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엔가, 바깥양반 책꽂이에 뭐 찾으러 갔다가 <해방신학>이 눈에 띄기에, 이건 또 언제 사다 놓았나 싶어 잠시 꺼내 뒤적여 보았다. 당연히 내가 살 만한 책도 아닌 데다, 헌책방에서 흔히 보이는 구판이 아니라 2000년대에 들어서 나온 개정판이어서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문득 바깥양반이 그 책의 저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최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페루 출신의 도미니크회 사제로 저 유명한 책을 통해 해방신학이라는 분야의 기초를 잡은 인물로 유명하다. 내친 김에 바깥양반 책장을 둘러보니 다른 번역서도 몇 권 눈에 띄었다.
<해방신학의 영성: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이성배 옮김, 분도출판사, 1987)는 몇 년 전엔가 누가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헌책방마다 수소문했던 절판본인데, 마침 적당한 가격에 두 권이 돌아다니기에 그 사람 것도 구해 주고 우리 것으로도 하나 더 구입해 두었다.
또 다른 절판본 <욥에 관하여: 하느님 이야기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김수복 & 성찬성 옮김, 분도출판사, 1990)은 의외로 알라딘 중고 매장에 한 권이 나왔기에 다른 책 살 때에 배송료 지우기 용도로 구입했는데, 알라딘에서는 저자가 "분도출판사 편집부 엮음"이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가만 보니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도 저자명 표기가 제멋대로여서, <해방신학>과 <해방신학의 영성>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라고 썼고, <욥에 관하여>는 "구스따보 구띠에레스"라고 썼다. 여전히 간행 중인 <해방신학>의 표기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이니, 그걸로 통일한 모양이다.
그의 대표작인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분도출판사의 대표였던 독일인 임인덕 신부의 회고록에 흥미로운 후일담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운동권 서적 대접을 받았던 문제작이지만, 원서 출간 당시에 교황청에서도 별다른 지적 없이 인가를 내주었을 만큼 무해하다 여겨지던 책이었다.
여하간 임인덕 신부도 별 문제 없으리라 여겨 계약했고, 다만 보수적인 대구교구에서 인가를 거부할 수 있으니 아예 서울교구의 김수환 추기경에게 인가를 받아서 간행했다고 전한다. 곧이어 초판본을 당시의 관례대로 문공부에 보냈더니, 검열 과정에서 트집을 잡혀 판금될 위기에 처했다.
임인덕 신부의 말로는 "이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도 빵을 나눠줘야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빵을 나눠주기보다는 스스로 일하여 자기 빵을 만들 수 있게 하자"(162쪽)는 책이라지만, 독재에 반대하고 빈민과 땅을 공유하자는 등의 내용이 당국의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나귀님도 이번 기회에 뒤적여 보니, '해방'에 대한 내용 못지않게 '신학'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서 딱히 균형을 잃었다고 볼 수는 없을 듯했다.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나자린>을 언급한 대목도 흥미로웠지만, 바슐라르를 "바셸라드"라고 오기한 것이 개정판에서도 여전한 점은 옥에 티였다.
문공부의 통보에 임 신부는 초판본 3천 부 가운데 대부분을 하룻밤 사이에 옮겨서 감춰놓고, 압수가 들어오면 이것뿐이라 발뺌하려고 수백 부만 남겨두었다. 다행히 실제 판금이나 압수 같은 후속 조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사리기 위해서 <해방신학>은 이때부터 몰래몰래 출고되었다.
오죽하면 재쇄를 찍을 때에도 판권에 초판이라 표기했는데, 자칫 트집을 잡힐 경우에는 초판본 재고를 판매했을 뿐이라고 오리발을 내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3천 부씩 14쇄까지 찍으면서도 여전히 "초판" 행세를 해서 "영원한 초판본인 <해방신학>이었다"(165쪽)는 것이 임 신부의 회고다.
독일 출신으로 히틀러 치하의 서적 탄압을 경험한 임 신부에게는 책을 검열하고 판금하는 관행이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2020년에 타계했던 그가 최근의 게임 검열과 웹툰 검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아직 만연한, 또는 부활한 검열 소식을 들으면 또 어떻게 생각할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