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노트북
제임스 A. 레바인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해가 지면 가을 바람이 분다. 오후 내내 낮은 비행을 하던 새들이 기어코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피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싱크대 앞에 선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컵에 우유를 붓고는 데우려다 바깥 공기와는 다르게 열이 오르려는 몸을 식히려, 커피 두 봉을 탈탈 털어 얼음 가득 냉커피를 탄다. 저녁 식사 후, 배가 부르지않음에 맥주 한 캔을 들이킨 탓이리라. 무릎 위에 베개를 얹고 그 위에 책을 올려 읽던 부분을 체크해 둔 책갈피를 걷어낸다. 어린 창녀, 바툭이 오롯이 그곳에 서 있다. 그녀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뭄바이라는 곳의 사창가에 버려진, 달리 운명을 어쩌지 못해 살아가고 견뎌내는 바툭의 이야기. 몇 차례, 그녀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름을 문질렀다. 그러면 좀, 그녀의 삶이 나아질까. 그러면 좀, 그녀가 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그러면 좀, 안타까운 마음들을 추스릴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음에도 여러차례 문질러댄다.     

 

 바툭, 그 어린 창녀는 자신이 치뤄내야하는 성행위를 달콤한 케이크를 굽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결단코, 그 달콤한 케이크로 비유한 바툭의 일은 개개인이 갖는 투철한 직업 정신도 아니요, 이상적인 꿈도 아니다. 세상 어느 누가 평생을 욕정의 그늘 아래 굴복되어지는 삶을, 꿈꾸겠는가. 뭄바이의 커먼가, 초록색 커튼이 쳐진 쇠창살의 방에 바툭, 어린 소녀가 산다. 그리고 푸른 노트에 글을 쓴다. 지나온 과거와 살아가는 생, 그리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적어내린다. 글을 쓰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빼앗기고 산산히 무너져내린 자신의 삶을 겹겹이 두르고 둘러 온전히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사살하 듯, 필사적으로, 그렇게.

 

나는 분명하고 명확한 존재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똑같은 방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는 달콤한 케이크를 만드는 존재일 뿐 다른 어떤 존재도 아니다.

나는 음식을 먹고, 호흡을 하고, 달콤한 케이크를 굽기 위해 몸을 움직일 뿐이다. p. 231.

 

 아버지의 손을 잡고 뭄바이로 건너오던 바툭의 삶은 어두운 계단을 오르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을 보는 순간 깨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 케이크를 굽고는 (아동 성폭력, 즉 강간이지만 그녀의 비유를 따른다.) 제 스스로 소멸해버리듯 증발해버린다. 정체성의 증발, 존재의 증발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증발한다. 생에 대한 체념, 포기하여 받아들이는 의지력 잃은 삶이 시작된 것이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고아원을 거쳐 커먼가로 돌아오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년, 소녀들을 만나 비열한 평화로움속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권력. 휘황찬란한 호텔에서 바툭의 삶은 처절하게 무너져내린다. 순간, 바툭이 바라고 또 바랐던 일은 두 팔을 옥죄던 손도 아니요, 가슴위를 누르던 몰상식한 힘도 아니요,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미던, 그, 그, 치욕스러움도 아니요, 단 하나, 오로지, 이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 하나. 다만, 그 작은 바램 하나 뿐이었을텐데.

 

 스스로의 위선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위선을 넘어서려는 사람은 과연 타인에게 어떠한 상처를 아로새기는 것일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새하얀 시트위에 상체를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어린 여자, 검푸른 멍자욱이 눈 밑을 드리우고 짙은 달 밝은 어둠이 걷히어 해가 떠오르기를, 바라는, 어린 소녀가 표지에 스러지듯 누워있다. 바툭, 뿐만이 아니리라. 타자기에 올려진 손가락이 단어를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 아픈 그 모든 영혼들이 구원되어지기를. 그 맑은 영혼들, 부디 머리카락 한 올 다치는 일 없기를. 감히, 염원해 본다.

 

내가 가는 길이 비참하다고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판단은 편견이 드리우는 그늘이다. p.284.

 

 체념이었다고, 말해두어도 괜찮을까.

 아무리 손을 뻗어보아도, 아무리 발길질을 해 보아도, 잡아주는 이가 없어, 닿는 곳이 하나 없어 그저 무너져내리는 자신과 마주하는 일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없어 진작에 미래 없는 삶을 택해 타락했노라고, 그것만이 그동안과, 현재를 견디게 해 주는 원초적인 체념에서 온 것이라고 .. . 조그마한 목소리로 기침을 해대며 못내 뱉어내지 못한 가래 끓은 바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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