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궁핍한 날의 벗 ㅣ 태학산문선 101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태학사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북학의>를 읽다가 중간에 그만 둔 적이 있다. 그러고 역사를 전공한 선배에게 <북학의> 정말 별로에요.. 온통 청나라 문물 칭찬만 하고, 우리 것은 다 비루하다고 하니 도무지 주체사상이란 거 찾아 볼 수가 없어요.. 흐응.. 그랬더니 선배 왈 " 당시의 우리 삶이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었다잖아. 그리고 걸칠 옷도 없이 동물처럼 살았으니, 목숨 부지하려면 대대적이 개혁이 필요했지. 전환적인 사고..청나라 것이 무조건 좋다는 그런 말이 아닐 걸.."
이제야 이 글을 읽는다. 다음은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라는 글의 일부다.
- 신은 이 산골 고을의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백성들은 화전을 일구고 나무를 하느라고 열 손가락 모두 뭉툭하게 못이 박혀 있지만 입고 있는 옷이라고 해야 십 년 묵은 해진 솜옷에,집이라고 해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서 들어가는 움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먹는 것은 깨진 주발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않은 나물뿐입니다.-
그러고 나니 <북학의> 도 선배의 말도 다 이해가 간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궁핍한 삶.. 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로 인한 것이므로 개혁과 혁명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안 되는 그런 필요성을 절감한 울분어린 혁명가의 애끓는 부르짖음이었던 것이다.
제목이 참 좋다. 궁핍한 날의 벗..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궁핍한 날의 벗'이라는 이 글은 그의 친구 백동수가 살기를 도모하여 서울을 떠나 강원도 인제로 가는 길의 서글픔을 표현한 글이다.
내 주변에 워낙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 이 글이 날 자꾸 돌아보게 한다.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예나 지금이나 '돈좀 꿔주게' 인가 보다. 말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들어주는 것도 참 어렵다.
또 인용하고 싶은 말
머리가 세도록 오래 사귄 친구라도 처음 만난 것처럼 서먹서먹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사귄 친구라도 옛 친구와 다름없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하면서, 나와 너무나 다른 지경에 처한다. 결혼한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 비해 할 이야기가 참 많아 보인다. 그들 사이에서 난, 할 말이 없고 또 할 말을 잃는다. 10대와 20대를 함께 보낸 그네건만, 당분간은 멀리 하고 싶다. 반면, 나와 함께 지금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지금 생각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소중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자들은 진정한 우정이라는 게 있나?" 라고 내게 묻는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그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다.
책은 박제가의 이리저리 흩어진 여러 산문들을 한 곳에 묶어 만든 책이다. 여러 친구들이 박제가에게 부탁한 그들 책의 서문도 있고, 친구 이야기, 시와 그림 이야기, 시대의 변화를 바라는 이야기, 섬세한 필체의 기행문 .글도 잘 쓰고, 그림에도 능하고, 풍류도 아는 문화인인 동시에 우정과 의리와 혁명을 꿈꾸는 그는 정말 멋진 남자다.
- 박지원에게 놀러갔더니, 스물일곱살이나 많은 그가 뜻 맞는 친구를 만났다면 손수 밥을 해준 이야기, 결혼하는 날 부인이 뒤따르는 데도 친구집을 쭈욱 둘러 보는 일 (남편으로선 별로), 고결한 선비 이덕무에 대한 남다른 애정, 술을 절제하라는 진심어린 벗에의 충고, 어느 것 하나에 몰두하는 아름다움, 자기에 대한 말을 쉽게 하지 말라는 인간적 당부....
한자로 쓰여진 글들을 잘 번역해 놓아 읽기는 쉽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박제가가 요즘에 태어났나면 딱 '선동가(煽動家)'였겠다라는 것.
- 우리나라가 가난한 것은 다들 과거에 나아가 벼슬을 하려고 하는 유생들이 지나치게 많아서이다. 그들 수를 줄여라, 수레를 이용하라,기이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것만 고수하면 그만이가? 등등 세상의 변화를 바라며 세상에 요구를 끊임없이 한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그가 산 시대와 사회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