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갈등이 아니라 혐오입니다 -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신승아 / 얼룩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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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며 날카로운 시선, 실력있는 리뷰어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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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 석양의 건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연기를 못한다. 피우지도 못하는 독한 시가를 입에 물다 보니 미간에 주름살만 깊게 파인다. 그는 더스틴 호프만이나 로버트 드니로와 같은 불꽃 튀는 연기력을 선보인 적이 없는 배우이다. 

동작도 어그적어그적, 꿔다 논 보릿자루 같다(빌려 온 빗자루 같다). 대사도 거의 없다. 배우의 치열을 유심히 보는 악취미가 있지만 나는 단 한번도 그의 치열을 본 적이 없다. 만약에 그의 치열을 본 적이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는 이가 등장한다면 내 전 재산 500원을 아낌없이 드리리라. 그만큼 그는 말을 아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연기력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관객은 없다. 나 또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옹의 열혈 찐 팬이지만 그의 연기력이 거슬렸던 적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배우가 아니다. 따라서 그를 두고 연기 못하는 형편없는 배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연기를 잘 못한다기보다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왜 ? 그는 배우가 아니니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신소리냐고 지청구를 날릴 분도 계시겠지만, 어쩌냐 ?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미국 평단을 지배했던, 아니 씹어먹었던 폴린 카엘이라는 평론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물평이다. 윗 글을 읽고 나에게 지랄을 하려고 했던 분들은 모두 합죽이가 됩시다잉, 합 !!! 폴린 카엘의 하마평에 대하여 100% 동의한다. 폴린 카엘이라는 거대한 영화 권력에 순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맞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가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다, 황량한 풍경 ! 그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서부의 사막을 닮았다. 푸석푸석한 건성 피부의 깊은 주름은 강줄기 갈래 같다. 
말라비틀어져서 바닥을 드러낸 계곡. 다듬어지지 않은 굵은 수염은 어떤가 ? 마치 모래바람에 굴러다니는 덩굴이나 선인장을 닮았다. 늙어갈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더 황량한 사막을 닮는다. 이 세상에 그보다 훌륭한 사막의 풍경을 재현하는 배우가 존재할까 ? 그동안 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수없이 많은 배우의 부고를 듣지만 캔 로치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부고 앞에서는 이른 봄날에 느닷없이 내리는 폭설처럼, 자주 사용하는 개인적 관용구를 사용하자면 늦겨울 이른 봄날에 얼었던 마당의 수돗물이 봇물 터지듯 느닷없이, 눈물을 흘릴 것 같다(해리 딘 스탠튼의 부고에 눈물을 훔쳤던 나다, 아흑 흙흙흙). 
윌리엄 머니는 용서받지 못한 자이면서 동시에 앞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자이기도 하다. 총잡이 윌리엄 머니는 잔인한 살인자(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그를 용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손을 씻은 늙은 윌리엄 머니는 돼지농장에서 돼지 똥을 치우며 생활한다. 범죄와 갱생을 다룬 모든 범죄 영화들이 그렇듯이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그를 가만 둘 리 없다. 돼지 똥을 푸던 삽을 버리고 다시 한번 총을 든 윌리엄 머니. 명분이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의 이름(munny)에서 알 수 있듯이 money를 위해 총을 든다. 두 놈을 해치우는 데 천 달러. 늙고 병든 윌리엄 머니는 미션 / 파서블할 수 있을까 ? 
한때 아내의 충고를 듣고 위스키를 끊었던 술주정뱅이 윌리엄 머니가 살인 청부를 위해 도착한 마을 이름이 빅위스키라는 아이러니가 복선으로 깔린다. 그리고 탕, 탕, 탕 !!! 이 영화에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말이 없다. 입술이 얇은 사람은 말이 많다지만 그의 얇은 입술은 도통 열릴 일이 없다. 젊었을 때 늙어보였던 그는 늙을수록 더 늙어보인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리얼 사막의 풍경이다. 지금 우리는 사막의 총잡이를 연기하다가 그만 사막이 된 남자를 보고 있다. 고전주의 서부 영화의 최고 걸작이 << 수색자 >> 라면 수정주의 서부 영화의 최고 걸작은 << 용서받지 못한 자 >> 이다. 압도적 걸작이다. 



                             
대한민국 1호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악담 전문가입니다. 정담을 나누기에는 성격이 지랄 맞고, 좌담을 나누기에는 교양이 짧습니다. 그래서 악담을 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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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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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치와 프랭크 허버트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무비 혹은 필름. 전자는 산업적인 측면에 초점을, 후자는 문화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감독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 혹은 영화작가. 데이비드 린치는 영화감독보다는 영화작가'란 이름이 익숙합니다. 그는 영화사에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긴 거장입니다. 그가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평론가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이 위대한 감독을 숭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평론가들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한몸에 받은 감독이지요. 하지만 그에게도 흑역사는 있는 법입니다. 

<< 이레이저 헤드 >> 와 << 엘리펀드 맨 >> 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감독을 눈여겨본 제작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디노 드 로렌티스입니다. 영화 홍보사들은 디노 드 로렌티스'라는 이름 앞에 " 세계적(인 제작자) ㅡ " 이라는 딸랑구(아부하는 句 글귀)를 붙이기 좋아합니다. 뭔가 있어 보이니까, 크아.             전도유망한 젊은 감독과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성서를 반반 섞은 원작 그리고 세계적인 제작자의 만남은 그 자체로 화제였습니다. 1700명의 영화 스텝들, 80개가 넘는 대형 세트장 그리고 오랜 촬영 끝에 완성된 작품이 바로 데이비드 린치의 << 듄, 1984 >> 입니다. 

잘 만들었냐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개떡 같은 영화입니다. SF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미술 디자인인데 이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마치 싸구려 인형극에 나오는 무대 같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90년대에 비디오 테이프로 보았는데 " 주옥 " 같은 영화를 기대했다가 " 줬 " 같은 영화여서 허탈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저의 첫 인상 비평은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구나. "

개떡 같은 영화였습죠. 영화가 끝났을 때 줄거리가 이해가 안 가서 교보문고로 달려가 원작 소설 << 듄 1 >> 를 사서 집으로 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감독 스스로도 자신이 만든 작품이 쪽팔렸던 모양입니다. 최근에 런닝타임 3시간짜리 영화 버전(TV버전판)으로 다시 보았는데 영화 타이틀에는 감독 이름이 데이비드 린치가 아니라 알란 스미스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  헐리우드 영화판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가 창피할 때 가상의 감독을 내세우게 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바로 알란 스미스죠( 또 한 명은 존 도우입니다). 웬만하면 못난 자식이라도 자기 자식은 품에 안기 마련인데 린치는 자식을 호적에서 파 버린 모양입니다. 

앞으로 너는 내 자식 아니다잉 ~  크아, 이 얼마나 조선 가부장적 서사란 말입니다. 일종의 영화판 파묘죠. 자식을 호적에서 파 버린 무정한 아버지, 데이비드 린치(농담이고요).  이 영화의 주요 무대가 사막이어서 그랬을까요 ? 영화 보는 내내 << 아라비아의 로렌스 >> 가 생각나더군요. 에너지 광물 스파이스는 명백히 석유에 대한 은유이고, 각 행성들은 서구 열강 제국을, 그리고 광물이 있는 행성의 원주민 부족 프레맨은 아랍 연합인 셈입니다. 주인공 폴의 가문인 " 아트레이데스 " 는 트로이 전쟁 영웅 아가멤논의 성인 " 아트레우스 " 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주 행성의 지도자 폴 아트레이데스는 로렌스, 예수, 모세, 그리고 아가멤논을 알맞게 뒤섞은 캐릭터로 이해하면 됩니다. 요약하자면 << 듄 >> 은 우주 행성에서 벌어지는 아라비아 로렌스의 트로이 전쟁 버전 혹은 성인용 스타워즈1) ??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데이비드 린치는 드니 빌뇌브의 << 듄 >> 시리즈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 열등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질투심은 있지 않았을까 ?  개인적으로 데이비드 린치의 열혈 팬이지만 작가주의라는 이름으로 이 영화를 무작정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까이예 뒤 시네마의 작가주의 정책에 신물이 나는 1인입니다). 

정말 더럽게 못 만든 영화거든요. 보는 내내 구닥다리 디자인에 혀를 끌끌 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보는 것은 참말로 행복하니까요. 영화 보는 내내 조롱의 삼삼칠 박수를 치며 외쳤습니다. 재밌다재밌다재밌당 ~ ㅎㅎㅎㅎ




1) << 스타워즈 >> 가 개봉되었을 때 프랭크 허버트는 몇몇 SF 소설가들과 함께 << 조지 루카스를 고소하기에는 너무 거물인 작가 모임 >> 을 결성한다. 이 영화가 소설 << 듄 >> 을 명백히 표절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듄 시리즈를 집필 중이었던 작가는 5권에서 스타워즈의 표절을 비판하는 문장을 삽입한다.  "사람들은 '그 사람은 3P-O(스타워즈의 깡통 로봇)야'라고 말하곤 했다. 질이 떨어지는 재료로 만든 싸구려 모조품으로 주위를 장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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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형사가 들려주는 경험담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을까 ?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언제 들어도 흥미쥔쥔하다(흥미진진하다). 그중에서도 베테랑 형사들이 풀어내는 인간 욕망의 맨밑바닥 썰은 조선 한라봉 다음으로는 국내 최고봉이다. 그래서 잠을 자기 위해서 침대에 누우면 사건사고 내용을 다룬 방송을 청취하며 잠을 잔다. 어미가 보험금을 노리고 어미의 어미를 죽이고, 어미의 자식을 죽이고, 애인을 토막 내고, 불을 지른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야기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 휴먼 스토리 "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베테랑 형사가 풀어놓은 썰 중에서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았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스무 살 아들이 죽었다. 살인사건이다. 형사가 도착했을 때 사건 현장은 물컹물컹한 피비린내가 역하게 퍼지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던 형사는 한쪽 구석에서 대성통곡하는 중년 여성을 발견한다. 아들의 어머니'다. 넋을 놓고 곡을 얹는다. 형사는 우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 사건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로 의심한다. 왜 그랬을까 ? 왜 그랬을까 ??? 베테랑 형사가 보기에는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가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리 내어 울고 있는데 표정은 울고 있는 표정이 아니라 평화로운 표정이었던 것이다. 가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형사의 오해였다고 한다. 
피해자의 어머니가 성형 중독자이다 보니 얼굴 근육이 잘리고, 보톡스에 의해 근육이 마비되고, 피부 살가죽 밑에 필러가 삽입되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없기에 발생한 무표정이었던 것.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 무표정 " 이라기보다는 " 표정 무( : 표정을 지을 수 없다) " 에 가깝다고 해야 된다. 왜냐하면 무표정이야말로 가장 정교한 표정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성형 수술과 성형 시술이 얼굴 표정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배우들이 얼굴에 손을 댄 상태로 브라운관에 등장하여 연기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기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드라마 << 힘쎙 여자 강남순 >> 에서 배우 김정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때 그 베테랑 형사의 기괴했던 경험담이 생각났다. 김정은의 표정 무'에서 불쾌한 골짜기(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해당 존재가 인간과 많이 닮아 있을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다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를 경험하는 것은 발광 다이오드 3파장 극성을 가진 나의 취향 탓일까 ? 나이가 들면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해야 되는데 50에 이른 배우가 꾸역꾸역 30대 여성을 연기하니 목불인견이다. 우리는 관객과 배우(여성 배우에 한해서)가 함께 늙어가는 동시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꽃다운 젊음이 지면 브라운관에서 사라지거나 어느 날 갑자기 (얼굴에 손 댄) 회춘한 얼굴로 등장하니 관객과 배우가 함께 늙어간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여성의 가치를 젊고 아름다운 것에 높은 점수를 주려고 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 때문이다. 늙음의 증후들을 나쁜 것으로 대하다 보니 나이 든 (여성) 배우들은 하나둘 설 자리가 없어 사라지고 몇몇만 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웃의 추천으로 호기심이 생겨 < 트루 디텍티브 시즌 4 > 예고편을 보다가 관객과 함께 늙어가는 조디 포스터의 얼굴을 보자 묘하지만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마을 어귀에 다다를수록 늙은 나무는 흠집이 많다고 한다. 아이들이 그 나무를 놀이터삼아 나무를 친구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디 포스터의 깊은 주름을 보면서 문득 마을 어귀에 가까운 늙은 나무가 생각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을 어귀에서 우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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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마에게 영혼을 판 출판사 판촉 사원의 심정으로

신기하게도 나는 학창시절부터 " 죽기 전에 읽어야 할 " 영화나 문학 리스트가 있으면 < 도장 깨기 정신 > 으로 체크 리스트를 작성해서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었다. " 그래, 남들이 국영수에 올인할 때 나는 국영수는 포기하고 영화와 문학에 올인하자 ! " 지금도 <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1001편 > 에 등록된 영화를 보느라 밤마다 피똥을 싸며 항문에 학문에 열중하고 있다. 이 리스트를 전혀 신뢰하지는 않지만 사내새끼의 교묘한 오기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학창시절에 국영수 포기하느라 인생 폭망했는데 이 목표라도 미션/파서블해야 하지 않겠는가 ! 다음에 소개할 세 편의 문학 작품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국내에 처음 소개된,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 세 편이다. 책 파는 데 진심이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출판사 판촉 사원의 심정으로 이 글을 남긴다(전에 써두었던 문학 리뷰 글을 수정하여 다시 올린다).

2. 사소한 일(2017), 아다니아 쉬블리 ㅣ 출판사 강

우리는 그동안 팔레스타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면 뉴스가 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면 뉴스가 안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한두 명의 청년들이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살해된다고 한다. 대부분은 검문 불응이나 태도 불순 따위의 사소한 이유이다. 과연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 " 소녀가 도망가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다 모래 위로 쓰러지고, 이어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총성이 들렸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드리웠다. 그녀의 머리에서 모래 위로 피가 쏟아졌다. 오후의 햇살이 모래 색깔과 한가지인 그녀의 벗은 엉덩이에 모이는 동안 모래는 쉬지 않고 그녀의 피를 빨아들였다. 운전병은 소녀가 죽지 않은 것 같다고,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다고, 확인 사살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여섯 발의 총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1949년 8월 13일 아침이었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소설 << 사소한 일 >> 1부에 나오는 이야기다. 2부는 2000년대 서안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여성이 주인공이다. 총을 든 이스라엘 군인이 버스 승객을 대상으로 검문을 하며 신분증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긴장은 일상화되었지만 길들여지지 않는 불안이다. 여성은 우연히 옛날 신문을 통해서 1949년에 발생한 사건(1부) 을 다룬 기사를 읽는다. 그러고는 이내 괴로워한다. 왜냐하면 소녀(1부)의 사망일과 나(2부)의 생일이 겹쳤기 때문이다. 우연한 겹침이지만 괴롭다. 주인공 " 나 " 는 이 괴로움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그 소녀의 흔적을 찾아나서기로 한다.쉬블리는 소설의 1부와 2부를 데칼코마니 구조로 설계하여 1949년과 2000년대의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제의 비극과 오늘의 비극이 동일하다면 내일의 비극은 오늘의 비극과도 동일한 것은 아닐까 ? 이 소설의 진짜 공포는 오늘의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내일도 변하지 않을 불안과 공포다. 그동안 우리는 반이스라엘 단체가 이스라엘에게 가하는 테러에만 (미디오)노출되었을 뿐, 정작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가해진 무수한 학살의 역사에는 무지하다. 아니, 어쩌면 팔레스타인의 반복된 고통에 대하여 지겨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우리를 향해 쉬블리는 이렇게 말한다.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아는데, 인간은 왜 그러질 못하는가? ”

3. 오블로모프 1,2 (1849년),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ㅣ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끌리는 까닭은 순전히 내 기질 탓이다. " 이상적 인간 " 보다는 " 이상한 인간 " 에게 끌리는 것은 나의 다크하고 멜랑꼴리하며 삐뚜름한 서정과 함께 독특한 B급 발광 다이오드적 3파장 극성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남성에게 추구하는 불굴의 의지, 정력인지 정렬(열)인지 모를 이상하게 들뜬 열정, 과도한 대의와 명분, 관악산 승냥이 이리의 본성을 숨긴 의리와 남성 간 통정을 뒤집어쓴 우정 따위에 대하여 체질적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쌍권총을 든 홍콩 영화 속 영웅들이 이쑤시개 입에 물고 우정과 의리를 말하거나 현대판 마블 속 주인공들이 시커먼 망토 입고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눈알을 불알이며 허리를 고추세우고 이 사회를 자지우지할 때마다 심한 현기증을 느끼곤 한다(독자여, 문장 속 오타에 숨겨진 행간을 알아차리시라). 도대체 왜 저들이 이상적 남성상이란 말인가.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지만 무엇보다도 < 지하생활자의 수기 > 는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절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정 하는 작품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 않을 수 있다. 지하생활자의 찌질함은 내가 꽁꽁 숨기고자 했던 나의 불온한 이드였으니 보는(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하생활자가 길거리에서 어깨빵을 상상하며 난투극을 벌이는 에피소드는 알파 메일 사회에서 기죽고 살아가야 하는 고개 숙인 남성들이 은밀하게 꿈꾸는 판타지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남성들, 인정 ? 남성에게 있어서 " 어깨 " 는 " 제 2의 남근 " 이다. 어깨를 툭 친다는 것은 나의 소중이를 슬쩍 건드린다는 소리이니 남자라면 발기탱천하여 분기탱천하여 결투라도 신청해야 된다. 그래서 길에서 우연히 어깨빵을 했다는 이유로 살인극이 자주 벌어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찌질한 남성 서사인가.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와 함께 러시아 3대 작가로 알려진 곤차로프(Ivan Aleksandrovich Goncharov)의 << 오블로모프 >> 는 지금까지 묘사된 적 없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다. 작은 키에 배는 남산 만하고 부모 잘 만나서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서의 열등감에 쩔어 있다. 그의 주변머리를 보아 몇 년 지나면 넓은 이마를 세월의 훈장처럼 새길 것이 분명하다. 그는 볼품없는 외모로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갓 나이 서른을 넘겼지만 단 한번도 연애를 한 적도 없다. 그의 비사교적인 성격은 그를 은둔자로 만든다. 그는 쇼파를 침대삼아 24시간 잠만 잔다. 얼핏 보면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부유한 유한계급을 대표하는 한심한 찌질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일리야 일리치 오블로모프를 결코 미워할 수 없다. 그에게는 선한 본성과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정신 그리고 자연주의에 동화된 시인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불꽃 같은 사랑의 감정이 휘몰아친다. 오블로모프는 올가 프세니치니라는 " 너무나 " 매력적인 여성에게서 사랑 고백을 듣지만 그는 적극적인 구애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오블로모프는 생의 의지도, 욕망의 실현도, 성실한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다. 그의 무위無爲는 허먼 멜빌의 << 필경사 바틀비 >> 에 나오는 바틀비의 I would prefer not to( :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를 닮았다. 바틀비가 무력(無力)을 통해 무력(武力)를 시위하는 것처럼 오블로모프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무위는 순리를 따르며 인위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자연주의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능이라기보다는 노장(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을 닮아다. 영화의 배경이 자본주의의 도입기였던 19세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으로도 읽힌다. 이 소설은 무기력한 남자의 무중력 연애를 다루지만 공교롭게도 연애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남자의 연애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매우 독특한 연애 소설로도 읽힌다. 독자인 우리가 오블로모프의 게으르고 무(기)력한 연애가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는 그의 기질이 타락과 퇴폐, 그리고 위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순수한 무저항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선한 남자의 무중력 연애 서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애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는 누구보다 복잡하고(변덕스럽고), 복잡한 만큼 나약하며(무능하며), 나약해서 순수한(무해한) 성격을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오블로모프라는 매우 복잡한 인물을 탁월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게도 생생한 개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4.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1955년), 브라이언 무어 ㅣ 출판사 을유문화사

재미가 없으면 재능이 있든가, 재능이 없으면 재력이 있든가, 재력이 없으면 매력이 있든가, 매력이 없으면 젊음이 있든가. 유감스럽게도 40대 중년 여성 주디스 헌은 젊음도 없고, 재미도 없고, 재능도 없고, 재력도 없고, 매력도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없는 것은 비단 이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다. 브라이언 무어의 놀라운 장편소설 <<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 은 통속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매우, 매우, 매우 인상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오우, 언빌리버블이야. 일가친척이라고는 늙은 이모가 전부였으나 이모의 병수발을 드느라 결혼도 못한 채 젊은 시절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이제는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 누구 못지 않게 외로운 여인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파토스는 파란만장하다. 무고한 남자의 무해한 인생을 다룬 << 스토너 >> 의 신랄하게 재미있는 여성 버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혈연단신인 주디스는 적막하고 쓸쓸한 아일랜드 벨파스트 지역에 있는 하숙집에서 독립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몇몇 아이들을 상대로 한 피아노 교습으로 받는 교습비와 형편없는 연금을 보태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한다. 그녀를 힘들 게 하는 것은 생활고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천성이 선한 여자이지만,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남자는 하숙집 여주인의 오빠가 전부이지만 그가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유는 사업 자금이다(그는 그녀가 돈 많은 여자라고 착각한다). 출판사 보도자료를 인용하자면 그녀는 "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 미워하기보다는 모른 척하고 싶은 인물, 친해지기에는 불편하고 방치하기에는 미안한, 그래서 그냥 없는 셈 치고 싶은 사람 " 이다. 세상이 그녀에게 무관심할 수록 외로움은 뼛속까지 스며든다. 그럴수록 술에 의지한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외로움이라는 녀석의 최고의 술상무는 외로움이라는 녀석이니까. 다들, 알면서....... 일반 통속의 스토리텔링을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주디스 헌은 끝까지 외롭고, 무해하며, 무고한, 그렇다고 친해지고 싶지는 않지만 친해지기에는 불편한, 그래서 그냥 없는 셈 치고 싶은 사람으로 남는다. 자비도 없고 구원도 없다. 이 소설은 문학적 고독의 허세마저 제거한 채 외로움의 정서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느닷없이 소주 됫병 나발 불고 밤거리에서 지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영화 << 길 >> 에서의 짐파노도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 저기, 저어기 아일랜드 변두리 벨파스트에 사는 늙은 독신녀의 이야기가 왜 이토록 내 얘기 같아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일까. 오늘, 소주 됫병 마시고 나발 불린다. 말리지 마시라. 영국 가디언지가 선정한 < 죽기 전에 읽어야 할 1000권 > 에 선정되었으며 BBC ART 선정 < 가장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 100선 > 에 뽑힌 작품이다. 걸작이다. 끝으로 읽은 책의 수보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 글을 더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의 보도자료를 작성한 직원에게는 보너스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탁월하게 잘 쓴 보도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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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02-28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곰발님^^ 추천해주신 3권 다 읽어보고 싶네요ㅎ


곰곰생각하는발 2024-02-28 17:22   좋아요 1 | URL
네에. 셋 다 재미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