점에서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정치적 공정성이니 문화적 다양성 같은 자칭 진보적 가치의 오/남용으로 온갖 불편러가 늘어나면서 눈치보기가 만연한 것은 한국 공교육에서나 미국 고등교육에서나 큰 문제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이 80년 가까이 누린 억울한 희생양/소수자의 특권적 지위도 이스라엘의 거듭된 실책으로 조만간 변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물론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이스라엘 국민은 별개라는 것이 유명한 "홀로코스트 산업" 비판의 핵심이지만). 자기 민족에게는 공감과 배려를 바라면서도 다른 민족에게는 억압과 외면을 일삼은 까닭에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대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닦는 셈이 되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 글을 써놓고 프리모 레비의 인용문 번역이 있나 궁금해서 서경식 책을 찾느라 며칠 묵히다 보니, 마침 다른 책에 가려 못 보고 넘어갔던 그 책을 바로 그 날에 저자 타계 소식이 들려오기에 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시에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라 했건만 이제는 '세월도 가고 나도 따라간다'는 느낌이 더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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