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의 동업자인 투자가 찰리 멍거의 글을 엮은 책이 번역된 모양이다. 주식이나 투자와는 영 거리가 먼 나귀님도 그 이름은 알 정도이니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가. 심지어 이번에는 그 책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는데, 왜냐하면 제목이 무려 <가난한 찰리의 연감>이기 때문이다.


버핏의 서문에도 나왔듯, 이 제목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경제 분야의 책이니 저 유명한 식민지 지식인의 베스트셀러 시리즈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세상살이에 도움이 되는 현명한 투자 관련 조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을 법하다. 


프랭클린이 간행한 책은 다가올 한 해의 주요 절기와 일출 및 조석의 변화 같은 기상 정보를 제공하여 향후 일정에 참고할 수 있게 만든 실용서였다. 영어로는 Almanac이고 우리말로는 '연감'이나 '책력'으로 옮기는데, 오늘날 가장 비슷한 것을 찾자면 매년 새로 사는 '다이어리'가 아닐까.


프랭클린은 이처럼 한 해 계획에 사용할 '다이어리'를 간행하면서 내용을 더 알차게 꾸미기 위해 창작 및 인용 금언을 군데군데 양념으로 첨가했는데, 특유의 재치 넘치는 내용 덕분에 본편보다 양념이 더 유명해지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733년부터 1758년까지 매년 개정판이 간행되었다.


연감 자체는 총26권에 달하지만, 거기서 프랭클린이 직접 쓴 내용이라야 사실상 서문과 금언뿐이기 때문에, 사반세기 분량을 엮어서 간행한 단행본조차도 아주 두껍지는 않다. 나귀님이 가진 번역본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장명혜 옮김, 동천사, 1994)도 신국판으로 290페이지에 불과하다.


이 번역본은 금언을 지나치게 의역해서 원문과 동떨어지게 만든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에서 프랭클린이 쓴 서문과 금언과 기타 내용을 연도별, 즉 판본별로 배열했다는 점이 확실한 장점이다. 즉 주제별로 배열한 다른 번역본보다 더 원형에 가깝다.


최초인 1733년 연감의 서문에서는 명목상의 저자 리처드 손더스, 즉 '가난한 리처드'가 아내의 바가지를 견디지 못해 살림에 보태고자 연감을 편저했다고 설명하는데, 이듬해인 1734년 연감의 서문에서는 작년에 책이 잘 팔려 살림이 나아졌다 하며, 이후 저자의 근황이 매년 업데이트된다.


1733년 연감의 60가지 금언 중에는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 "말이 많으면 실천이 적다", "살기 위해 먹지, 먹기 위해 살지 말라" 등이 유명하고, 나중의 판본에는 "생선과 손님은 3일이 지나면 악취를 풍긴다"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같은 친숙한 금언도 등장한다.


찰리 멍거의 책에도 이와 유사한 금언이 있는지 궁금해 알라딘 미리보기를 살펴보았지만, 각종 서문과 약력과 회고만으로도 분량이 넘쳐서 그가 실제로 썼다는 글까지는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구매자들의 언급을 보면 이 책이 오래 전부터 이 분야의 고전으로 대접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다른 저자들의 성공 비법서를 보면서도 느낀 바이지만, 세상이 다 아는 '찐' 부자들은 경영 위기, 주가 폭락, 이혼 소송, 구치소 수감, 가족 및 동업자와의 갈등,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건사고로 분주한 상황에서 어째서인지 어중간한 부자들만 각종 비법을 설파하고들 있다.


물론 찰리 멍거 정도라면 확실히 '찐' 부자 축에 속한다 하겠고, 투자가로서의 명성도 대단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에 나온 책을 생전에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는 번역조차 못하게 했었다니, 대부분 한때의 유행에 불과한 각종 '부자들의 조언'과는 어딘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볼 때마다 매번 드는 생각은 과연 이런 '부자들의 조언'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체스터턴이 당대에 인기인 각종 '부의 복음'을 꼬집으며 지적했듯, 마치 '빨리 달려서 높이 뛰어오르면 된다'는 높이뛰기 선수의 조언과도 유사하지 않을까.


즉 아무리 훌륭한 조언을 마음에 새기더라도, 정작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의 1장에 나온 찰리 멍거의 약력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일단 그는 하버드 출신 변호사였고, 학부 시절에는 물리학을 공부했고, 공군 복무 시절에는 칼텍에도 다녔다.


숫자와 법률에 통달했으니 어마어마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인데, 이렇게 잘난 사람도 친구 겸 동업자 워런 버핏 옆에서 2인자를 자처하며 최대한 조용히 지내려 했다는 점을 보면, 최소한 '겸손'이라는 나날이 보기 드문 미덕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간에 '가난한 찰리'는 가난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던 셈이고, 사실상 투자가로 성공하기 이전부터 넘사벽의 자질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니, 그의 책을 읽는 독자로선 뭔가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생각에 살짝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가난한 리처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1733년 연감의 서문에서는 돈 안 벌어오면 "서재의 책과 골동품"을 싸그리 불태워 버리겠다는 아내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애처롭게 호소하지만, 당시 식민지의 경제 여건상 사치품이었던 책이며 골동품을 잔뜩 보유한 지식인이 '찐' 가난뱅이일 수는 없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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