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 1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백금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지식과 영성을 두루 겸비한 설교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학문적인 지식과 결심문에서 드러나는 금욕적인 삶의 모습들은 그의 저작들을 더욱 빛내주는 역할을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는 교회사에 있어서 최초 부흥 역사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기록이라 평할 만 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후반 저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신앙감정론>에서 보여준 정교한 부흥의 심리적인 부분을 이미 본서에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신학적인 내용을 설명함에 있어서 철저한 사례 분석을 통하여 진정으로 회심한 이들에게서, 그리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영적인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서는 서론에서 시대적인 배경과 부흥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을 덧붙임으로서 이러한 원문의 중요함을 잘 인식시키고 있다.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잘 정리된 소제목들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한 눈에도 에드워즈의 글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릴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친절한 배려가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어쨌거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생은 짧았으나 그 설교들은 한편 한편 정말 주옥과 같아서, 지금도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영적 거인임에 틀림없다. 그의 설교를 이 시대에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유익임에 분명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기독교 강요 3-4권 합본
존 칼빈 원작, 김종두 글.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 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를 위한 최고의 입문서이자 개론서

 저 유명한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고전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 만 하다. 그 방대함에 주눅이 들긴 하겠지만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교리의 초석이 되는 이 책은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도 큰 도전과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용의 어려움과 분량인데 번역된 서적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정도이니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은 평신도라면 이 책을 막 시작하려는 직전의 부담감을 어느 정도는 느낄 법도 하다.

 <만화로 보는 세계선교 발달사>의 저자인 김종두 선생의 신간이 나왔다. 이 분이 그려낸 책은 다름아닌 바로 이 <기독교 강요>다. 만화로 그려진 기독교강요라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면 이 책이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실 나도 어릴 적 신약성경을 각색하여 녹음한 테입과 그림으로 된 책을 읽으면서 자랐고,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그 책은 약간의 어색함과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배경이 되는 데에 일조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야곱이나 모세의 이야기이면 몰라도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 기독교강요를 어린이에게 읽힌다는 건 어떤 면에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니까.

 이 얘기는 잠간 접어두고 책 이야기를 다시 해 보자. 이 책의 시작은 곧장 기독교강요의 내용으로 이끌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의 의도가 그런 것일 수 있었겠지만, 만화의 시작은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어떤 책인지, 칼빈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2권 중 첫 권 223페이지 가운데 100페이지를 할애하였으니 거의 1/4의 분량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감동을 받은 칼빈의 책에 대한 초대이자 그 내용을 재미있게 혹은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려 한 시도인 셈이다. 만화라는 필터를 통해 저자가 보여주려는 기독교강요의 매력은 실로 대단하며 이러한 매력적인 책에 대해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예화들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보다 직관적으로 칼빈과 그 값진 책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고 있다.

 본 만화는 2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권의 기독교강요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성에 대한 철학적, 혹은 사색적 접근을 독자의 머리 속에 인식시키는 것이리라. 신학 서적을 접할 때 겪는 이러한 어려움은 적어도 나에게는 매번 존재하는 부분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러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혹은 명료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없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의 탁월함은 만화라는 매개물을 사용한 것 자체에 큰 가치를 둘 수 있겠다. 만화라고는 하지만 교리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추상적인 이미지의 가시화는 그림이라는 매개물이 효과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가 가질 법한 생각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내가 볼 때에는 내 유년기 때에 추억으로 남아있는 촌스러운 신약성경 이야기처럼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성인경 목사님의 <프란시스 쉐퍼 읽기>란 책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대학 시절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세계관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는 하나의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의 전집은 그 분량이나 내용면에서 그 시기의 나를 압도했다. 철학자들부터 시작해서 성경 해석, 문화, 역사... 무엇보다 그 어려운 내용의 전집 분량이 만만치 않았고 나는 한 두 권의 책을 읽고는 쉐퍼의 핵심 메시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때 가뭄의 단비처럼 만난 책이 성인경 목사님의 쉐퍼 사상 입문서이자 개론서인 <프란시스 쉐퍼 읽기>였다. 그 책은 쉐퍼에 대한, 그의 전집에 대한,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적당한 분량의 책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쉐퍼 전집이 그렇게 힘든 책이었나 싶지만 그 때에 그런 책이 없었다면 나는 이십대 초반에 기독교세계관의 매력을 파헤치는 데에 주춤하며 멈춰섰을 것이다. 이제와서 그것들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김종두 선생의 만화는 그런 책이다. 기독교강요를 위한 입문서이자 개론서로서 그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만화를 택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유효적절했고 기독교강요를 정말 가장 잘 설명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그러면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의미를 되새기려면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가슴판에 새겨질 그런 책이라는 거다. 어쩌면 어린이에게도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시각적인 기억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말이다. 기독교강요를 읽자. 힘들다면 이 책의 도움을 받으라. 그리고 원서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 가볍게 다시 꺼내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기독교 강요 1-2권 합본
존 칼빈 원작, 김종두 글.그림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 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를 위한 최고의 입문서이자 개론서

 저 유명한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고전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 할 만 하다. 그 방대함에 주눅이 들긴 하겠지만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 교리의 초석이 되는 이 책은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에게도 큰 도전과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용의 어려움과 분량인데 번역된 서적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정도이니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읽은 평신도라면 이 책을 막 시작하려는 직전의 부담감을 어느 정도는 느낄 법도 하다.

 <만화로 보는 세계선교 발달사>의 저자인 김종두 선생의 신간이 나왔다. 이 분이 그려낸 책은 다름아닌 바로 이 <기독교 강요>다. 만화로 그려진 기독교강요라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면 이 책이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사실 나도 어릴 적 신약성경을 각색하여 녹음한 테입과 그림으로 된 책을 읽으면서 자랐고,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그 책은 약간의 어색함과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신앙의 배경이 되는 데에 일조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야곱이나 모세의 이야기이면 몰라도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내용들로 가득 채워진 기독교강요를 어린이에게 읽힌다는 건 어떤 면에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니까.

 이 얘기는 잠간 접어두고 책 이야기를 다시 해 보자. 이 책의 시작은 곧장 기독교강요의 내용으로 이끌지 않는다. 어쩌면 저자의 의도가 그런 것일 수 있었겠지만, 만화의 시작은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어떤 책인지, 칼빈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2권 중 첫 권 223페이지 가운데 100페이지를 할애하였으니 거의 1/4의 분량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저자가 감동을 받은 칼빈의 책에 대한 초대이자 그 내용을 재미있게 혹은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려 한 시도인 셈이다. 만화라는 필터를 통해 저자가 보여주려는 기독교강요의 매력은 실로 대단하며 이러한 매력적인 책에 대해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예화들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보다 직관적으로 칼빈과 그 값진 책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들고 있다.

 본 만화는 2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권의 기독교강요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성에 대한 철학적, 혹은 사색적 접근을 독자의 머리 속에 인식시키는 것이리라. 신학 서적을 접할 때 겪는 이러한 어려움은 적어도 나에게는 매번 존재하는 부분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러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혹은 명료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없을까 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의 탁월함은 만화라는 매개물을 사용한 것 자체에 큰 가치를 둘 수 있겠다. 만화라고는 하지만 교리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추상적인 이미지의 가시화는 그림이라는 매개물이 효과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가 가질 법한 생각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내가 볼 때에는 내 유년기 때에 추억으로 남아있는 촌스러운 신약성경 이야기처럼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성인경 목사님의 <프란시스 쉐퍼 읽기>란 책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대학 시절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세계관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는 하나의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의 전집은 그 분량이나 내용면에서 그 시기의 나를 압도했다. 철학자들부터 시작해서 성경 해석, 문화, 역사... 무엇보다 그 어려운 내용의 전집 분량이 만만치 않았고 나는 한 두 권의 책을 읽고는 쉐퍼의 핵심 메시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 때 가뭄의 단비처럼 만난 책이 성인경 목사님의 쉐퍼 사상 입문서이자 개론서인 <프란시스 쉐퍼 읽기>였다. 그 책은 쉐퍼에 대한, 그의 전집에 대한,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적당한 분량의 책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쉐퍼 전집이 그렇게 힘든 책이었나 싶지만 그 때에 그런 책이 없었다면 나는 이십대 초반에 기독교세계관의 매력을 파헤치는 데에 주춤하며 멈춰섰을 것이다. 이제와서 그것들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김종두 선생의 만화는 그런 책이다. 기독교강요를 위한 입문서이자 개론서로서 그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만화를 택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 유효적절했고 기독교강요를 정말 가장 잘 설명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그러면 이 책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의미를 되새기려면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가슴판에 새겨질 그런 책이라는 거다. 어쩌면 어린이에게도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시각적인 기억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말이다. 기독교강요를 읽자. 힘들다면 이 책의 도움을 받으라. 그리고 원서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 가볍게 다시 꺼내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 - 대화 04
최봉림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0년 6월
평점 :
절판


최봉림, "세계 사진사 32장면 (1826~1955)"이란 책에서
그의 글솜씨와 넓이를 엿보았다.
마침, 그의 책으로 한 권이 더 검색되어 급하게 구해 읽었던 이 책은
슈타이켄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인터뷰 형식을 취한 독특한 책이다.
한국인 저자가 인터뷰 형식을 차용했다는 신선함 뿐 아니라
얇은 책 치고는 꼼꼼히 쓰여졌다.
디자인하우스의 편집, 사진의 질, 가격 모두 맘에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마이클 호튼 지음, 김재영 옮김 / 나침반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마이클 호튼의 두 책

/복음이란 무엇인가(부흥과개혁사)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

 

패스트푸드처럼 길들여진 미국식 복음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할리우드 영화에 미쳐있던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때부터 미국 영화의 제목과 감독, 주연 배우들 이름은 물론 영화의 스타일이나 기타 세세한 내용까지도 외우고 다닐 정도다. 종국에 그 친구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장면 장면을 짜깁기해 놓은 것으로 밝혀지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미국 문화에 너무나 깊게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그 즈음에야 처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피자헛'에서 이태리식이 아닌 미국식 피자를 시켜먹고 '스타벅스'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며, '와퍼'나 '빅맥' 같은 햄버거에 <터미네이터>와 <프렌즈>를 즐기며 보며 자라온 나에게서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 문화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Praise & Worship'이란 용어는 한국에서 특정한 찬양 집회의 형태를 의미한다. 또 한국에서 일어나는 찬양집회의 스타일은 정확하게 'Hosanna Integrity'나 'Vineyard Church'에서 행하는 스타일과 일치한다. 결국 한국 교회의 찬양 집회는 그 스타일 그대로를 한국말로 번역하여 따라한다는 의미다. 소그룹 운동, 극장식 교회, 내적 치유와 같은 용어들은 미국 교회에서부터 발생되어 한국으로 넘어온 개념들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좋건 싫건 세속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넘어가자. 마이클 호튼의 저서인 <복음이란 무엇인가>(원제: Putting back into amazing grace)는 책에 쓰인 대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 즉 교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세계로 초대한다. 마이클 호튼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접한 대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만인제사장주의, 종교개혁의 보편성, 실재성, 예배중심성에 대한 주의 환기로 우리를 교리의 중심으로 이끈다. 

 

복음은 24시간 편의점처럼

이 책의 흐름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기본진리와 일치한다. 도예빌트가 완성한 창조, 타락, 구속의 흐름을 따르면서 예정론과 성육신, 소명과 중생, 칭의, 교회와 성례, 그리고 종말까지 우리가 명쾌히 정리하고 내적 확신을 가져야 하는 중심 교리들을 모두 건드리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집중한 교리적인 측면을 서술하기보다는 그간 기독교 현대적 이슈들을 건드렸던, 웨스트민스터의 신학 교수로 하여금 왜 또다시 복음주의적 정통 교리에 집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어쩌면 그러한 컨텍스트가 우리에게 더 큰 시사점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호튼의 전작인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는 이 책과 함께 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 사회로부터 신앙의 근본적인 '수혜를 입는' 우리에게 이 책은 시사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이클 호튼은 이 책을 통해서 미국 복음주의자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시민 생활과 문화 생활에서 기독교 몰락의 주범이며, 기독교적 활력의 침체의 책임은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화된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서술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입교인 자격에 회심의 체험을 요구한 지 불과 30년이 지난 1662년에 와서 성찬이 "중생의 여부와 관계없이 품행이 단정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다는 점과 당시 기독교가 점점 타협을 통하여 한 사회를 통합 유지시켜주는 '시민종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또한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주의적 정통신앙을 포기할 때, 그들은 가족과 교회와 지역 사회 및 학교와 직장에서 그들에게 성경적 원리대로 행동하며 사고할 수 있게 하는 지적 사고의 체계 또한 함께 버렸으며 홉스의 말을 인용하면서"교회들은 세속 사회와의 지적 접촉을 회피하였고 신앙이 지적 경험의 총체적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호튼은 제2차 대각성 운동 기간(1775~1825)에 대중적인 부흥 운동을 통하여 신앙의 객관적 내용이 신앙의 실존적 행동으로 대체되어 버렸음을 강하게 비판한다. 

"죠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끌었던 제1차 대각성 운동을 제2차 대각성 운동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초기의 대각성 운동시 신학적, 철학적, 학문적 천재인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전도자였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초대했는데, 다름 아닌 교리에 대한 명료한 선포를 통해 그 일을 수행했다…(이하 중략)…그러나 제2차 대각성 운동시에는 메시지가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되었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강조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있었다면 두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리하여 구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듣는 사람들이 해야만 할 일을 할 수 있게 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테크닉과 방법의 큰 체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나 휫필드에게는 부흥이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였다. 그에 반하여 나다나엘 테일러와 찰스 피니에게서 부흥은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것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특히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도 기적에 의지하지 않는다. 부흥은 순전히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한 철학적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소비자 중심이 최고의 복음?

이러한 신앙의 실용주의적인 잣대가 개입되었던 부분뿐만 아니라 미국 복음주의는 소비자 중심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19세기 말의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세일즈의 접근법을 그의 복음 전도 사업에 이용하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복음 전도자이지만 복음을 전할 때 여전히 세일즈맨이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한다. 즉 그는 단지 파는 상품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세기가 바뀐 후에 빌리 선데이는 강단을 무대로 바꾸기가 일쑤였으며 자기가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자이며 한 영혼당 단 2달러로 결과를 확실히 보장한다"고 자랑하곤 했던 점을 인용하며 현대 복음주의의 세일즈 마인드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크리스탈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지 인간 중심적이 아니라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에 루터와 칼빈이 신본주의적으로 생각한 것은 적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형세가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나 자아 존중이라는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죄는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에게서 신적인 존엄성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무엇이나 죄"라고 주장했던 점을 지적했고, 이렇게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토저의 말을 인용하여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신식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지 않는다. 그 새 십자가는 죄인에게 더 즐겁고 깨끗한 삶의 길을 보여 줌으로써 죄인의 방향을 고쳐 준다. 주장이 강한 사람들에게 새 십자가는 '자! 어서 주님을 향하여 너희 권리를 주장하라'고 말한다."

미국제 복음주의의 부정적 영향은 한국 교회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서도 "경영자 예수", "자아 회복을 위한 효율적 기독교"라는 문구들이 여전히 즐비하며 인간의 편의를 위해 예배당을 공연장처럼 혹은 수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크리스털 교회에 버금가는 교회를 짓고자 애쓰는 교회도 보인다. 인간의 죄는 상처로 대체되었고, 전 지구적 구원은 개인의 내적 치유로 변질되고 있으며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복음주의자들은 도리어 신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위안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생각을 품는다.

하나님 중심의 신학은 인간 중심, 인간 편의를 위한 시민종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호튼의 비판이었고, <복음이란 무엇인가>는 진정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그의 충정 어린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할리우드 키드로 대변되는 우리도 그의 메시지에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겠다.(끝)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실렸던 서평을 옮긴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