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뒤적인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그의 어머니 시오도라 크로버에 대한 회고... 라고 쓰다가 혹시나 싶어 <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를 다시 펼쳐 보니 정작 그 내용은 없었다. 어제 함께 꺼냈던 다른 에세이집 가운데 하나에 섀클턴과 함께 들어 있었는데 여기 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나귀님은 그 딸보다 그 엄마 쪽을 더 먼저 책으로 접했다. 남편인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가 돌본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에 관한 논픽션을 아내가 썼는데, 그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ABE 전집의 축약본 <마지막 인디언>으로 기억하지만, 완역본이 창작과비평사의 제3세계총서로도 나왔었다.


두 여자의 모녀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더 나중의 일이었는데, 어려서부터 ABE와 ACE88 전집을 애지중지했던 친구가 어느 날 자기 방 책꽂이에 있는 <마지막 인디언>을 꺼내더니, 역자 해설에 나온 내용 중에서 '저자 시오도라의 딸 어슐러도 작가다' 운운 하는 대목을 지목하며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혀낸 것처럼 알려주어서였다.


그때까지 번역된 작품은 자유추리문고 <어둠의 왼손>과 ACE88 <매는 하늘에서만 빛난다> 뿐이었고, 당연히 인터넷도 없었던 상태였으니 '어슐러 르귄의 엄마도 작가였구나' 하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다가, 한참 뒤에야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의 저자가 바로 그 엄마이며, 어슐러 K. 르귄의 'K'가 바로 '크로버'의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펼친 르귄의 책에는 크로버 이야기가 없다고 하니... 다시 딴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면, 여하간, 이 책에서 이번에 유난히 흥미롭게 느껴진 글은 "내면의 아이와 벌거벗은 정치인"이라는 것이었다. 한동안 인터넷에 르귄의 창작이라며 돌아다니던 인용문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 윤색한 문장이었다는 이야기다.


문제의 인용문은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라는 것인데, 저자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문장을 쓴 적이 없어서 직접 책을 뒤지다가 결국 포기하고 답답한 마음을 자기 블로그에 표현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독자들이 그 출처로 보이는 르귄의 글(번역서에는 단편이라 오역했지만 실제로는 에세이다)을 찾아서 제보해 주었다.


알고 보니 르귄은 "나는 성숙이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가 죽어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린이가 살아남아서 된 것이 어른이다"라고만 썼는데, 나중에 명언 인용문을 수집하던 누군가가 위와 같이 윤색된 내용을 게시하며 일파만파로 유포되었으며, 심지어 르귄이 직접 인증했다는 허위 글까지 생겼다.


최근 논란이 되는 가짜 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문제는 이런 거짓 정보가 유포되기는 쉬워도 바로잡기는 어렵다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르귄도 2011년에 문제의 인용문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어 최초 게시자에게 삭제를 부탁했지만, 몇 년 뒤까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가짜 명언, 또는 출처 불명의 인용문의 사례는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크게 늘어나서 지금은 아예 그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전문 사이트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정체불명의 멋진 말을 즐겨 유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자기 SNS며 블로그를 남의 눈에 돋보이게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지, 그 사실 여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따라서 대중의 악의... 까지는 아니지만 무지와 허영과 속물근성 같은 일상의 악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온갖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와 엉터리 인용문을 사방에 퍼트린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가끔은 어떤 인용문이 집단 창작인지 집단 지성인지를 거쳐 더 근사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르귄이 질색팔색했듯 원래 의도를 왜곡한 헛소리가 된다.


얼마 전 나귀님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대해 쓰며 언급한 프리모 레비의 가짜 인용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유대인이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에게 유대인이다') 역시 해당 작가의 실제 발언에 전기 작가의 추가 발언이 덧붙으며, 마치 이 인용문 전체가 해당 작가의 발언인 것처럼 오해되어 유포된 사례였다.


흔히 '법정 스님의 개고기 반대 글'이라고 잘못 유포된 것 역시 '호주 시드니 정법사의 법전 스님'이라는 이가 불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옮겼고, 이후 그 내용이 유포되면서 '법전'이 '법정'으로 와전된 경우다. 현재 길상사 홈페이지에는 이를 바로잡은 게시물이 있긴 하지만, 불교 잡지 명칭을 여전히 잘못 적어놓고 있다.


때로는 악의라고는 없었던 황당무계한 농담조차 가짜 뉴스로 가공되어 두고두고 악명을 떨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언론인 H. L. 멩켄의 '욕조의 역사'이다. 1917년에 그는 장난삼아 욕조의 발명과 백악관 최초 도입 등에 관한 황당무계한 헛소리를 갖가지 인명과 지명과 날짜까지 자세히 곁들여 순수하게 창작해서 한 신문에 기고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미국 전역의 매체에서 관련 보도를 쏟아내는 등, 악의 없는 거짓말이 졸지에 기정사실화되기에 이르렀다. 10년 뒤에 멩켄은 '이거 다 거짓말인 것 아시죠?'라면서 욕조의 역사는 농담에 불과했다고 이실직고했지만, 수십 개 신문에 간행된 이 해명도 상황을 바로잡지는 못했다.


이 사건을 회고한 "진실 찬가"라는 글에 따르면, 멩켄은 거짓이 사실로 오해되고 진실이 허구에 굴복하는 상황을 지켜보며, "인간의 마음에는 본능적으로 허구를 추구하는 그 무엇이 있"(430쪽)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진실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꾸밈없는 진실은 주로 불쾌하고 전혀 위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431쪽)


"정상적인 사람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진실은 소수의 (...) 병적인 사람들의 열정이다. 지혜의 장에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 참으로 유쾌한 일련의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로부터 인간의 지식이라 불리는 것의 대부분이 생겨난다. 시로 시작된 것이 사실로 끝나고, 역사책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433쪽)


그렇다면 허구를 상상하고 서술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작가야말로 거짓의 유혹에 가장 취약할 수 있는데, 어쩌면 멩켄이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을 꾸며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을지 모르겠다. 물론 평소의 멩켄은 <편견집>이라는 저서 제목에 어울릴만큼 신랄하고, 냉소적이며, 우상파괴적이고, 독선과 아집을 조롱하는 글을 쓴 사람이었다.


멩켄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코니 윌리스의 단편 "내부 소행"에 등장한 그의 영혼만큼은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심령술사로 자처하며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 집단의 강령회에서 어쩌다 보니 진짜 멩켄의 영혼이 나타나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비유하자면 박정희를 불러내려는 강령회에 장준하의 영혼이 나타나 호통을 친 격이랄까.


물론 악의는 없었다지만 때로는 실없는 농담 한 마디가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의 정립이라는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니, 프로건 아마추어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멩켄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이건 르귄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에세이집을 뒤적이다 보니, "약간의 제안: 식물연민"이란 묘한 글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제목에서부터 스위프트의 반어적 풍자 전통에 충실한 글이지만, 혹시나 이런 암시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자칫 동물도 불쌍하고 식물도 불쌍하니 내친 김에 육식과 채식을 넘어서 이제 공기식만 하는 '오건'으로 나아가자는 저자의 주장을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라는 인용문처럼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도 없지 않아 보이기도 하니...





[*] 그나저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번역/편집이 엉망이다. "호머"와 "스나티슬라프 렘"처럼 자기네 출판사에서도 냈던 저자명을 잘못 표기한 경우부터 시작해서, 르귄이 5미터 밖에 있는 방울뱀을 쳐다보았다는 대목에서는 그 거리가 무려 "500미터"로 대폭 늘어나기까지 했다.(진짜로 500미터 밖에 있는 방울뱀을 맨눈으로 볼 정도면, 이 80대 할머니 자체가 외계인 아닌가?) 번역을 엉망으로 했더라도 편집을 제대로 했더라면 충분히 걸러낼 수 있는 오류였으니, 이래저래 자기네 대표 작가의 작품을 아무렇게나 내놓을 정도로 홀대한 출판사의 잘못을 책망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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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대에서 남녀 공학 전환을 둘러싸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니, 문득 어슐러 르귄이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자신의 여대 체험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에세이집을 오랜만에 뒤적여 보니, 기억과는 다른 내용이라 이번 사건에 굳이 갖다 붙이기는 곤란할 듯했다.


이 에세이집의 제목이 유래한 "당신의 여가 시간에"라는 글 도입부에서 르귄은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1951년도 졸업생 설문 조사 요청을 받았다고 밝힌다. 하지만 자기는 여성이라 래드클리프를 나와서 그간 동문 취급도 못 받았는데,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며 동문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하버드 특유의 오만이 아니겠냐고 꼬집는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 설립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남성에게만 개방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1879년에 여성 전용 래드클리프 대학을 자매 학교로 설립했다. 1999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었기에 문제의 설문 조사를 실시한 2010년에는 래드클리프 1951년도 졸업생 르귄도 하버드 동문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전까지는 아니었다는 거다.


나귀님이 래드클리프 대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남주가 하버드 다니고 여주가 래드클리프 다니면서 처음 만나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에서는 하버드-래드클리프라고도 언급하는 것을 보고 두 학교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가, 나중에야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자매 학교임을 알게 되었나 그랬다.


래드클리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헬렌 켈러일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가로는 거트루드 스타인, 바버라 터크먼, 에이드리언 리치, 앤 패디먼 등이 있고, 공상과학소설 분야에서는 "퍼언 연대기"의 저자 앤 맥카프리와 <시녀 이야기>의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가 각각 르귄의 동문 선배와 후배에 해당한다.


아쉽게도 르귄의 책에서는 여성 전용 대학에 다녔던 설움이라든지, 남녀 공학 전환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성토라든지, 키스 해링과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그래피티 화가의 작품에서 락카칠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의의에 대한 의견까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분노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있었다.


"분노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페미니즘 역시 분노를 무기로 삼았던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성 권리를 얻겠다고 그저 화를 내는 건 이제 딱히 효과가 없다."(214쪽) 페미니즘을 아기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분노와 짜증으로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부된 권리는 분노를 통해 강력히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는 권리를 잘 이행할 수 없다. 권리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215쪽) 예를 들어 미국의 낙태 찬반 논쟁에서도 지지자의 비폭력이 반대자의 폭력과 대조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분노가 그 효용을 넘어 계속되면 정의롭지 않아지고, 나아가 위험으로 바뀐다. 분노 자체를 목적으로 성장하고, 분노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겼다가는 목표를 잃고 만다. 분노는 적극적 행동주의 대신 퇴보, 집착, 복수, 독선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이다."(216쪽) 저자는 2000년대 초 미국 공화당의 모습이 딱 그랬다고 예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대중적 분노, 혹은 정치적 분노"(216쪽)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 다음,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분노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대뜸 남성 작가들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헤밍웨이를 보면 발로 걷어차고 싶고, 조이스를 보면 이가 갈리고, 필립 로스를 보면 화가 치솟는다나 뭐라나.


"내 분노의 원인은 질투나 부러움보다 공포라 해야 맞을 것이다. 헤밍웨이, 조이스, 로스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들이라면, 내가 정말 좋은 작가나 아주 존경받는 작가가 될 일은 전혀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 왜냐하면 나는 절대 그들과 같은 걸 써서 독자를 즐겁게 하고 비평가들을 흡족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0쪽)


물론 르귄이 언급한 남성 작가 세 명이 시대를 잘 만나서, 또는 독자와 비평가에게 영합해서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 남성 작가들인 그 세 명의 문학적 가치가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던 것이 뒤늦게 확인되어 문학사적 위상이 낮아진다 한들, 그 반대급부로 르귄의 위상이 올라갈 일까지는 없을 것이다.


혹시 르귄의 문학 자체가 남성 작가에 대한 열등감의 산물이라도 되는 걸까?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모험을 읽고 감동하여 <어둠의 왼손>을 썼지만, 정작 저 모험가가 남긴 한 마디에 '인간'이나 '남녀' 대신 '남자'만 들어 있다는 이유로 분노를 드러내고, 급기야 아문센을 앞선 여성 탐험대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까지 썼으니 말이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싸움에서건,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의 도플갱어 싸움에서건, 결국에는 상대방을 더 많이 의식하는 쪽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백인 남성 작가들의 성공이며 백인 남성 모험가의 한 마디에 사사로운 분노를 느꼈을 때부터 르귄의 문학은 패배를 자인했던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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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가, 바깥양반 책꽂이에 뭐 찾으러 갔다가 <해방신학>이 눈에 띄기에, 이건 또 언제 사다 놓았나 싶어 잠시 꺼내 뒤적여 보았다. 당연히 내가 살 만한 책도 아닌 데다, 헌책방에서 흔히 보이는 구판이 아니라 2000년대에 들어서 나온 개정판이어서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문득 바깥양반이 그 책의 저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페루 출신의 도미니크회 사제로 저 유명한 책을 통해 해방신학이라는 분야의 기초를 잡은 인물로 유명하다. 내친 김에 바깥양반 책장을 둘러보니 다른 번역서도 몇 권 눈에 띄었다.


<해방신학의 영성: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이성배 옮김, 분도출판사, 1987)는 몇 년 전엔가 누가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헌책방마다 수소문했던 절판본인데, 마침 적당한 가격에 두 권이 돌아다니기에 그 사람 것도 구해 주고 우리 것으로도 하나 더 구입해 두었다.


또 다른 절판본 <욥에 관하여: 하느님 이야기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김수복 & 성찬성 옮김, 분도출판사, 1990)은 의외로 알라딘 중고 매장에 한 권이 나왔기에 다른 책 살 때에 배송료 지우기 용도로 구입했는데, 알라딘에서는 저자가 "분도출판사 편집부 엮음"이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가만 보니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도 저자명 표기가 제멋대로여서, <해방신학>과 <해방신학의 영성>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라고 썼고, <욥에 관하여>는 "구스따보 구띠에레스"라고 썼다. 여전히 간행 중인 <해방신학>의 표기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이니, 그걸로 통일한 모양이다.


그의 대표작인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분도출판사의 대표였던 독일인 임인덕 신부의 회고록에 흥미로운 후일담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운동권 서적 대접을 받았던 문제작이지만, 원서 출간 당시에 교황청에서도 별다른 지적 없이 인가를 내주었을 만큼 무해하다 여겨지던 책이었다.


여하간 임인덕 신부도 별 문제 없으리라 여겨 계약했고, 다만 보수적인 대구교구에서 인가를 거부할 수 있으니 아예 서울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가를 받아서 간행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초판본을 당시의 관례대로 문공부에 보냈더니, 검열 과정에서 트집을 잡혀 판금될 위기에 처했다.


임인덕 신부의 말로는 "이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도 빵을 나눠줘야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빵을 나눠주기보다는 스스로 일하여 자기 빵을 만들 수 있게 하자"(162쪽)는 책이라지만, 독재에 반대하고 빈민과 땅을 공유하자는 등의 내용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나귀님도 이번 기회에 뒤적여 보니, '해방'에 대한 내용 못지않게 '신학'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서 딱히 균형을 잃었다고 볼 수는 없을 듯했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나자린>을 언급한 대목도 흥미로웠지만, 바슐라르를 "바셸라드"라고 오기한 것이 개정판에서도 여전한 점은 옥에 티였다.


문공부의 통보에 임 신부는 초판본 3천 부 가운데 대부분을 하룻밤 사이에 옮겨서 감춰놓고, 압수가 들어오면 이것뿐이라 발뺌하려고 수백 부만 남겨두었다. 다행히 실제 판금이나 압수 같은 후속 조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사리기 위해서 <해방신학>은 이때부터 몰래몰래 출고되었다.


오죽하면 재쇄를 찍을 때에도 판권에 초판이라 표기했는데, 자칫 트집을 잡힐 경우에는 초판본 재고를 판매했을 뿐이라고 오리발을 내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3천 부씩 14쇄까지 찍으면서도 여전히 "초판" 행세를 해서 "영원한 초판본인 <해방신학>이었다"(165쪽)는 것이 임 신부의 회고다.


독일 출신으로 히틀러 치하의 서적 탄압을 경험한 임 신부에게는 책을 검열하고 판금하는 관행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2020년에 타계했던 그가 최근의 게임 검열과 웹툰 검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직 만연한, 또는 부활한 검열 소식을 들으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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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펀드에 <구름 도감>이란 것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어린이용 그림책인 모양이다. 구름 좋아하는 나귀님이라서 관련서를 이것저것 사 모으기는 하지만, 생각만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아닌 듯하니 그림은 예쁘지만 일단 꼬맹이들한테 양보하는 게 낫겠다.


다만 북펀드 광고에 나온 샘플 페이지를 토대로 한 가지 지적하자면, "안개모양 층운" 페이지에 나온 '판구'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반고'라고 적어야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국 신화에 나온 거인 반고(盤古)를 중국어 발음대로 로마자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간 수집한 구름 관련서가 지금도 나오나 궁금해 검색해 보니 의외로 절판된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한 권으로 읽는 구름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름 사전>, <구름을 사랑한 과학자> 등이 그러했다. 조만간 보고 처분하려 했는데 아까우니 좀 더 갖고 있을까.


그래도 구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지 이후에도 구름 관련서가 의외로 많이 나왔다. 우선 구름감상협회의 대표라는 기상학자 개빈 프레터피니의 책이 세 종류나 나와 있다는 점이 신기하고, <구름물리학>이라는 전문 서적도 나와 있던데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뒤적여보고 싶다.


구름 책을 검색하다 보니 <땅에서 구름까지>도 나오는데, 이건 사실 자동차 공학 관련서이다. 언젠가 박완서 딸의 에세이에서 자동차 고치러 정비소 갔더니 그 책이 탁자에 놓여 있기에, 무슨 신앙 서적인가 궁금해 펼쳐 보니 공학 서적이라 당황했다는 일화가 나온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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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란마 1/2> 애니메이션을 새로 제작한 모양이다. 루미코의 개그 코드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나귀님이라 원작도 이미 전권 소장에 수차례 정주행한 데다가, 넷플릭스에서 <던전밥>과 <이세계 삼촌>을 재미있게 봤으니 과연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신작 애니메이션이 과연 어디까지 표현할지, 또 어디까지 용인될지가 새삼 걱정스럽기도 했다. 널리 알려졌듯이 원작 만화의 핵심은 저주로 인해 찬물에 닿으면 여자로 변하고 더운물에 닿으면 남자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이상 체질이다.


무술을 연마하느라 맨몸일 때가 많은 소년이 여자 몸으로 변하고서도 평소처럼 웃통을 벗고 돌아다녀 모두를 경악시키고, 화가 난 약혼녀의 옷을 빌려 입고서는 가슴이 꽉 끼고 허리가 헐렁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아 분노를 사는 등의 어이없는 상황이 웃음을 자아낸다.


사춘기 청소년의 성과 신체에 대한 호기심을 잘 활용했다는 평가부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와 크로스드레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잠재 코드를 찾아낼 수도 있는 작품인데,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구판 애니메이션이 불건전하다며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받기도 했다.


물론 여자로 변한 주인공의 가슴이 수시로 노출되고, 여자 속옷을 훔치고 다니는 변태 할아범도 나오니, 과연 일본 청소년 만화의 표현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도 사실인데, 과거에는 그저 웃기자고 만든 설정도 지금은 자칫 논란이 되기 쉽겠다.


그래서 넷플릭스의 <란마 1/2>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는데, 공개 이후에 유튜브에 올라온 분석 영상을 몇 가지 보니 구판 애니메이션에 비해 수위를 낮추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인 듯하다. 결국 일종의 검열이 작용하지 않았느냐 하는 불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왜 영상물에서 살인 묘사에는 관대한데 성 묘사에는 가혹한지 모르겠다는 누군가의 불만도 떠오르는데, 사실 현재의 검열은 그 자체로 모순점이 적지 않다. 단순히 미디어를 순화해서 인간을 교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검열 당국도 인간을 잘 모르고 있는 셈이다.


검열의 이런 모순이 가장 잘 드러난 최근의 사례는 경기도 교육청의 한강 작품 유해 도서 선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내용상 청소년에게 어울리지 않아서라고는 하지만, 바로 그 작가가 노벨문학상씩이나 수상했으니 경기도 교육청으로서도 상당히 머쓱하지 않겠나!


나귀님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된 한강의 소설은 상당히 기괴한 내용이라고 하니, 이쯤 되면 <올드보이>와 <기생충> 같은 해외 영화제 수상작과 묶어서 K-그로테스크라는 장르의 의의와 육성에 대해서도 한 번쯤 고찰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경기도 교육청의 한강 작품 유해 도서 지정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학 입시일 것이다. 아무리 유해 가능성 농후한 내용이라도 국내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니, 이쯤 되면 당장 올해 수능부터라도 문제로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가장 확실한 예상 문제라서 필독서로 지정해도 부족할 법한데 오히려 금지한다니, 당장 한 문제가 아쉬운 수험생은 물론이고 학부모도 불만 가득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차라리 교육부에서 한강 작품은 출제하지 않겠다고 미리부터 못을 박아 놓든가.


아이러니한 점은 오래 전부터 입시 문제에 사용된 필독서 중에도 청소년에게 유해해 보이는 내용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김동인의 "감자"인데, 한쪽은 원나잇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한쪽은 무려 성매매와 살인에 대한 내용이다!


'필독서'라는 명칭 자체도 의문이다. 언제부턴가 이른바 청소년 필독서 목록이 돌아다니던데, 수십 년 전에만 해도 없었던 풍조다. 문학평론가 김우창만 해도 <수레바퀴 아래서>가 필독서라는 것을 몰랐으며, 70세가 되어서야 처음 읽어보았다고 회고했을 정도이니까.


한편으로는 만초니의 <약혼자들>을 학교에서 필독서로 접하기 전에 읽어보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었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회고를 기억할 필요도 있다. 어찌 보면 필독서 지정이야말로 한 작품을 순수하게 읽지는 못하게 만드는 족쇄일 수도 있을 테니.


한강 작품의 유해 도서 논란을 계기로 문화 전반의 검열 문제도 생각해 볼 만하겠다. 최근 화제가 된 게임 분야 국정 조사에서 나온 누군가의 발언처럼, <오징어게임>이 진짜 게임이었다면 제작자가 에미상 수상은커녕 구속되었을 것이라는 일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정부 주도의 검열이 없어지더라도, 온갖 불편러에 의한 인민재판식 검열은 계속될 것이고, 어쩌면 이쪽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으니 과연 실효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수능이라고 한다. 과연 한강 문제는 나올 것인가 안 나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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