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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리뷰 - 이별을 재음미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 책 읽기
한귀은 지음 / 이봄 / 2011년 1월
평점 :
이별을 끌어올리다
이별리뷰. 무엇 때문에 그 아픈 시간을 다시 되새김하여야 하는가.
저자의 문장은 차갑고 냉철하다. 그래서 퍼뜩 정신이 들게 한다. 이별을 앓으며 자신을 갉아먹을 것이 아니라, 이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거름이 되도록 하라고 한다. 거센 고통의 뒤엔 정적의 시간이 오고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 사랑을 꿈꾼다. 부정하고 외면하며 믿지 않았던 것들이 그렇게 곁으로 온다.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연을 떠올리고 문득 내일을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삶이 달라졌음을, 내가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책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과정과 방법을 이야기’ 하는 한귀은 저자는 사람들 사이에 환부 없이 일어나는 고통을 문학이 치유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매순간 일어나지만 예방책은 없고, 한순간 모든 것을 잃은 듯 사람들을 허망하게 만드는 '이별'의 환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 곁에 서른 두 개의 문학작품과 서른 두 쌍의 남녀를 대동하여, 그들 안에 일어난 사랑과 이별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떠나간 사랑을 '애도'하듯 지나간 나를 '애도'하라고 부추긴다.
이별은 어떻게 오고,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별 후에 일어나는 부정과 슬픔의 감정은 어떤 것인지, 사랑할 때 우리가 보인 자세는 혹 비겁하지 않았는지, 사랑을 보내며 우린 어떤 애도의 과정을 겪을 것인지,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하고 난 후 다시 희망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을 다시 쓸 것인지 그녀는 친절하고 차근차근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과 이별을 만나는 사이 내안에 있는 상흔들을 퍼즐 맞추듯 그들과 하나하나 맞추어보았다. 관조하며 무심했던 시선은 글자들 사이를 바쁘게 지나가고 나는 어느새 책 안에 놓였다. 책 속에서, 또 다른 책을 통해 만난 이별 모습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들은 저자가 그려낸 이별 지도 속에서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이별을 발판삼아, 다시 사랑을 향하여, 그렇게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이별 앞에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실연당한 적이 있는 사람과 실연당한 적이 많은 사람.
- 프롤로그 중
다행인 건, 이것은 절대 나만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나 이별을 하고 상처를 입고 분노하고 체념하며 치유의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잠시 마음에 어지럽게 일던 바람이 멈춘다. 이 책은 이별한 자들을 호모세퍼러투스, 라고 정의하여 분류하고 있다.
Homo-separatus :
이별하는 사람. 즉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 너무 많이 집착하는 사람, 너무 많이 배려하는 사람, 너무 많이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려받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더 사랑받으려고 애쓰고 집착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람. 그만큼 상처받는 사람.
어쨌든 나보다 앞서 이별한 자들의 말을 들으며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 그들은 어쩌면 나보다 잔혹하고 매몰차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아주 잠깐, 고요했던 나의 이별에 안도감을 느낄지도. 잔인하게도, 사람이 위로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다. 바라보고, 공감하고, 안쓰러워하다가 자신의 상처를 견딜만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내 상처 또한 상대에게 오픈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내면의 갈등을 앓아야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책은 좀더 자유롭고 편한 상대다.
책은 늘 곁에 있다. 내면의 갈등 중에도 기대 없이 펼쳐볼 수 있다. 차오르는 감정에 힘이 든다면 잠시 덮어 이야기를 멈출 수 있다. 깨끗이 빗은 머리와 화장한 얼굴로 이별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소리내 엉엉 울면서 눈물을 떨구어도 괜찮다. 책은, 당신의 얼룩진 얼굴을 가만히 기억해줄 테니까. 지금 도착한 이별 역에서 당신이 걸음을 떼며 지나가는 그 길목을 가만히 지켜봐 줄 테니까.
사랑하는 동안에도 늘 두려웠던 것들. 곁에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도 언젠가 이별할 날의 감정을 곱씹고 있었던, 나는, 늘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만났고 사랑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사랑을 덜 받고 덜 주는 쪽을 택한 채로. 내 안에 불안정한 짐처럼 쌓여있던 이별을 끌어올리면서, 이 책을 읽을 준비를 했었다. 방한구석 깊숙이 밀어놓았던 여행 가방을 우연히 발견하고 천천히 지퍼를 열듯, 그렇게 먼지 이는 기억을 휘적거리다 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는, 이별이 이뤄지던 순간 그를 원망하고 욕하며 저주했던 마음은 없고 그 시간 앞에서 여전히 나약하고 미련하게 스스로를 숨겨버리려 종종거리는 나 자신만이 가득했다. 솔직하지 못하고 애써 괜찮은 척, 당신을 두고 돌아서던 나. 나를 말하지 않고, 나를 이해해주길 바랐던 어리석은 내가 덩그러니 그곳에 있었다. 불현듯 당신도 나로 인해 받은 상처로, 조금은 오래 헤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 이별의 주체는, 과연 누구였던 것일까.
나를 아프게 했던, 나를 가난하게 했던, 나를 미치게 했던, 나를 체념하게 했던,
그리고 나를 여전히 설레게 하는 이별, 이별……
나는 가끔 한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 떨리곤 한다. 나 혼자 이별해야 했던 사람. 너무나 겁이 나서 그가 불쑥 사라져 버릴까봐서 못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놓아버려야 했던 사람. 그 때 그에게 내가 먼저 말을 꺼내놓았다면 달라졌을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이따금 그 뒷이야기를 상상해보곤 한다. 어쩌면 그에 대한 기억마저도 영영 잃어버려야 했을지 모를, 이별이 또 기다리고 있었을런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들…… 나는 이렇게나마 지금 그를 기억할 수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추억하며 가슴 떨릴 수 있는 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 든든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좋은 이별은,
좋은 사랑을 위한 희망이 된다. 사랑했다면, 그것이 이별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존중은 계속되어야 한다. 억지로, 헤어진 연인을 떠나보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찰나의, 그/녀와 찬란했던 순간이 섬광처럼 터졌다 지더라도, 그런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기억은 그렇게 몸속 어디에서 폭죽처럼 켜졌다가 사위어가기도 하는 것이므로, 등 어딘가에서 폭죽이 터지고, 그것이 이내 뜨거운 눈물이 되더라도, 조금만 덜 안타까워하고, 덜 슬퍼하면 된다.
차츰 자가 지방이식을 하듯이, 이별의 실조가 사랑을 위한 영양으로 옮겨갈 터이니.
-p. 202
서른 두 개의 작품과 그 곁에 함께 놓인 다른 작품들, 내가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 속 이야기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미 본 것이 분명한데도, 문장화된 이야기 밖에서 이별에 놓인 인물들은 더욱 인간적이고 낯설게 다가왔다. 한 편의 시가 주는 애틋한 기다림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타자의 욕망을 욕망해버린 실수 (김승옥 「무진기행」), 자본주의 속에서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여자의 착오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사랑과 이별에 관한 각색 (황순원 「소나기」),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변형 (박완서 『그 남자네 집』) , 다른 사랑에 대한 존중 (김형경 『외출』), 이별이 사랑을 완성시킬 때 (김형경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 이별을 위해 쓴 편지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노력 (우애령 「정혜」 ) 등등. 한 작품 한 작품 속에서 이별을 바라보면서 또한 그 이전에 그와 나누었을 사랑을 되짚어본다. 이별하게 되었을 때 겪는 분노 다음 단계는 바로 반성이 아닐지. 사랑하는 동안 미처 챙기지 못했던 당신에 대한 마음들을 돌이켜보며 미안해하는 것. 그 때 다 쏟아붓지 못한 마음과 사랑에 집중하지 못했던 마음이 내내 마음에 걸리는 것.
사실 이 책은 끊임없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랑했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건 이별 앞의 '사랑'에 대한 모습들이다. 저자는 아마도 이별의 장면들을 골라 담으면서 독자가 사랑을 길어올리기를 기대했으리라. 우리가 사랑하면서 겪는 착각과 착오들을 만나며 그로 인해 뜻하지 않게 겪는 이별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사랑할 때는 오감을 열어두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읽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하고, 그의 일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 그를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그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에 갑갑해하고 서운해한다. 내가 주려고 했던 것을 이제는 받고 싶어 한다. 서로에게 익숙해질 무렵이면 자연스럽게 마음에 거리도 생긴다. 그가 나를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가 더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자존심에 조금 더 기다리고 조금 더 그를 기다리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아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중략)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하 유죄다. -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 어떤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도 없이 서로 헤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별하고 난 뒤엔 또다시 사랑을 찾게 된다. 그 순환속에는 연인 관계 뿐만 아니라 가족과 다른 인연, 그 밖의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이 돌아가는 사이클과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잃고 얻고 바라고 꿈꾸고 이루는 것. 그렇다면 지금, '지난 사랑에 대한 충분한 반성'을 통해 우리가 이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지난 시간, 나의 모자람과 사랑에 대한 어리숙함, 그리고 희망을 믿지 않는 나 자신과의 이별 아닐까. 새로운 사랑과 내일의 희망을 온전히 끌어안고 설렘을 느낄 수 있도록, 조금은 새로운 내가 되어 보는 것. 거울 앞에서 낯선 나를 찾게되는 것. 그것이 이별을 겪은 자만이 이룰 수 있는, 특권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별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이별을 준비하며, 조금씩 이별을 이루고, 조금씩 넓어지는 보폭으로 서둘러 이 시간과 멀어진다. 기억의 옷을 입고 그것은 아주 작게 마음 한켠에 밀어놓는다. 그러다 가끔 움직이는 몸 안에 툭, 하고 꾸역꾸역 부려놓은 시간들의 아련함이 쏟아져 왈칵, 우리의 어깨를, 가슴을 적신다.
이별을 위로 받기 위해 이 책을 들었다면, 당신은 이 책을 펼칠 시간을 조금 지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당신의 이별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도록 할 것이고, 이별을 인정하게 할 것이다. 보다 현실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할 것이다. 부드러운 위로 따윈 내일을 더욱 두렵게 할 뿐이다. 용기가 생겼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펼쳐 현실적이고 냉철하고 어쩐지 딱 떨어지는 이별 공식 위에 놓인 사람들 속에 나를 슬쩍, 끼워 넣어 보자. 결핍을 채우기 위해 먹고 물건을 사들이듯 서점으로 나가 이 책 저 책 곁을 기웃거리고 마음을 건드리는 책과 함께 버스를 지하철을 타자. 수많은 타인과 엉켜 어지러운 시간 속에서 넘기는 책의 갈피 사이에 지나온 시간들을 리뷰해 보자. 내게 일어났던 일은, 어느새 조금씩 나를 벗어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어느 책에서 본 상실과 이별의 장면이 되어 내 앞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는 다음 사랑에 대한 희망. 또 다시 이별을 겪더라도 조금은 성숙하게 그 시간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조금은 어색하게 자리잡기 시작할 것이다. 이별은 결국 지나가고 또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지나 온 것들로부터 벗어나 보다 가벼운 몸짓으로, 내일을 또 한 번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