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덕여대에서 남녀 공학 전환을 둘러싸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접하고 나니, 문득 어슐러 르귄이 에세이 가운데 하나에서 자신의 여대 체험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라는 에세이집을 오랜만에 뒤적여 보니, 기억과는 다른 내용이라 이번 사건에 굳이 갖다 붙이기는 곤란할 듯했다.
이 에세이집의 제목이 유래한 "당신의 여가 시간에"라는 글 도입부에서 르귄은 하버드 대학으로부터 1951년도 졸업생 설문 조사 요청을 받았다고 밝힌다. 하지만 자기는 여성이라 래드클리프를 나와서 그간 동문 취급도 못 받았는데, 이제 와서 태세 전환하며 동문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하버드 특유의 오만이 아니겠냐고 꼬집는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 설립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남성에게만 개방되었으며, 그 대안으로 1879년에 여성 전용 래드클리프 대학을 자매 학교로 설립했다. 1999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었기에 문제의 설문 조사를 실시한 2010년에는 래드클리프 1951년도 졸업생 르귄도 하버드 동문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전까지는 아니었다는 거다.
나귀님이 래드클리프 대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러브스토리> 때문이다. 남주가 하버드 다니고 여주가 래드클리프 다니면서 처음 만나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에서는 하버드-래드클리프라고도 언급하는 것을 보고 두 학교가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가, 나중에야 한 재단에서 운영하는 자매 학교임을 알게 되었나 그랬다.
래드클리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헬렌 켈러일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가로는 거트루드 스타인, 바버라 터크먼, 에이드리언 리치, 앤 패디먼 등이 있고, 공상과학소설 분야에서는 "퍼언 연대기"의 저자 앤 맥카프리와 <시녀 이야기>의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가 각각 르귄의 동문 선배와 후배에 해당한다.
아쉽게도 르귄의 책에서는 여성 전용 대학에 다녔던 설움이라든지, 남녀 공학 전환의 폭력성과 비인간성에 대한 성토라든지, 키스 해링과 장미셸 바스키아 같은 그래피티 화가의 작품에서 락카칠이 차지하는 미술사적 의의에 대한 의견까지는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분노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은 있었다.
"분노에 관하여"에서 저자는 페미니즘 역시 분노를 무기로 삼았던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성 권리를 얻겠다고 그저 화를 내는 건 이제 딱히 효과가 없다."(214쪽) 페미니즘을 아기에 비유하자면, 처음에는 분노와 짜증으로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 단계를 넘어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부된 권리는 분노를 통해 강력히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는 권리를 잘 이행할 수 없다. 권리는 집요하게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215쪽) 예를 들어 미국의 낙태 찬반 논쟁에서도 지지자의 비폭력이 반대자의 폭력과 대조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했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분노가 그 효용을 넘어 계속되면 정의롭지 않아지고, 나아가 위험으로 바뀐다. 분노 자체를 목적으로 성장하고, 분노 그 자체를 가치 있게 여겼다가는 목표를 잃고 만다. 분노는 적극적 행동주의 대신 퇴보, 집착, 복수, 독선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이다."(216쪽) 저자는 2000년대 초 미국 공화당의 모습이 딱 그랬다고 예시한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대중적 분노, 혹은 정치적 분노"(216쪽)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 다음,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사사로운 분노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대뜸 남성 작가들에 대한 열등감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헤밍웨이를 보면 발로 걷어차고 싶고, 조이스를 보면 이가 갈리고, 필립 로스를 보면 화가 치솟는다나 뭐라나.
"내 분노의 원인은 질투나 부러움보다 공포라 해야 맞을 것이다. 헤밍웨이, 조이스, 로스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들이라면, 내가 정말 좋은 작가나 아주 존경받는 작가가 될 일은 전혀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 왜냐하면 나는 절대 그들과 같은 걸 써서 독자를 즐겁게 하고 비평가들을 흡족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0쪽)
물론 르귄이 언급한 남성 작가 세 명이 시대를 잘 만나서, 또는 독자와 비평가에게 영합해서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 남성 작가들인 그 세 명의 문학적 가치가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었던 것이 뒤늦게 확인되어 문학사적 위상이 낮아진다 한들, 그 반대급부로 르귄의 위상이 올라갈 일까지는 없을 것이다.
혹시 르귄의 문학 자체가 남성 작가에 대한 열등감의 산물이라도 되는 걸까?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모험을 읽고 감동하여 <어둠의 왼손>을 썼지만, 정작 저 모험가가 남긴 한 마디에 '인간'이나 '남녀' 대신 '남자'만 들어 있다는 이유로 분노를 드러내고, 급기야 아문센을 앞선 여성 탐험대에 대한 대체 역사 소설까지 썼으니 말이다.
포퍼와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싸움에서건,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의 도플갱어 싸움에서건, 결국에는 상대방을 더 많이 의식하는 쪽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백인 남성 작가들의 성공이며 백인 남성 모험가의 한 마디에 사사로운 분노를 느꼈을 때부터 르귄의 문학은 패배를 자인했던 것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