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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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자 서평가의 유작(遺作)과 만나다

 

 <출판저널>의 기자출신으로 여러 지면에 발표한 서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평가 최성일씨가 작년 여름에 뇌종양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44세. 이 책은 그러니까 저자, 최성일의 유작이 되는 셈입니다. 아래처럼 부인이 서문을 대신 썼더군요.

 


 

먹먹한 마음 한자락 넘기며 페이지를 넘겨봅니다. 사실, 저자 최성일씨는 제게 있어 서평이 재미없다는 인식을 깨부순 인상적인 인물입니다. 식객세상에 사유리가 급소와 솔직함으로 펀치를 날린다면 출판세상에는 최성일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그의 서평에는 입장과 관점이 명확하고, 어떤 때에는 쏠쏠한 재미와 정보를 줄 뿐만 아니라 가끔은 통쾌하기도 합니다. 왜냐구요? '나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견해를 존중한다'는 흥미진진한 문장을 통해서도 가늠해 볼 수 있듯,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밝히는 그는 결코 에움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깔끔하고, 군더더기없는 악평(?)에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비평적인 책읽기의 대가라고들 하는데 제가 보기에 그는 비평적이 아니라 독창적인 솔직함의 비주류 대가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이른바 '주례사 비평'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저자는 덕담 일변도의 무색무취한 결혼식 주례사같은 서평을 그렇게 정의합니다. 관점없는 뜨뜻미지근한 책읽기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정말 뭉클하더군요. 왜냐면 얼마전에 제가 별 다섯개중 반개만 준 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저자는 제 서평의 삭제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저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공짜로 얻은 책에 대해 냉정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몰인정한 처사다. 하지만 우리의 도서관 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해서 그렇지 책을 꼭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 제 값을 치르고 책을 사는 것이 서평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엄정한 서평의 전제 조건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다.

 

물론 저도 이 부분에 있어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서평단 참여로 인해 공짜로 얻은 책인지라 '비즈니스 매너' 차원에서 약속한 서점사이트와 관련 북까페의 리뷰는 삭제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찜찜하더군요. 서평단이 무뇌집단도 아니고, 칭찬과 비판사이 어정쩡한 '균형'을 이루는 서평들을 쓸 생각을 하니 답답했지요.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써 출판이후에는 그 책에 대해 독자마다 재해석하고 다양한 해석을 할 권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특히 이 책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책의 단점에 대해 애써 눈감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완전무결한 사람이 없듯이 독자는 완벽한 책을 기대하는 게 아니니까요.

 


 

'올 게 왔구나!' 그러나 즐거운 탄식.

 

목차를 펴면서부터 '올게 왔구나'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신화,역사,세계사, 문화사,자서전까지 아우르는 그의 스펙트럼에 감탄을 하면서도 인용한 다른 책들과 관련서적까지 짚어낼 때에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헐, 나보고 어디서부터 손대라는 소리야,빌어먹을!"하는 한탄이 터져 나오고 말더군요. 그의 독서법은 아주 정교합니다. 촌철살인의 서평은 더없이 귀감이 됩니다. 무엇보다 이 책<한 권의 책>은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채워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또 서평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101편의 예시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최성일씨는 우선 한 권의 책을 논하기 위해 관련된 여러 책을 동시에 읽습니다. 글의 공력은 차치하더라도 그 짧은 분량의 책 서평속에서 묻어나는 진지함과 성실함은 본받을 만 합니다. 더군다나 문장의 결이 곱습니다. 저도 한글을 좀 더 많이 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의 서평을 통해서 발견하는 낯선 순우리말들은 사전을 뒤적이게 만듭니다. 새로운 단어들을 만나는 즐거움 또한 무시할 수 없네요.

 

인상적인 부분을 몇 개 발췌하자면,

 

독서인 사이에에 전래되는 '세 바보' 속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세 바보란 책을 빌려달라는 사람, 빌려주는 사람, 빌려보고 빌려주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책에 인용된 볼테르의 경구는 '질서'에 앞서는 '사회정의'를 바라는 사람은 허투루 봐 넘기기 어려운 구절이다. "광신주의자들의 열성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

 

101여 편의 서평중에서 귀하게도 생태와 환경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탓인지 좋은 책들을 소개받아서 수첩에 옮겨놓았습니다.내가 저자가 추천한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겠지만 내 관심영역에 맞는 책들은 우선 안심이 됩니다. 그의 서평이 길잡이 노릇을 한 결과, 좀 더 농밀한 독서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책<한 권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북멘토이며 조언자입니다. 참고삼아 제가 위시리스트에 넣은 북리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최성각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 다치바나 다카시
즐거운 불편 - 후쿠오카 켄세이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 모리스 클라인
콘크리트아파트에서 건강하게 사는 49가지방법 - 이현숙
프라하의 소녀시대/팬티 인문학 - 요네하라 마리
진화하는 결혼 - 스테파니쿤츠
국물이야기 - 문형동

소박한 밥상 - 헬렌 니어링
버지니아울프, 시대를앞서간불온한매력 - 나이젤 니콜슨
보이체크 - 게오르크 뷔히너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 채광석
쉽게 찾는 날씨 - 스톰 던롭
가족주의는 야만이다 - 이득재
세상을 바꾼 법정 - 미첼 콜드웰
새장안에서도 새들은 노래한다 - 마크 잘즈만
마음의 생태학 - 그레고리 베이트슨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 - 칼 마르크스
플라톤은 아팠다 - 클로드 퓌자드 르노

 

정말 읽고 싶은 책이 무지막지 많아서 즐거운 비명입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책의 만찬입니다. 저는 이 중에서 어느 책부터 맛을 봐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덧붙여 저자, 최성일씨가 서른 한 살때부터 10년이상 방대한 작업으로 내놓았다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은 제가 언제쯤 자신감있게 독파할 수 있을까요?

 

 (늘 웃는 얼굴이었다던 최성일씨의 모습)

 

손을 씻고나서 책을 만져야 저자와 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사람, 밑줄을 그어도 자를 대듯 금을 긋던 사람, 자신은 진보가 아니라 '진보'인 척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하던 사람, 다 쓴 원고를 서너 번씩이나 손수 교정을 본후에야 보내던 사람, 지인들에게 책선물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 책에 씌여 있다고 무조건 다 믿지말라고 꼬리내린 독자들에게 격려하던 저자에게 더없이 감사합니다. (당신의 서평도 다 믿지 않아두 되는 거죠?) 보르헤스의 말처럼 수십만권의 장서로 가득한 거룩한 도서관같은 천국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내내 평안하시길 다시한번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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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아프게 한다 - 차별과 편견을 허무는 평등한 언어 사용 설명서
오승현 지음 / 살림Friends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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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수가! 이 책<말이 세상을 아프게 한다>를 읽는 중에 '나꼼수+비키니+가슴대박+ 코피쫙' 조합으로 여기저기 논란과 말들이 많아서 이 책을 읽는데 가속도를 내도록 도와준 김용민과 주진우씨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렵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사소한 말실수와 단어 선택이 차별과 편견을 더욱 공고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날카하게 혹은 꼼꼼하게 설명해주는 '평등한 언어 사용 설명서'입니다. 이 책에서 건드리고 있는 범위는 장애인,혼혈인,여성,동성애자는 물론 가정과 군대, 학교, 사회속에 드러나는 단어들과 호칭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책 속에서 지목하는 말들을 접할 때 처음에는 '에이~ 이런 단어까지 뭐라하는 것은 좀 오버아아닐까?'하고 읽다가 그 불온한 주류 언어의 모순과 함정앞에 마주치는 순간, 저는 부끄럽고 불편해집니다. '이 말은 진짜 제가 의도하고 일부러 쓴 게 아니예요!!' 라고 외쳐보았자 저는 체제의 언어, 강자의 언어의 공범자, 하수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동안 인생을 살면서 나의 말실수와 농담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런지 겁이 나더군요. 고답적으로 구지 '인식론적 조건'을 운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이 책의 저자 오승현씨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로 우리안에 내재되어있는 몰상식을 까부수는 일은 너무도 온당하니까요.

 

이 책<말이 세상을 아프게 한다>을 읽으며 왜 나꼼수분들에게 감사했는지 한번 생각해볼까요? 이 책속에서 소개하는 다양한 말실수사례들과 나꼼수사건은 참 닮아있습니다. 서로가 마치 상대방의 클론이고 '짝퉁'으로 보여질 정도입니다. 사실 이 사건을 접한 곳은 네이버 포탈뉴스에서였습니다.  '나꼼수, 정봉주 비키니 사진 보내기 운동'이라는 상상력을 동원해도 스토리를 연결하기 힘든 타이틀 때문이었죠. 클릭해보니 동아일보쪼가리의 뉴스 헤드라인중에 하나더군요, 실제로는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보수언론의 소설쓰기 특기때문에 독특한 사건을 접하게 되어 감사하긴 해요.

 


 

제가 이 책과 연결지어 나꼼수 비키니논쟁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떤 분들은 김용민과 주진우의 이 말들을 '마초적 일탈'로만 치부하면서 '지들끼리의 농담'이라고 축소하는 분들이 꽤 되더군요. 아, 농담맞습니다. 그동안 나꼼수 분위기를 보아하건데 그 분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꺼냐'던 강용석이나 ‘못생긴 마사지걸을 고르는 게 인생의 지혜'라던 MB나 모두 자기들은 재치있는 '농담'을 했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뿐이거든요.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농담'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농담을 꺼내는 의식의 기저에는 어떤게 깔려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거죠. 심심해서 던진 돌 하나에 개구리가 맞아죽는다면 그것은 엄연히 '개구리 살인죄'이니까요. 그리고 납득이 되지 않는 점이 또 있습니다.  이제 나꼼수는 반MB와 일면 진보(?)라는 레이블로 묶여있고 영향력도 엄청납니다. 아이튠스 팟캐스트에서 시사,정치 1위잖아요. 근데 필요할 때만 정치이고 불필요할 땐 농담이라고 치부하는 게 온당한가요? 그 소위 농담이라는게 떨어져서 부부생활 못 하는 유부남의 성생활을 소재로 자위 등등 온갖 드립을 다 치며 다 큰 세사람이 딸 안 칠테니까 수영복 사진 보내달라고 하더니 막상 비키니 사진이 오니까 공동명의로 "가슴 대박이다, 코피를 조심하라!"면서 트위터에 자랑하다니요. 수영복 사진이라고 말했을 때 설사 그럴 의도가 있다 한들, 뭔가 센스있는 사진을 이슈화시키리라고 기대했는데, 크리에이티브는 둘째치고, 그냥 입다물고 공식화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난리나지 않았을텐데요. 게다가 남편을 감옥에 보내며 뽀뽀를 했던 정봉주 부인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요.

 

젠더도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도 정치적인 집단이고요. 다른 정치적인 논의는 정치적으로 바라봐주길 바라지만 섹드립만은 젠더 정치와 분리시키라고, 거슬려도 참고 넘어가라고, 농담가지고 피곤하게 만들지말라고 하는 것은 말이 세상을 어떻게 아프게 만드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위험한 사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속의 한 부분을 발췌해 보겠습니다.

 

남성을 지칭할때는 그저 경찰, 배우, 직원, 교사, 의사, 장관, 작가, 대학생으로 부르지만, 여성을 지칭할때는 특별히(?) 여경, 여배우, 여직원,여교사, 여의사, 여성장관, 여류 작가, 여대생으로 부릅니다.우리나라에 학교명이 '** 남자 중학교'인 곳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왜 여학교만 유별나게 여자를 강조하는 걸까요? 이런 표현들은 남성은 일반적인 존재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은 존재라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나쁘게 평가받는 대상인 경우에는 여성이 주가 되고 남성이 종이 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이번에 많이 속상해하는 여성들은 나꼼수의 '여성 애청자', '여성지지자'가 아니라 그냥 '나꼼수 애청자', '나꼼수 지지자'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책의 아쉬운 점은 날카로운 지적끝에 그렇다면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말들을 써야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정리하고 강조해주었으면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지않았을까 하는 부분과 체제의 언어가 어떻게 의식과 사회를 아프게 만드는지에 대한 조목조목 차근차근 설명이 더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참 날이 서 있네.'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하지만 제게는 무의식적으로 더이상 공범자가 되지않아야겠다는 충격요법이 제대로 먹힌 셈입니다. 감사한 부분이죠.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서평을 줄입니다.

 

내 언어 능력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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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는 남자 - 다가가면 갈수록 어려운 그 남자
마스다 미리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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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고독합니다.

 

이 책<아빠라는 남자>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그레 미소를 짓게 되는 데도, 내 머릿속에는 '아버지들은 참 고독하구나' 하고 읊조리게 됩니다. 왜일까요? 서평을 쓰기 전에 여자사람 지인들과 '나의 아버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누구나 아버지와 딸사이에는 참으로 묘하고 어색한 기운이 흐르기 마련이더군요. 특히 여자사람들이 어른이 되고나서는 더욱요. 사실 제가 6살때 저는 '빨리 커서 아버지랑 결혼하겠다'고 친척들과 동네아줌마들과 심지어 어머니앞에서도 강강한 목소리로 외치곤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참 크고, TV속 어떤 탈렌트들 보다 잘생겼고, 못하는 게 없는 맥가이버였으며, 저녁마다 책과 과일을 주렁주렁 사다주시는 산타였습니다. 책도 많이 읽으시고, 노래도 너무 잘하시고, 운동도 너무 좋아하시고 어딜가나 '대장'이셨습니다. 게다가 회고해보면 아버지는 30년전부터 '딸바보'였습니다. 산악회건,조기축구회건 아버지는 남동생보다 저를 데리고 다니셨고, 제가 읽고싶어하는 책을 적은 종이를 아버지 시계놓는 자리위에 슬며시 놓으면, 아무리 회식을 하고 늦게 들어오시더라도 그 다음날 제 책상위에는 그 책이 놓여있었으니까요. 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갖는 감정은 굉장히 순수한 것 같습니다. 부인에게는 반려자로써, 여자로써 바라는 바가 있고 아들에게는 야망이 있을텐데 아버지가 딸에게 갖는 감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심지어 어머니께서는 '저랑 아버지가 입맛과 성격이 너무 똑같다'고 혀를 내두르시면서 어렸을때, 제가 재롱을 피면  조그만 미녀를 손에 쥐고 꼼짝못하는 킹콩같았다'면서 놀리곤 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아버지는 고.독.합.니.다. 

 

 

아버지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자식들의 심정.

 

IMF이후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을 때를 떠올립니다.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하셨던 아버지는 재기를 위해 더욱 몸부림을 치셨을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기를 당하고 집안은 점점 수렁에 빠졌지요. 아버지는 좌절이 너무 크셨는지 말수가 줄어들고 더이상 웃지도, 음악을 듣지도, 운동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버지는 신문과 TV만 보셨고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셨지요. 아버지의 든든한 어깨가 시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저의 심정 또한 참담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죠. 내 앞의 남자는 '아빠라는 보호자'가 아니라 '경제력을 상실한 소시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아니라 '남자 대 남자'로 만난 부자간의 관계였습니다. 우리집의 4대 독자인 제 남동생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극도의 분노와 애증이 겹치는 것 같더군요. 손자가 태어난 이후 그 똘똘이가 가교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집 부자지간은 '허심탄회'하지 않습니다.이런 문제를 보편적인 부자간의 갈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다 성장하고 나서 엄마와 딸의 관계는 참 부드러워지는데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더욱 뻣뻣해지니 말입니다.       

 



제가 지인들과 대화를 해 본 결과 딸들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벽창호에서부터 알콩달콩, 세심에 이르기까지 아주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그리고 이 책<아빠라는 남자>속에 나오는 마스다 미리의 아버지는 사실 '어른아이'입니다^^ 성격도 급하고 털털하면서 무뚝뚝하지만 순진한 아이같지요. 하지만 그 속에 흐르는 딸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수줍게 느껴집니다.그래서인지 이 책<아빠라는 남자>는 <엄마라는 여자>보다 공감이 크지는 않았어요. 우리 아버지와는 성향이 많이 다르시더라구요.이제 예순여섯이 되신 우리 아버지는 사실 나이를 드심에 따라 점점 더 소박해지시고, 많이 웃으셨고, 가부장의 부담에서 벗어나시기 위해 큰 결심을 하신 듯 하거든요. 어머니 생신때 거침없이 축가를 직접 부르셔서 며느리가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시는 로맨티스트이십니다. 그렇게 마스다 미리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다르다 해도 이 책의 장점은 사라지지않습니다. 이 책은 단지 '아버지'와 가족의 일상풍경을 소소하게 보여주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깔때기처럼 '내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매력이 탄탄하거든요.


 

저자는 분명 이 책을 아버지께 헌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 여기저기서 아버지 뒷담화(?)에 주저하지않습니다.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가족회식때 아빠를 '접대'하는 기분이 들어 같이 다니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죠. 아빠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하게 된다고 노골적으로 불평합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런 솔직한 시선이 걱정되는게 아니라 저는 오히려 아버지와 딸이 어색하긴 하지만 투명하구나,하고 그 신뢰가 부럽더군요. 불만이 아니라 그것은 마치 '앙탈'로 보일 정도로 귀엽습니다. 그리고 시트콤을 보듯이 너무 재미있는 장면이 많아요. 아래처럼요. 저는 뭉클하면서도 웃겨서 눈물이 났었다는^^


 

저도 한번쯤 이 책처럼 <아빠라는 남자>에 대한 명랑하면서도 마구 뒷담화를 해대는 회고집을 써서 아버지께 드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요즘도 여전히 '사랑한다, 내 딸♥'이라고 문자를 보내주시는 아버지를 보고 있자면 한없이 어색해지는 저의 머쓱함을 지우고 싶네요. 아버지의 고독함을 벗겨드릴 사람은 아내도, 아들도 아닌 바로 '딸'일것 이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렇게 제 인생의 '첫번째 남성' 이었던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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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여자 - 그리면 그릴수록 그리운 그 여자
마스다 미리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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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장 쉽게 울릴 수 있는 화제가 뭔지 아세요? 바로 '어머니'라고들 하더군요.

어머니를 떠올리면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어도 별겯듯 심장 아래쯤이 뭉근해집니다.

세상 풍파에 으쌰으쌰 눈물근육을 단련했다해도 어쩌지 못하네요. T.T

 

멍하니 이 책 <엄마라는 여자>라는 제목만 보고 있어도 마치 뒤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알미레나가 튀어나와 아리아 '울게하소서'를 부르는 듯 하더라구요.

그래서 읽은 지는 한참 되었는데 서평을 못쓰고 주저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용기내어 봅니다.

 

 

이 책<엄마라는 여자>가 그렇다고 부모생각에 속수무책으로 오열하게 만드는 최루탄일까요?

절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책은 만화가이자 수필가인 마스다 미리의

상큼하고 명랑한 책이거든요. 그녀가 바라본 '여자'로써의 어머니가 사랑스럽게 등장합니다.

중간중간에 텍스트가 아니라 아래처럼 만화컷들로 만나는 엄마와 딸은

마치 꽁돈이 생긴 것처럼 얼마나 재기발랄하게 미소가 번지는데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한국의 어머니와 일본의 어머니는 왜이리 비슷할까요?

이 책을 읽으며 일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아주 사소한 어머니의 습관과 취향과 행동들이

책속에 고스란히 투영되는데 저는 나의 어머니와 오버랩되어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한평생 오롯이 내편이었던 여자.. 네, 맞아요.맞아!

 

이 책은 마법같습니다. 읽을 때는 배시시 웃으면서 '똑같네,똑같아!' 하면서 읽게 되는데

책장을 덮고나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뭉게뭉게 되살아나 아결한 애정의 켜가 자랍니다.

 

의사들도 포기한 딸을 끌어안고 울며 기도하던 어머니.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려내서 금이야 옥이야 키워준 어머니.

여자가 요리잘해봐야 솥뚜껑 운전사밖에 더 되냐고 설겆이도 안시켰던 어머니.

그럴 시간에 책이나 한 자 더 보라고 방으로 방으로 떠밀던 어머니.

 남자가 부엌일 잘해야 사랑받는다며 남동생만 시키시던 어머니.

좀 더 미래에 태어났어야 세상이 더 알아주었을 텐데 하시며 다독여주시던 어머니.

결혼안한다고 타박하는 친척들에게 내 딸은 현대여성이라며 편들어주시던 어머니.

삶의 방식이 이해가 안되었을텐데도 한결같이 말없이 지켜봐주시는 어머니.

 

그렇게 어머니는 나를 먹이고 씻기고 어엿한 여자로 키우셨고

색깔과 노래, 언어등 내가 처음 사랑한 것들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제 아무리 다르게 살겠다고 주먹 불끈 쥐어도 어머니란 존재는

제 피부아래로 조용히 스며들어 닮아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결심 하나 했어요. 앞으로는 어머니를 한떨기 여자로 바라봐야겠어요.

 

멀리 있으면 희고 연약해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외로워 보이는 당신.

내가 세상일에 부쳐 힘들다고 주눅이 들어서 눈물이 되어 흐르면

내 등 뒤에서 온새미로 비를 맞아주던 당신께 이제부터는 여자 대 여자로 손잡아드릴께요.

이 책< 엄마라는 여자>를 만나 다시한번 마음자락 단도리질하게 되어 기쁩니다.

 

갈무리는 로맹가리의 소설중에서 떠오른 문장으로 끝맺음 하려고 해요.

 

나는 인생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은밀하고 희망적인 논리를 믿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신용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서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속에 자라남을 느꼈다.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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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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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로맹가리에게 묻습니다. <자기 앞의 생>이 프랑스 최고 권위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그는 대답하죠, "에밀 아자르의 데뷔작<그로 칼랭>은 괜찮게 읽었지만, <자기 앞의 생>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소." 결국 죽고나서야 로맹 가리가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 당시 본명으로 출간한 <이 선 너머에서 당신의 티켓은 유효하지 않습니다>가 조소와 비난을 받고,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만 폭발적인 갈채를 받는 걸 보면서 로맹 가리는 웃었을까요, 아님웃음을 지었을까요?

 


 

로맹 가리는 아시다시피 아주 드라마틱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러시아계 유태인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법대생에서 조종사에서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 되었고, 외교관으로 미국의 프랑스 총영사를 지냈으며, 헐리웃의 유명 여배우와 스캔들이 나고 전처와 이혼과 동시에 진 세버그와 재혼했고, 프랑스 콩쿠르상을 2번이나 받은 세계적인 소설가이면서 영화감독이었습니다.그의 자살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서를 통해 이해해보자면 '자살'은 로맹 가리의 문학 작업을 완성하는 수단이며, 궁극에는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죠. 문학의 완성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전해 진다고 역설했던 그가 <자기앞의 생>을 통해서는 그렇게 '사랑'을 많이 예찬하다니 아이러니일 수밖에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세상에 대고 몰래카메라를 성공한 일은 60줄 노친네의 괴팍한 기행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다시 확인받고 싶었던 작가의 인간적인, 그러나 극단적인 욕망이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분명한 것은 로맹 가리는 어찌했든 작가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을 테스트할 수 있었던 모험심과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폐부까지 꿰뚫는 치열함과 상상력에 박수를!

 


 

어찌했든 정말로 생은 언제나 어둡고 시간은 늘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는 법인가봅니다. 지금봐도 모던한 위의 여자는 로맹가리와 24살 차이가 나던 2번째 부인,진 세버그입니다.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세실'로 나온 게 기회가 되어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각자 결혼한 상태였기에 결국 각자 이혼하고 서로 결혼에 골인했다지요. 뭐,이 책과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그녀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사인이 사랑타령이 아니라 흑인인권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FBI의 눈밖에 나서 비명횡사했다는 소문만 무성한채로요.

 

이제 다시 로맹가리가 두번째 삶의 방관자인 시선으로 쓴 이 책<자기앞의 생>으로 돌아올께요^^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학창시절 도서반이었던 터라 장서실을 어슬렁거리는게 습관이었습니다. 그때 세계문학코너를 지나가다가 제목을 보고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선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읽었을때 슬프고 우울해진 것은 물론이요, 읽다가 종종 멈추어 필사하던 문장들도 많았던 기억이 선합니다.

 

이 소설<자기앞의 생>을 다시한번 읽고나니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주변인'에 대한 법과 제도의 처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께기같은 밝음에 있습니다. 모모는 법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고 법 때문에 아줌마를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모모는 수없이 도둑질을 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 그 놈의 법은 모모를 구속하지도 않습니다. 로자아줌마는 법때문에 연금도 받을 수 없고, 안락사법때문에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죠. 창녀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법때문에 로자아줌마의 아파트에 아이들을 맡겨야 하고 모모아빠는 법때문에 10여년을 병원에 갇혀있고요. 법이라는 프레임밖, 주변인으로 태어나 앞으로 남은 여생 또한 해피엔딩이라고는 눈꼽만큼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약하지않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문체가 통통 튀고 발랄합니다. 이 책 어딘가에 성장하고, 강해지는 긍정의 묘약이 숨겨있습니다. 

 

또 저는 이 책<자기앞의 생>을 읽으면서 남은 여생앞에서 '두려움'을 견뎌야만 하는 군상들을 발견합니다. 두려움의 눈동자는 모두 닮아있습니다. 기르던 아이와 헤어져야 할까봐 겪은 두려움, 사람답게 죽지 못할까봐 겪는 두려움, 혼자만 세상에 덜컥 남을까봐 겪은 두려움까지..그러나 그 두려움이 단지 생을 파괴하는 비극만은 아니죠. 아래 구절을 볼까요?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껴안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똥오줌을 쌌는지 고약한 냄새가 났다. 혹시 내가 자기 때문에 구역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난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모모, 모모......"
  "네, 로자아줌마, 저 여기 있어요. 저만 믿으세요."
  "모모야. 난 들었다.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렀어.날 데리러 올 거야."
  "아줌마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부아파씨가 죽었어요."
  "나는 무섭구나."
  "알아요, 로자아줌마. 근데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잖아요."

 

두려움에 대한 언급은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의 혀를 통해 여기저기에 파편처럼 흩어져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낯설고 거칠은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자기앞의 생>은 인간에 대한 냉소적이고 싸늘한 상황과 따스한 시선이 교차하는 하나의 퀼트같은 작품입니다. 성장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뭐랄까. '호밀밭의 파수꾼' 보다는 더 참담하고,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더 안타깝지요.쓸쓸한 유머로 시작해 눈물로 끝나지만 흡인력이 강하고 수려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연꽃이 썩은 물에서만 피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모모가 성우들의 녹음실에서 화면을 거꾸로 돌리는 것을 보게 되었을때가 아닌가 합니다. 침을 뱉는 사람은 그 침이 다시 입속으로 들어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모모는 늙은 로자아줌마가 아니라 시간을 돌려 젊고 아름다왔을 적 로자아줌마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로자 아줌마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라고 말하며, 아줌마가 원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아이. 정말 얼마나 잔망스럽고 사랑스러운지요.

 


(1977년 '마담 로자'란 이름으로 영화화되었을때, 로자아줌마가 등장하는 장면)

 

누구의 생이든, 자기 앞의 생은 슬플 때가 있다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어리지만 어리지않은 아랍인 소년, 모모는 말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슬프고 끔찍하지만 로자아줌마를 비롯해 모모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 모모를 일깨우는 스승들이죠. 소년은 이들을 통해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삶을 껴안고 그 안의 상처까지 보듬을 수 있는 비법을 체득합니다. 자기앞의 생, 우리앞의 생, 남은 여생은 무엇으로 살아야하냐구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바로 버거운 삶에 대한 해답일 수 있겠죠.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사람이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족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사랑을 '하기' 때문 아닐까요?

 

좋았던 구절들

 

#1.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2.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3.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

나는 어찌나 행복한지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바로 그 순간에 잡아야만 하니까 말이다.

 

#5.

아르뛰르가 곁에 없는 것을 내가 몹시 슬퍼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르뛰르를 보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모두 그것을 반대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한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그 투명함이 좋았어요. 제가 프랑스를 다시한번 여행가게 된다면,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올라가게 된다면, 시장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를 보게된다면 그떄 또다시 '모모'를 떠올리겠죠. 우선은 우산을 살 기회가 된다면 초록색 우산으로 하나 장만해야겠어요.그리고 이름을 지어줘야겠어요. '아르뛰르'라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가수 김만준의 아주 오래된 노래, '모모'기억나시나요? 사실 ‘모모’의 주인공이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의 모모였다는 것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가사를 오롯이 되짚어보니 정말이네요. 같이 한번 들어보실래요? 노래가 귀에 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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