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새로 나온 책을 알라딘 첫화면에서 광고하기에 살펴보니, 표지에 들어 있는 저자 캐리커처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거칠다 못해 뭔가 어수선한 느낌마저 주는 과거 시인들의 얼굴과는 완전히 딴판이어서 마치 다른 시리즈 같은 느낌마저 주는데, 당연히 그린이가 달라진 까닭일 것이다.


구글링해 보니 이와 관련된 설명은 이미 10년 전 <동아일보> 기사 "문지의 얼굴이 다양해졌다"(2014년 1월 20일자)에 나와 있었다. 1977년 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 첫 권인 황동규 시집부터 캐리커처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무용평론가 김영태와 시인 이제하가 번갈아 담당하면서 이 시리즈의 상징처럼 자리잡았다.


그러다가 300번대 후반부터 그린이가 다른 캐리커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데, 나귀님이 뭔가 달라진 느낌을 확연히 받게 된 것은 2023년에 나온 <홈 스위트 홈>이라는 시집부터였다. 문지 시인선은 맞는데 뭔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기존의 크로키와는 딴판인 만화풍의 저자 캐리커처가 들어 있기에 세대차이를 느낀 거다!


최근에는 출판사 대신 저자가 직접 그린이를 선정하기도 하는 모양이고, 드물게나마 초판의 캐리커처가 재판에서 교체되기도 하는 모양인데, 최근 각광을 받는 소설가 한강의 유일한 시집이 그런 경우였다. 2013년에 나온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초판에는 원래 작가의 지인인 한국화가가 그린 캐리커처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재판의 캐리커처는 작가의 동생이 그린 것으로 교체되었는데,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책 표지의 저자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초판 캐리커처가 초상화 느낌이라 그 시리즈의 다른 표지화와 이질적이라는 지적을 출판사와 독자로부터 받아서라고 저자가 직접 해명했다.


초판은 사실적인 정면 얼굴 묘사인 반면, 재판은 측면 얼굴 윤곽만 나오고 눈코입은 사라진 것이 특징이다. 물론 더 단순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시리즈의 다른 표지화와의 유사성을 주장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혹시 저자나 지인이 첫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이 교체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기존 표지화와 너무 이질적인 초상화라서 곤란했다면 굳이 수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초상화의 수록이건 교체건 간에 결국 저자의 승인을 거쳤을 터인데, 작품이나 제목 선정에서 의견이 달랐어도 출판사보다는 작가가 최종 권한을 가질 터이니, 결국 캐리커처의 교체 역시 출판사보다 작가의 뜻일 수 있다.


풍경화와 달리 초상화는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오히려 불만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다. 유명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영국 정부로부터 선물받았지만, 노쇠한 모습을 너무 잘 묘사했다는 이유로 못마땅해 한 나머지 불태워버린 처칠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한강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자기 얼굴의 사실적 묘사가 싫었을 수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저자인지 지인인지 독자인지 출판사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해서 결국 교체한 캐리커처를 담은 초판본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는 오히려 희귀본 대접을 받는다는 점이다. 개정판이 나오면 초판 정보를 비공개하는 특성상 알라딘에서는 찾을 수 없지만, 중고샵에 판매가 150만 원에 올라온 매물이 있다!


여하간 나귀님이야 최근 나온 시집의 표지에 실린 만화 그림체 때문에 처음 인식한 변화이지만,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있었던 추세라니 나만 몰랐던 것인가 싶다. 물론 달라진 것은 표지화만이 아니어서 내용도 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나귀님이야 국내시를 평소 안 읽으니 이것도 편견이라면 솔직히 할 말은 없고...



[*] 그러고 보니 예전에 문지에서 절판 시집 재간행 시리즈인 문지시인선 R인가 하는 것을 간행하면서 유하의 <무림일기>를 내놓았기에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다가, 그 말미엔가 수록된 "기획의 말"을 읽으며 진저리를 친 기억이 난다. 그냥 '좋은 시집이 절판되었기에 아까워서 다시 냈다'고 하면 그만인데, 무슨 이유에서 현학적이다 못해 부조리하게까지 느껴지는 글을 이런저런 외국 문헌의 출처까지 줄줄이 거론하면서 여러 페이지에 걸쳐 적어 놓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시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의도 밤하늘에 별님과 달님이 맥주 마시며 노닥거린다는 황당무계한, 또는 터무니없게 발랄했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었던 어느 시의 한 구절을 수십 년 뒤까지 종종 떠올리는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요즘 시고 시론이고 간에 뭔가 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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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원전> 개정판이 나왔다기에, 항상 선명한 미리보기를 제공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들어가서 서문을 살펴보니 한 가지 이상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일반 독자를 위한 쉽고도 명확한 과학 해설의 사례로 이 책에 수록된 할데인의 에세이를 거론한 대목이다.


편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할데인은 그 에세이에서 동물의 크기를 설명하며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에 나오는 18미터 키의 거인 바울과 페간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넓적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므로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단 두 문단의 설명만으로 명확히 보여주었다"(14-15쪽)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번연의 작품에 나오는 거인의 이름이 "바울과 페간"이 아니라 "포프와 페이건"(Pope and Pagan)이며, 문자 그대로 "교황과 이교도"를 상징한다는 점이다. "바울"(Paul)은 오히려 신약성서의 사도 가운데 한 명인데,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악의 상징이라 잘못 썼는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사소한 실수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제깐에는 "출간 20주년 기념 컬러판 양장본 에디션"을 내놓았답시고 요란하게 광고하는 상황에서 구판에 있던 오류가 신판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오류는 단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점 역시 문제다.


서문에는 데이비드 보다니스가 "파스퇴르의 대중을 혐오하는 성향과 그가 밝혀낸 질병과 박테리아 사이에 관련성을 찾으려고"(25쪽) 했다는 설명도 있는데, 실제로는 "파스퇴르의 대중을 혐오하는 성향과 그가 밝혀낸 질병과 박테리아'의 관계' 사이에 관련성을 찾으려고"라고 번역해야 맞다.


즉 파스퇴르의 '대중 혐오 성향'(A)과 파스퇴르가 발견한 '질병과 박테리아의 관계'(B)가 있고, 보다니스가 (A)와 (B)의 '관련성을 찾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관계/관련성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니 윤문 과정에서 누락시킨 것이 아닐까 짐작되는데, 그렇게 되면 의미가 달라진다고 봐야 한다.


서문에서 가장 마음에 든 대목은 페미니스트의 과학 경시 풍조를 꼬집은 곳이었는데, 여기에도 오역이 있었다. 구판과 신판 모두 과학 저술가 에블린 팍스 켈러(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저서에는 "이블린 폭스 켈러"로 표기)를 가리켜 "가장 강경한 여권운동가 중 한 사람"(26쪽)이라고 옮겼다.


그런데 원문은 "가장 설득력 있는 페미니스트 비평가 중 하나"(one of the most cogent of the feminist critics)라는 뜻이다. 즉 컬러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그나마 말이 통하는 합리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에만 경도된 것이 아니라 과학의 가치도 역시나 중시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켈러가 "유전학자 바버라 맥클린톡의 자서전을 집필"(26쪽)했다고 나오는데, 원문에는 자서전이 아니라 "전기를 집필"(a biographer, 전기작가)했다고 나온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 책 <유기체와의 교감>의 부제도 "20세기 유전학 혁명의 선구자 바바라 매클린톡의 전기"이다.


인명 표기 중에서 가장 눈에 거슬린 것은 구판과 신판 모두 프랑스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의 이름을 영어식인 "헥터 베를리오즈"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음악에 투신하기 전에 잠시 의학을 전공했다는 이유에서 해부학 실습에 관한 회고를 골라 짧게 수록했기 때문이다.


소련 과학계를 말아먹은 것으로 악명 높은 "트로핌 리센코"도 구판에는 "트로핌 라이센코"라고 영어식으로 표기했던데, 신판에서 "헥터"가 그대로인 것으로 미루어 "라이센코"도 그대로이지 않을까 싶다. 자세히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이 정도이니, 도대체 뭐가 또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하간 절판본의 재간행이라니 반갑기는 하지만, 컬러 도판 추가 외에 문장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굳이 새로 살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중고도 많이 올라와 있으니, 저렴한 값에 하나 사도 내용 면에서나 오역 면에서나 큰 차이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와 유사한 책으로 앨런 라이트먼이 편저한 <과학의 천재들>이라는 것이 있는데, 제목을 잘못 지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 22편을 편역한 가치 높은 자료다. 즉 플랑크, 아인슈타인, 러더퍼드, 허블, 플레밍, 왓슨과 크릭 등의 논문을 전문이나 발췌로 수록해 놓았다.


여성 과학자로는 헨리에타 리비트와 바버라 맥클린톡의 논문도 들어 있다. 나귀님은 예전에 <코스믹코믹>이라는 만화를 보다가, 거기 나오는 두 주인공 펜지어스와 윌슨의 (아울러 간발의 차이로 노벨상을 놓친 디키의) 논문이 <과학의 천재들>에 수록된 것을 보고 좋은 책임을 알게 되었다.


<지식의 원전>을 읽고 나서, 비록 내용은 다양하지만 분량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는 느낌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과학의 천재들>을 보며 조금 더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아쉽게도 지금은 절판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인터넷 서점 예스24를 통해 중고를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신판은 번역자가 "지식의 원전 번역팀"이라고만 나오기에 뭐가 다른가 싶어 살펴보니 사실은 구판 번역자 그대로이고, 다만 그 사이 달라진 각자의 소속 단체명만 바꾼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광렬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미래기술연구본부에서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로 옮겼다.


정병기 박사는 동 연구원 재료연구부에서 차세대반도체연구소로, 이순일 교수는 아주대학교 분자과학기술학과에서 물리학과로 옮겼으며, 방금성 교수는 가톨릭대학교 수학과 앞에 "전"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으로 미루어 이미 은퇴한 모양이다. 박정수 박사와 김문영 번역가는 여전히 현역이다.


마지막으로 정경심 박사가 있는데, 신판에는 학위를 취득한 "애버딘대학교 영문학"이라고 표기했지만 구판에는 과거 근무지를 반영해 "전 서경대 영어과 정경심 교수"라고 했으니, 이번에는 "전 동양대 교양학부 정경심 교수"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도 그걸로 제일 유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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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번역본이 결국 간행되었다. 지난번에 북펀드를 진행한답시고 턱하니 내놓은 샘플에서 잘못된 부분이 여러 가지 눈에 띄기에 지랄발광 나귀님이 지적질을 했었는데, 그 이후에 출판사 관계자가 오류 지적에 대해 고맙다며 수정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래서 과연 제대로 고쳤나 궁금해서 생각날 때마다 확인해 보았는데, 북펀드와 국내도서 책 소개에 들어 있던 광고 문구의 오타("인류 역사에 큰 획은 그은 불후의 명작")조차도 며칠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대로여서 실망스럽더니만, 나중에 가서는 알라딘 국내도서에서 책이 완전히 사라졌다!


혹시 간행 자체가 취소된 것인가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만, 인쇄 사고로 인해 출간이 연기되었다는 설명이 출판사 SNS에 있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온 책이 이번에는 무슨 영문인지 일반 도서가 아니라 큰글자 도서로만 간행되어서 예약 구매자들이 당혹스러워하는 모양이다.


나귀님이 알기로 큰글자 도서란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특별 제작품이어서 판형도 크고, 가격도 비싸며, 일반 도서가 간행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간행된다. 비슷한 과학 고전인 <프린키피아>도 일반 도서는 정가 56,000원인데, 1년 뒤에 간행된 큰글자 도서는 상하 두 권 합쳐 78,000원이다.


그런데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일반 도서보다 큰글자 도서가 먼저 나왔으니 이상한 일이다. 혹시 인쇄 사고의 여파로 일반 도서 제작이 늦어지는 바람에 큰글자 도서만 판매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만약 그렇다면 일반 도서가 입고될 때까지 큰글자 도서도 판매를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여하간 일반 도서를 기다리다가 큰글자 도서를 받고 당혹스러워하는 구매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책과 글자가 너무 커서 오히려 읽기가 불편하다는 점이다. 가로세로가 19x26센티미터면 주간지로 익숙한 B5 판형인데, 문제는 미리보기를 토대로 환산하면 본문 활자 높이가 0.5센티미터라는 거다.


대략 15포인트 크기에 해당하니 웬만한 단행본에서는 속표지의 책 제목이나 장 제목을 표기하는 데에나 사용할 만큼 큰 글자인데, 어린이 그림책도 아니고 천문학에 대한 고전 번역서에 쓴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급기야 856페이지에 2킬로그램이나 되는 두껍고 무거운 책이 나오고 말았다.


지금 다시 확인하니 북펀드 당시부터 B5 판형이라고 공지했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애초부터 큰글자 도서로만 제작할 의도였을까?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을지 모르겠다. 현재의 미리보기만 살펴보아도 B5 판형보다는 오히려 그 절반인 46판형에나 어울릴 본문 형태가 아닌가.


차라리 책을 46판형으로 작게 만들던가, 아니면 B5 판형에 작은 활자와 많은 행수로 페이지를 줄였다면 불필요한 종이 낭비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구매자의 지적에 따르면 도판은 확대되지 않고 그대로라서 역시나 보기 불편하다니, 어디까지가 의도이고 어디부터가 실수인지 궁금하다.


나귀님으로서는 지난번 글에서 지적한 내용이 일부는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어색한 부분이 남은 것도 불만이다. 예를 들어 이두갑 교수의 글에서 플루타르코스가 인용한 지동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문장이 살짝 달라졌지만 여전히 주술호응이 이상한 상태고, 영어식 인명도 다 그대로이다.


<프린키피아>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지만, 이 정도의 과학 고전 번역은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하지만 출판사의 행보를 돌이켜보면, 애초부터 하자 있는 내용을 샘플로 내놓은 것부터 시작해서, 오류를 지적해도 수용하지 않는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따라서 제아무리 과학사의 고전이고 유일무이한 번역본이라 하더라도, 분노한 어느 구매자의 말마따나 지금과 같은 형태라면 개선될 때까지 구매를 유보하는 게 낫지 않을까? 출판사 말마따나 "인류 역사에 큰 획은 그은 불후의 명작"을 왜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만들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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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의 동업자인 투자가 찰리 멍거의 글을 엮은 책이 번역된 모양이다. 주식이나 투자와는 영 거리가 먼 나귀님도 그 이름은 알 정도이니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가. 심지어 이번에는 그 책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는데, 왜냐하면 제목이 무려 <가난한 찰리의 연감>이기 때문이다.


버핏의 서문에도 나왔듯, 이 제목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경제 분야의 책이니 저 유명한 식민지 지식인의 베스트셀러 시리즈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현명한 투자 관련 조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을 법하다. 


프랭클린이 간행한 책은 다가올 한 해의 주요 절기와 일출 및 조석의 변화 같은 기상 정보를 제공하여 향후 일정에 참고할 수 있게 만든 실용서였다. 영어로는 Almanac이고 우리말로는 '연감'이나 '책력'으로 옮기는데, 오늘날 가장 비슷한 것을 찾자면 매년 새로 사는 '다이어리'가 아닐까.


프랭클린은 이처럼 한 해 계획에 사용할 '다이어리'를 간행하면서 내용을 더 알차게 꾸미기 위해 창작 및 인용 금언을 군데군데 양념으로 첨가했는데, 특유의 재치 넘치는 내용 덕분에 본편보다 양념이 더 유명해지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733년부터 1758년까지 매년 개정판이 간행되었다.


연감 자체는 총26권에 달하지만, 거기서 프랭클린이 직접 쓴 내용이라야 사실상 서문과 금언뿐이기 때문에, 사반세기 분량을 엮어서 간행한 단행본조차도 아주 두껍지는 않다. 나귀님이 가진 번역본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장명혜 옮김, 동천사, 1994)도 신국판으로 290페이지에 불과하다.


이 번역본은 금언을 지나치게 의역해서 원문과 동떨어지게 만든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프랭클린이 쓴 서문과 금언과 기타 내용을 연도별, 즉 판본별로 배열했다는 점이 확실한 장점이다. 즉 주제별로 배열한 다른 번역본보다 더 원형에 가깝다.


최초인 1733년 연감의 서문에서는 명목상의 저자 리처드 손더스, 즉 '가난한 리처드'가 아내의 바가지를 견디지 못해 살림에 보태고자 연감을 편저했다고 설명하는데, 이듬해인 1734년 연감의 서문에서는 작년에 책이 잘 팔려 살림이 나아졌다 하며, 이후 저자의 근황이 매년 업데이트된다.


1733년 연감의 60가지 금언 중에는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 "말이 많으면 실천이 적다", "살기 위해 먹지, 먹기 위해 살지 말라" 등이 유명하고, 나중의 판본에는 "생선과 손님은 3일이 지나면 악취를 풍긴다"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같은 친숙한 금언도 등장한다.


찰리 멍거의 책에도 이와 유사한 금언이 있는지 궁금해 알라딘 미리보기를 살펴보았지만, 각종 서문과 약력과 회고만으로도 분량이 넘쳐서 그가 실제로 썼다는 글까지는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구매자들의 언급을 보면 이 책이 오래 전부터 이 분야의 고전으로 대접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다른 저자들의 성공 비법서를 보면서도 느낀 바이지만, 세상이 다 아는 '찐' 부자들은 경영 위기, 주가 폭락, 이혼 소송, 구치소 수감, 가족 및 동업자와의 갈등,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건사고로 분주한 상황에서 어째서인지 어중간한 부자들만 각종 비법을 설파하고들 있다.


물론 찰리 멍거 정도라면 확실히 '찐' 부자 축에 속한다 하겠고, 투자가로서의 명성도 대단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에 나온 책을 생전에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는 번역조차 못하게 했었다니, 대부분 한때의 유행에 불과한 각종 '부자들의 조언'과는 어딘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볼 때마다 매번 드는 생각은 과연 이런 '부자들의 조언'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체스터턴이 당대에 인기인 각종 '부의 복음'을 꼬집으며 지적했듯, 마치 '빨리 달려서 높이 뛰어오르면 된다'는 높이뛰기 선수의 조언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즉 아무리 훌륭한 조언을 마음에 새기더라도, 정작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의 1장에 나온 찰리 멍거의 약력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일단 그는 하버드 출신 변호사였고, 학부 시절에는 물리학을 공부했고, 공군 복무 시절에는 칼텍에도 다녔다.


숫자와 법률에 통달했으니 어마어마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이렇게 잘난 사람도 친구 겸 동업자 워런 버핏 옆에서 2인자를 자처하며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 했다는 점을 보면, 최소한 '겸손'이라는 나날이 보기 드문 미덕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간에 '가난한 찰리'는 가난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던 셈이고, 사실상 투자가로 성공하기 이전부터 넘사벽의 자질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니, 그의 책을 읽는 독자로선 뭔가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생각에 살짝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가난한 리처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1733년 연감의 서문에서는 돈 안 벌어오면 "서재의 책과 골동품"을 싸그리 불태워 버리겠다는 아내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애처롭게 호소하지만, 당시 식민지의 경제 여건상 사치품이었던 책이며 골동품을 잔뜩 보유한 지식인이 '찐' 가난뱅이일 수는 없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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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알라딘 중고매장에 필요한 책이 두 권이나 있어서 주문하려 했더니, 양쪽 모두 2만 원 미만이어서 꼼짝없이 배송료를 물게 생겼다. 각각 5천 원짜리 한 권과 7천 원짜리 한 권만 더하면 무료 배송이 가능하니 조금만 살펴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양쪽을 오가며 분야별로 살펴보는데, 이건 30분이 넘어도 살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는 책이 아예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용이 괜찮아 보이면 가격이 너무 비싸고, 반대로 가격이 적당해 보이면 품질이 중급 이하라, 어느 쪽도 선뜻 장바구니에 담아 주문할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뿐이다. 결국 일전에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다른 책과 함께 세 군데 매장에서 각각 한 권씩만 주문하고 말았다.


알라딘 중고 상품이 계속해서 '가격은 업, 품질은 다운' 추세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지랄발광하는 나귀님인데,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던 오늘과 같은 주문만 보아도 현재의 상황은 상당히 기묘한 데가 있어 보인다. 헌책방이라면 싼 맛에 여러 권 구입하는 것이 기본인데, 이제는 한 권을 구입하는 것마저 망설여지는 거다.


출판사에서도 책값을 점차 올리는 추세이다 보니, 새책의 절반 가격으로만 잡더라도 중고 상품 중에서 나귀님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묵직한 것들은 1만 원 대를 오락가락한다. 오늘처럼 1만 원대 중반의 책을 하나 구입하려면, 배송비를 지우려고 다른 책을 고르려 해도 여차 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바람에 3만 원에 육박하게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는 알라딘 중고매장이 끝도 없이 늘어나는 현재의 상황 때문에 점점 더 쓸 만한 책들이 한데 모이지 못하고 산재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늘처럼 늙은 나귀님 한 마리가 '책, 책, 사방에 책이 있지만 / 살 만한 책은 하나도 없었네' 하며 남의 결혼식장 앞을 서성이며 헌팅을 시도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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