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기자가 로맹가리에게 묻습니다. <자기 앞의 생>이 프랑스 최고 권위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그는 대답하죠, "에밀 아자르의 데뷔작<그로 칼랭>은 괜찮게 읽었지만, <자기 앞의 생>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소." 결국 죽고나서야 로맹 가리가 바로 에밀 아자르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 당시 본명으로 출간한 <이 선 너머에서 당신의 티켓은 유효하지 않습니다>가 조소와 비난을 받고, 필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만 폭발적인 갈채를 받는 걸 보면서 로맹 가리는 웃었을까요, 아님웃음을 지었을까요?

 


 

로맹 가리는 아시다시피 아주 드라마틱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러시아계 유태인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법대생에서 조종사에서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 되었고, 외교관으로 미국의 프랑스 총영사를 지냈으며, 헐리웃의 유명 여배우와 스캔들이 나고 전처와 이혼과 동시에 진 세버그와 재혼했고, 프랑스 콩쿠르상을 2번이나 받은 세계적인 소설가이면서 영화감독이었습니다.그의 자살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서를 통해 이해해보자면 '자살'은 로맹 가리의 문학 작업을 완성하는 수단이며, 궁극에는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죠. 문학의 완성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완전해 진다고 역설했던 그가 <자기앞의 생>을 통해서는 그렇게 '사랑'을 많이 예찬하다니 아이러니일 수밖에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세상에 대고 몰래카메라를 성공한 일은 60줄 노친네의 괴팍한 기행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다시 확인받고 싶었던 작가의 인간적인, 그러나 극단적인 욕망이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분명한 것은 로맹 가리는 어찌했든 작가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을 테스트할 수 있었던 모험심과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폐부까지 꿰뚫는 치열함과 상상력에 박수를!

 


 

어찌했든 정말로 생은 언제나 어둡고 시간은 늘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는 법인가봅니다. 지금봐도 모던한 위의 여자는 로맹가리와 24살 차이가 나던 2번째 부인,진 세버그입니다. 프랑스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세실'로 나온 게 기회가 되어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각자 결혼한 상태였기에 결국 각자 이혼하고 서로 결혼에 골인했다지요. 뭐,이 책과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그녀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사인이 사랑타령이 아니라 흑인인권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FBI의 눈밖에 나서 비명횡사했다는 소문만 무성한채로요.

 

이제 다시 로맹가리가 두번째 삶의 방관자인 시선으로 쓴 이 책<자기앞의 생>으로 돌아올께요^^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학창시절 도서반이었던 터라 장서실을 어슬렁거리는게 습관이었습니다. 그때 세계문학코너를 지나가다가 제목을 보고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아무 정보없이 이 책을 선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읽었을때 슬프고 우울해진 것은 물론이요, 읽다가 종종 멈추어 필사하던 문장들도 많았던 기억이 선합니다.

 

이 소설<자기앞의 생>을 다시한번 읽고나니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주변인'에 대한 법과 제도의 처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께기같은 밝음에 있습니다. 모모는 법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고 법 때문에 아줌마를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모모는 수없이 도둑질을 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 그 놈의 법은 모모를 구속하지도 않습니다. 로자아줌마는 법때문에 연금도 받을 수 없고, 안락사법때문에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죠. 창녀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법때문에 로자아줌마의 아파트에 아이들을 맡겨야 하고 모모아빠는 법때문에 10여년을 병원에 갇혀있고요. 법이라는 프레임밖, 주변인으로 태어나 앞으로 남은 여생 또한 해피엔딩이라고는 눈꼽만큼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 책은 약하지않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문체가 통통 튀고 발랄합니다. 이 책 어딘가에 성장하고, 강해지는 긍정의 묘약이 숨겨있습니다. 

 

또 저는 이 책<자기앞의 생>을 읽으면서 남은 여생앞에서 '두려움'을 견뎌야만 하는 군상들을 발견합니다. 두려움의 눈동자는 모두 닮아있습니다. 기르던 아이와 헤어져야 할까봐 겪은 두려움, 사람답게 죽지 못할까봐 겪는 두려움, 혼자만 세상에 덜컥 남을까봐 겪은 두려움까지..그러나 그 두려움이 단지 생을 파괴하는 비극만은 아니죠. 아래 구절을 볼까요?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껴안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똥오줌을 쌌는지 고약한 냄새가 났다. 혹시 내가 자기 때문에 구역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난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모모, 모모......"
  "네, 로자아줌마, 저 여기 있어요. 저만 믿으세요."
  "모모야. 난 들었다.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렀어.날 데리러 올 거야."
  "아줌마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부아파씨가 죽었어요."
  "나는 무섭구나."
  "알아요, 로자아줌마. 근데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잖아요."

 

두려움에 대한 언급은 소설 속 다양한 인물들의 혀를 통해 여기저기에 파편처럼 흩어져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낯설고 거칠은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자기앞의 생>은 인간에 대한 냉소적이고 싸늘한 상황과 따스한 시선이 교차하는 하나의 퀼트같은 작품입니다. 성장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뭐랄까. '호밀밭의 파수꾼' 보다는 더 참담하고,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더 안타깝지요.쓸쓸한 유머로 시작해 눈물로 끝나지만 흡인력이 강하고 수려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연꽃이 썩은 물에서만 피는 것처럼 말이예요.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모모가 성우들의 녹음실에서 화면을 거꾸로 돌리는 것을 보게 되었을때가 아닌가 합니다. 침을 뱉는 사람은 그 침이 다시 입속으로 들어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모모는 늙은 로자아줌마가 아니라 시간을 돌려 젊고 아름다왔을 적 로자아줌마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로자 아줌마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라고 말하며, 아줌마가 원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주는 아이. 정말 얼마나 잔망스럽고 사랑스러운지요.

 


(1977년 '마담 로자'란 이름으로 영화화되었을때, 로자아줌마가 등장하는 장면)

 

누구의 생이든, 자기 앞의 생은 슬플 때가 있다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어리지만 어리지않은 아랍인 소년, 모모는 말합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슬프고 끔찍하지만 로자아줌마를 비롯해 모모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 모모를 일깨우는 스승들이죠. 소년은 이들을 통해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삶을 껴안고 그 안의 상처까지 보듬을 수 있는 비법을 체득합니다. 자기앞의 생, 우리앞의 생, 남은 여생은 무엇으로 살아야하냐구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바로 버거운 삶에 대한 해답일 수 있겠죠.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사람이 버텨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족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사랑을 '하기' 때문 아닐까요?

 

좋았던 구절들

 

#1.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2.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3.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

나는 어찌나 행복한지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바로 그 순간에 잡아야만 하니까 말이다.

 

#5.

아르뛰르가 곁에 없는 것을 내가 몹시 슬퍼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르뛰르를 보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모두 그것을 반대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법이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한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그 투명함이 좋았어요. 제가 프랑스를 다시한번 여행가게 된다면,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올라가게 된다면, 시장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를 보게된다면 그떄 또다시 '모모'를 떠올리겠죠. 우선은 우산을 살 기회가 된다면 초록색 우산으로 하나 장만해야겠어요.그리고 이름을 지어줘야겠어요. '아르뛰르'라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가수 김만준의 아주 오래된 노래, '모모'기억나시나요? 사실 ‘모모’의 주인공이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의 모모였다는 것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가사를 오롯이 되짚어보니 정말이네요. 같이 한번 들어보실래요? 노래가 귀에 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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