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장화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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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이런점을 좋아했던 거다. 곤란해하는 구석.

말이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구석.

 

어째서일까. 어째서 이 사람은 내 말을 이렇게 곧이곧대로 믿는걸까.

말은 통하지 않는데, 어째서, 무엇을, 믿어버린 걸까.

 

 

 

 

날은 맑고 부는 바람만큼이나 스산한 계절이 농염한 꽃씨들을 흩뿌린다. 그리고 어제는, 민들레꽃씨가 곰살맞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뭉텅뭉텅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보자니 영화 '공기인형'의 마지막 장면이 문득 떠오르다 말았다. 결혼 십년차의 히와코와 쇼조의 이야기. 무슨 이야기? 스스로에게 묻다가 히와코처럼 쿡쿡 웃어본다. 대관절 히와코는 누구이고 쇼조는 또 누구인가. 싱그러운 연인사이인가 결혼한 부부사이인가 그것도 아니면 공황상태의 활주로에 놓인 거추장스러운 돌덩이들인가. 다시, 히와코처럼 쿡쿡.

 

믿을진 모르겠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히와코에게서 까닭없는 동질감에 난데없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쉴새없이 끊어지는 맥락을 억지스레 부여잡으며 한숨을 토해내 듯 마지막장을 덮을 수 있었다. 쇼조에게 있어 불가항력적이었던 히와코의 움직임과 생각들, 꾸미지않고 유난스럽지않고 적당한 수다스러움과 소란스럽지않던 마음의 분열까지-물론, 쇼조 앞에서만의 히와코의 모습. 그러니까 남편 앞에서의 아내의 모습-나를 보는 듯 해, 더운 바람이 불던 늦은 밤에도 무릎 끝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몇 번이나 땀이 찬 손으로 쥐었었는지. 그리고 그이를 힐끔거리기를 몇 번. 실로,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나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데운 우유를 단박에 들이켰다. 신경질적으로.

 

맹목적인 사랑을 담뿍담은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내쳤을 작품이었음을 알고있다. 허무맹랑하고 무미건조함에 소금이라도 치고 싶었던 히와코와 쇼조의 결혼생활이 정녕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건지 아니, 좀 더 진부하게 따져 묻자면 행복하기는 한건지 사랑이 존재하기는 한건지. 외출시에 끼던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린 결혼반지가, 널부러진 남편의 빨랫감 따위가 주는 안식이, 타인과의 마주함과 견주어 불현듯 그려지는 쇼조에대한 이유없는 그리움의 정체들이 진정으로 히와코라는 여자를 지탱해주는 것인지, 너무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던 쇼조의 색깔없고 화딱지나던 '응', '아니' 식의 단조로움도 이해 할 수 없을뿐더러 용서조차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 쇼조를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려대던 히와코의 마음도 납득할 수 없다.

 

여자에게 있어 결혼이란 보이지도 않는 환상에 사로잡힌 채 비극도 희극도 아닌 로맨스의 결말로 치닫고 싶은 욕망과도 같은 염원이라 생각한다. 작가도 인간인지라 그 간사함이 허구와 맞물리지 않을 수 없다는 백프로의 믿음으로 감히 이야기하자면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결혼생활이 '빨간장화'의 지반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자니 퍼뜩 까무러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쇼조의 역할이 그녀 자신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거침없이 해보는 바, 무례를 범한다.

 

가볍다 못 해 실수로 떨어트려 깨어져 활자들이 나뒹군다해도 아무렇지 않을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다소 실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테지만 군더더기없고 불필요한 수식들이 붙지않은 가슴에 멍들지않을 소설임을 인정한다. 책장 어느곳을 펼쳐도 그곳이 시작이 되어 문제없이 읽어내려 갈 수 있으며 히와코의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가 급작스레 튀어나온다해도 쇼조의 시건방진 태도와 같이 왜 웃느냐 한 번 묻고나면 이 또한 스스럼없이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이란 여자의 무덤이라 누군가 내게 말했던 적이 있다. 나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내 그이는 내가 그리 생각하는 것을 못마땅하기에 내게 적정수위의 자유를 선사한다. 넌덜머리나는 현실감에 몸부리치는 것을 제외한다면 앞으로도 함께 살 의향이 있다. 살가운 자상함만으로도 그이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야말로 단 1%의 희망앞에서도 좌절할 수 없는 여자의 농밀한 감정이 아닐까. 그래서 히와코도 쇼조의 곁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표현하지않고 말하지않아도 자신이 쇼조에게 아낌을 받고 지켜내야 할 존재로 여긴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채색의 결혼생활을 견디게하고 살고싶어지게 만드는 그것. 숨은 진실을 명백하게 보지 않으려는 이기심과 무관심과 득도 실도 되지 않을 안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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