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만났다 - 난공불락

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글을 읽으면서.. 글 자체에 이렇게 감탄하며 읽은 적이 참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라면 또 모를까..시의 특성이 비유와 함축이니 말이다. 산문임에도 비유와 함축으로 가득찬 박지원의 문장을 정민선생의 곡진한 해설이 없었다면  우걱우걱 삼키다가 탁 체해서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일대일로 거장 연암을 대해보고 싶었는데, 정민선생을 저쪽 한 켠에 모셔두고 싶었는데 아직은 안되겠다. 통역사 선생을 멀리하기엔 나의 독서와 생각의 미침이 너무 짧다.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

글은 구불구불 험난한 산길을 가는 것처럼 어렵게 읽히기도 하고 탄탄대로처럼 그 의미가 분명해져서 머리가 환해지기고 하고, 다시 안개를 만난 듯 흐릿해지기도 하고 , 머리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청량음료를 마신 듯 기분 좋게도 한다. 그야말로 종횡무진 어지럽기도 하지만, 죽비소리를 듣는 듯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 정말 멋진 말이다.  박지원의 세계관과 문장론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책.

생취의 소중함, 마음으로 접근하는 삶의 진정성,  향연기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자세. 지금 여기라는 투철한 인식. 비슷한 것은 이미 가짜임을 알게 하는 법고창신의 냉철한 정신..

깐깐한 대가 정약용과 대비되어 그의 호방한 대인으로서의 기질이 잘 느껴지는 책이다.

저자의 말 - 언제 읽어도 새로운 글, 읽으면 읽을수록 낯설어지는 글, 그는 어떻게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 정말 그렇다. 어떻게 하면 꽉 짜여져 빈틈 없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그 난공불락의 글을.

사랑은 되풀이 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왜 사랑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을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마라.. 이미 알고 있듯이 그, 그리고 그녀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다는 단순한 명제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범하면서도 단순한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이렇듯 풍부하고 수다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알렝드보통이라는 작가이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한다. 그의 글쓰기 방식이 새롭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말 그렇다. "여행의 기술"처럼 읽을 거리를 많이 제공해 준다. 독자는 그의 글을 통해 사랑의 과정과 그에 따른 정신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그리고 사랑은 매번 운명적으로 시작할 수 있고 되풀이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영원한 것임에 동의하게 될 수도 있다.

소설의 화자 나는 끌로이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친밀감은 나와 상대를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시킨다. 둘만의 언어로 사랑하고 둘만의 별명으로 통하게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데카르트의 주관적 인식으로 형성된 끌로이의 아름다움은 사랑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벌어진 앞니, 물건을 고르는 손길은 나만 느끼고 알 수 있는 그녀의 아름다움이다. 사랑은 얼마나 주관적인 행동인가. 그러므로 나를 사랑해 주고 관찰해 주고 알아 주는 이가 없다면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눈을 감으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눈을 감았을 때에 더욱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친밀감은 서로가 이미 가지고 있는 존재의 차이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조금은 위태로와지는 필연적인 과정을 겪는다. 빨간 구두를 신은 끌로이를 나는 자유롭게 둘 수가 없다. 끌로이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면 빨간 구두의 취향을 존중해 줄 수 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빨간 구두를 신고 파티에 가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상대의 기분이 상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멀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그 불안감으로 낭만적 테러리스트가 되어 질투심을 유발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끄덕하지 않는 상대는 사랑이 끝났음을 말해준다. 실연의 아픔은 나로 인해 상대를 아프게 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생각해 본다. 

사랑은 계절과 같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가 나에게 해준 말이다. 일반적인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서도 변변찮은 연애 한 번 못하고 있는 내가 뭔 사연이 있어 보였는지 넌즈시,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혹시라도 과거의 어느 관계에 얽매어 있다면 그러지 말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 보라고, 사랑은 계절과 같아 다시 돌아 오기 마련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선배의 조언이 생각났다. 한 사람과의 사랑의 끝은 또 다른 사람과의 사랑으로 새롭게 시작된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엔 번역문이 영 낯설었고  각종 철학적 잣대들을 들이대어 사랑의 과정을 분석하고 체계화하고 정리하려 하고 있어 머리가 좀 아팠다. 근대 여유를 갖고 읽으니 글이 새롭게 읽힌다. 그래도 생각이 많은 사랑보다 단순한 사랑법이 좋겠다. 그냥 사랑하는 거^^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사랑할 때의 나를 참 많이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우스꽝스런운 느낌에 좀 부끄러워질 수도 있다.. 내 특별한 사랑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그 감정과 같구나... 간간이 죽음을 떠 올리게도 되는 그 순간들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과정으로 서술될 수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겠다. 베르테르가 이 글을 읽었다면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여행의 기술에서도 느낀 거지만, 작가가 상당히 박학다식하다. 그 박학다식이 사랑에 관한 새로운 글쓰기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어쩌면 사랑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나영이 주인공으로 나온 <아는 여자>의 은행 강도 이야기이다. 사랑하면 그 사람 이름이 뭔지 물어 보고, 그럼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고, 다음 무슨 음식 좋아하냐 물어 보고 그거 같이 먹고.. 그러면 되는 거.. 그래서 결혼하고..,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는 거지뭐... 

좀 단순하게 사랑하고 싶다.

가장 인간적인 동기의 위대한 성과

뜬세상의 아름다움 ㅣ 태학산문선 105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 태학사 / 2006년 5월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늘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열심히 살아야지 뭐라는 뻔한 대답을 하나 갖고 있기는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바람과 같은 그 답이 허망하고 또 답답해서 가슴을 쓸어 내리기가 일쑤다. 이럴 때, 또 하게 되는 질문.. 너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구체적인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덜 방황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이룬 사람의 그 동기가 단지 타고난 천재성이나 권력 지향적인 성향에서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내밀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정약용이야말로 내가 정말 존경해야 되는 인물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천연두로 아이를 잃은 아비의 지극한 슬픔은 <마과회통>으로 승화되었고 , 백성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목민심서>와   이외의 많은 저술로 조선 사회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변혁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려 하였으며 잔혹한 봉건적 지배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려 하였다. 

사람에 대한 평가가 위대한 성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강조할 때 그 감동은 두 배가 된다. 60년을 한결 같이 아내를 사랑했으며, 오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아이들의 아비 노릇을 뚜렷이 한 가운데 지금 여기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근면과 성실을 다 하고 나니, 우리 역사에 있어 조선 근세의 단 한 사람,중국에 내 놓아도 밑질 것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얻은 그... 정약용이다.

나에게 와 닿은 구절 하나..

- 선량하기만 한 사람은 단지 자기 혼자 착하게 사는 정도에 맞을 뿐입니다.

선량한 마음과 함께 다산이 요구하는 삶의 자세가 힘찬 기상과 열정이었나 보다.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삶속에서 열정은 갈수록 희미해져 간다. 하기는 열정 없이 이루어지는 위대한 성과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천사와 악마 1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9월

내가 요즘 접하는 책과 영화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가슴에 뭔가를 하나씩 품고 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죽을 지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니, 오히려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뭔가가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체게바라는 민중을, 일포스티노의 마리오는 네루다에 대한 존경을, 그리고 천사와 악마에 등장하는 궁무처장은 신에 대한 믿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빈치코드의 주인공 랭던의 박학다식과 이야기 전개의 반전으로 인한 긴장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사실, 내가 그랬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처음 이 책을 잡았을 때, 주제와는 상관없이 이야기의 전개가 다빈치코드랑 너무나 흡사해서 뭔가 새로움을 주지 않는 이 글을 내가 꼭 읽어야하는가라는 회의를 하게도 했다. 그러나.. 무슨 책이든 읽어서 해될 것은 없다. 기대를 한 수 접고 읽으니 그래도 남는 게 있고, 랭던의 박학다식은 여전히 부러운 부분이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 엉뚱한 반전.... 이야기의 막바지로 갈수록 재미는 더해진다.

과학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끝이 없는 이야기다. 끝이 없으므로 결론도 있을 수 없다. 단지 가슴에 품은 것이 서로 다를 뿐이다. 저마다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보물을 지키도록 노력하면 그만이다. 난 아직도 내가 무엇을 가슴에 품었는지, 죽기전에 그걸 알고나 죽을 지 정말 걱정이다. 악마와 천사라는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현대인의 메마른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줄 그 무엇이 모자라 자꾸만 나는 목이 마르다.

살아가는 것은 나를 나누어 심는 일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동양고전이라는 무거운 주제와 그에 걸맞는 두꺼운 부피를 지닌 책이지만, 한 면 한 면이 쉽게 읽힌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강의를 듣는 대상자가 동양고전의 비전공자여서 그렇기도 하고, 정말 얼굴을 마주 대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친절하게 설명하듯이 진행되는 어법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번 읽어서는 그 깊이에 도저히 닿을 수 없겠다. 시간을 두고 글을 음미하듯이 천천히 읽어야만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책을 폈을 때에는 내가 생각하는 책의 형태랑 너무 달라서 사뭇 의아해 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한 것은 그야말로 해설책이었다.

야.. 요 한 권의 책으로 논어, 맹자, 장자,.. 다 끝장 낼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딱 펼쳤는데, 아뿔사.. 내가 원하던 익숙한 방식의 고전 해설 책이 아니어서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한문 문장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해석해 주길 바랬는데, 그게아니라 동양고전을 통해 정말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사는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깨달음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독법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떠올랐던 문구는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에서 읽었던 구절

" 살아가는 일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나를 나누어 심는 과정이다."

춘추전국시대라는 급변의 시기에 등장한 다양한 사상들은 저마다의 필연성과 서로에 대한 비판 의식으로 탄생 되었지만, 그 저변에 깔린 기본은 모두 같다. 위의 저 구절처럼 말이다. 

 역시 내면이 깊은 사람의 강의는 제대로 들어야 한다. 어려운 동양고전에 대한 안내인 듯 싶지만 그  정수를 콕콕 짚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책을 통해 지식이 아닌 삶의 지혜를 주려는 그 마음의 깊이가 깍듯하고 부드러운 어투를 통해 진지하게 전해진다. 쉬운 듯 하지만, 좀 어렵게 읽히는 책...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책..

내일 저녁 "TV책을 말한다" 라는 프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니 그 때, 주목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