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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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점>
개구리와 두꺼비의 단순하고도 앞일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특히 계획표를 짜고 그에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 씨앗을 뿌리고 언제 싹이 나올까 안달하는 모습, 먹고 싶은 과자 앞에서 자꾸 손이 나가는 모습 등이 재미있었다.
책 분량은 적지 않으나 글씨가 크고 짤막한 글 여러 개로 되어 있어서 처음 혼자 읽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도 알맞다.

아쉬운 점>
줄거리 위주의 책에 길들여져서일까? 내가 읽기에는 그다지 재미가 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듯. 초등 2학년 딸내미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행동을 마냥 재미있어 한다. 

2002/03/26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솔직한 느낌은 '이게 뭐가 재미있을까?'였다. 
그러니 위의 느낌글만으로 별점을 매긴다면 별 세 개 정도?

그러나 5년쯤 지나서 다시 읽었을 떄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 책을 재미없다고 생각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 

지금은?
강력 추천, 별 다섯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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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10-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외국동화분과 발제
 
산적의 딸 로냐
린드그렌 지음, 김라합 옮김 / 일과놀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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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달에 걸쳐 분과 사람들과 함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을 읽어나갔다. 린드그렌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끌었던 책은 《산적의 딸 로냐》였다. 이 책 속에는 '로냐'라는 매력적인 아이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와 많은 생각거리들이 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옮겨본다.


로냐라는 아이

로냐는 내가 어렸을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 초록지붕 집에 사는 앤이나 소설가의 꿈을 꾸는 죠우-이나 린드그렌의 유명한 주인공 '삐삐'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아이다. 아이다움과 어른스러움, 활달함과 침착함을 함께 지닌 아이. 이것은 로냐만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어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의 숨은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로냐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사뭇 다르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거짓으로 느껴지지도,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수리 마녀가 날아다니고 회색 난쟁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배경을 빼고 사람만 보면 옆집 아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린드그렌이 책 속에 그려낸 아이들을 보노라면 '정말 아이답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 속을 잘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로냐 또한 그렇다.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 마티스의 성이나 숲 속에서도 혼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만, 비르크와 만난 뒤에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 비르크와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고 속상해 하고, 그리고는 곧 후회하고 다시 친해진다. 언제나 올바르다고 믿던 부모의 다른 모습을 알고나서는 반항하고 집을 나오지만 바깥에서는 집을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아이다. 우리가 언제나 아이들에게서 보는 그 모습을 로냐에게서도 본다.

밝고 씩씩하고 생각할 줄 아는 아이 로냐가 나는 정말 좋다.


여자와 남자

로냐의 아빠 마티스와 그를 따르는 열두 명의 남자들은 다른 어떤 무리보다도 '남자답다'는 말이 어울릴 '산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던 산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힘으로 보르카 무리를 이기고 싶어하고 큰소리 치기 일쑤인 마티스지만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인색하지 않고 (이렇게 툭 하면 흥분하고 여러 번 눈물 흘리는 아빠는 책 속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 딸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잔걱정도 많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에 비해 엄마 로비스는 다정하고 꼼꼼하지만 큰 일이 닥쳤을 때는 침착하고 담이 크다. 로냐에 대해서도 마티스보다 한 발짝 더 뒤에 물러서서 지켜볼 줄 아는 엄마다.

슬픔에 겨워 울부짖는 마티스, 시끄러운 산적들에게는 고함을 치지만 슬퍼하는 마티스를 안아서 달래주는 씩씩한 로비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여자가…' 또는 '남자가…'라는 덫은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그런 생각에 대한 통쾌한 한 방이었달까. 이런 모습이 그려져도 어색하지 않은 건,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린드그렌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여자들의 자리가 높은 스웨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자식과 부모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한다. 마티스와 보르카는 숲을 호령하는 무지막지한 산적이지만 자식 일에는 한없이 마음 약해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자식을 보고 심란해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러나 로냐가 자라서 처음으로 숲에 나갈 때 마티스와 로비스가 어떤 말을 하면서 보내는지, 마티스에게 반발해서 집을 나간 로냐를 로비스가 어떻게 기다려 주는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올바른 부모의 자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이제 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자신의 틀에만 가둬놓지 않고 지켜 봐줄 줄 아는 부모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수리 마녀들과 회색 난장이, 그리고 보르카네 산적들을 조심해라."
"어떻게 생긴 게 수리 마녀고 회색 난장이인지, 누가 보르카네 산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너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곧게 난 오솔길을 찾도록 해라."
"강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죠?"
"헤엄을 쳐라."
"…또 조심해야 할 일이 있나요?"
"다 됐다. 이제 차차 하나씩 하나씩 터득하게 될 게다. 자, 가거라!" (1권 22-24쪽에서 부분 발췌)

… 굴 앞의 넙적 바위에서는 로비스가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딸 로냐야, 머리가 젖었구나! 헤엄쳤니?"
로비스가 물었습니다.
(중략)
로냐는 엄마 곁에 앉아,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산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들릴락 말락 조용히 흐느꼈습니다.
"내가 왜 왔는지 알지?"
로비스가 이렇게 말하자 로냐는 흐느끼며 웅얼거렸습니다.
(중략)
"엄마, 만일 엄마가 저라면, 그리고 엄마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 정도로 무정한 아빠를 가졌다면, 그런 아빠에게 돌아가겠어요? 아빠가 찾아오거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을 하지 않아도요?"
로비스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나 같으면 돌아가지 않을 게다. 아빠가 나에게 사정을 해야지, 암, 그래야지!"
(중략)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로냐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때 이미 로비스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로비스가 놓고 간 회색 스카프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습니다. 로비스는 로냐가 잠든 사이에 그걸로 로냐를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2권 89-95쪽에서 부분 발췌)

마티스는 숲으로 간 로냐가 마주치게 될 위험을 조목조목 짚어주지만 결코 앞서 나가거나 부모가 다 해결해 주려 하지는 않는다. 로비스 또한 집을 나간 로냐를 섣불리 달래려 들거나 억지로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잠자는 사이에 덮어준 스카프로 딸에 대한 사랑을 말없이 전해줄 뿐이다.

나라면 이들처럼 너 혼자 바깥 세상에 나가서 겪어보고 깨닫거라 하면서 열두 살 아이를 쉽게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까. 로냐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바깥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 어렵지만 용기를 내는 일도 부모가 할 일이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그려지는 숲 속의 모습은 손에 잡힐 듯 하다. 나란 사람은 등산과는 거리가 멀기에 '숲'이란 말을 들으면 고작해야 동네 뒷산이나 수목원 속의 모습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로냐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숲과 강과 그 속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머리 속에서만 만들면 절대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 린드그렌 그 자신이 직접 겪어보고 쓴 글일 거라는 믿음이 든다.


줄거리만 꿰뚫고 나면 더 이상 볼 게 없는 책 말고 여러 갈래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 좋은 책이라 했던가. 《산적의 딸 로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게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로냐가 되어서, 로비스와 마티스가 되어서, 비르크가 되어서, 때로는 산적 떼가 되어서 그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읽어보려 한다. 

 

200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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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09-2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회보 '책 이야기'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20
필리퍼 피어스 글, 앤터니 메이틀런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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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친구가 필요한 아이

벤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싶어하는 남자아이다. 식구들은 많고 집은 비좁으며 벤이 사는 도시 런던 또한 복잡하기 짝이 없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우리 집에서 개를 키울 수는 없다'고 하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벤은 개를 키우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식구는 많지만 누나 둘, 남동생 둘 사이에서 외톨박이로 남아있는 벤. 그에게 '개를 가지고 싶다'는 건 단순히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바램이다.

생일날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철썩 같이 믿던 벤 앞에 도착한 것은 개 한 마리를 수놓은 그림뿐이다. 낙심한 벤은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감으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개와 만나게 된다. 그림 속의 개 이름을 따서 '치키티토'라고 부르며 벤은 점점 그 개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공상도 지나치면 병이 되는 법. 점차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일을 귀찮아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벤을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 급기야는 길 한복판에서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떠 오른 개를 쫓아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현실 세계보다 머리 속에 펼쳐지는 자기만의 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버린 벤의 모습에서 요새 늘어간다는 사이버 중독증 환자가 떠올랐다고 하면 우스울까?

벤의 집은 옆에 넓은 공원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벤은 할아버지 댁에 새로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 키울 수 있게 된다. 꿈에 부풀어 강아지를 데리러 간 벤 앞에 나타난 것은 벤이 머리 속에 몇 날 며칠이나 그리고 또 그리던 '치키티토'-너무 작아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개-가 아닌, 덩치 커다란 개 한 마리. 실망한 아이는 개를 쫓아버리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와-설령 그것이 개라 할지라도- 친구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이상형'만을 제일로 여기고 그것과 꼭 맞는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면 도대체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 후에 둘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벤이 브라운(새로 키우게 된 개)을 다시 소리쳐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 뼘 더 마음의 키가 자란 벤이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외로움을 조금쯤 덜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식구들의 수더분한 사는 얘기

벤의 이야기와 더불어 식구들 얘기가 퍽이나 재미있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글이지만 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다고 할까?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힘겨워하기도 하는 아빠, 두 딸을 품안에서 떠나보내고 마음이 허전해 하는 엄마, 결혼을 앞두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있는 메이, 이제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하는 딜리스, 개구쟁이 폴과 프랭키의 모습은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 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조금은 어눌한 할아버지와 몸이 자유스럽지 못한 지금까지도 깔끔하게 집안 살림을 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보는 사람들 모습 그대로이다.


마음 속에 남는 한 마디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한다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228쪽)

애타게 바라는 건 이루어지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또 배워야죠. (222쪽)

뭔가 서로 어긋나는 저 두 가지 얘기. 하지만 곰곰이 새겨보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느껴진다. '최선책'(올바른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이나 '1등'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차선책'이나 '2등' 또한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거.

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말 중에 "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뭐든지 내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일 앞에 서면 내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다시 한 번 해 보면 될 거라고 위안하던 때가 있다.

그러나 사는 게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커 가면서 해 봐도 안 되는 게 있더라는 걸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느꼈던 그 씁쓸한 기분이란.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그래도 아이들에게만은 "하면 된다"고 꿈(!)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의 간절함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200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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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08-16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도연 외국동화분과 발제글
 
너하고 안 놀아 - 개정판 창비아동문고 146
현덕 글, 송진헌 그림, 원종찬 엮음 / 창비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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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책을 소개할 기회가 생기면
얼른 이름을 꺼내고 보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현덕 동화집 <너하고 안 놀아>도 그 중 한 권이지요.

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현덕'이란 작가를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북으로 넘어간 작가여서
다른 월북 작가들처럼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물론 <너하고 안 놀아>가 처음 나왔을 때 그랬다는 거고요. 
지금은 현덕의 작품을 다 묶은 <현덕 전집>도 나오고 
짧은 이야기 한 편씩을 그린 그림책도 많이 나왔지만요.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설명하면
'노마, 똘똘이, 기동이, 영이가 노는 이야기'입니다.
진짜로 그게 다예요.
그런데 재미있습니다.
구구절절 이 사건 저 사건 나오고 이런 말 저런 말로 꾸민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몇 줄 적어볼까요? ^^

  기동이가 옥수수 과자를 먹고 있습니다. 저고리 앞자락에 한 웅큼 감추어 쥐고 하나씩 빼 먹습니다. 그 앞에 영이가 마주 앉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골목 응달입니다. 기동이는 옥수수 과자를 혼자만 먹습니다. 하나를 먹습니다. 둘을 먹습니다. 셋, 넷을 먹습니다. 그 앞에 영이는 말없이 보고만 있습니다.
  마침내 영이는 입을 엽니다.
  “맛있니?”
  “그럼.”
  “다냐?”
  “그럼.”
  그리고 기동이는 영이가 더 먹고 싶어하라고 일부러 더 맛있게 먹어 보입니다. 하나를 꺼내 들고 얼마나 맛있는 것인가 한참씩 눈 위에 쳐들고 보다가는 넙죽 넙죽 돼지 입을 하고 먹습니다. 그 손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영이 눈도 따라 움직입니다. 기동이는 옥수수 과자를 혼자만 먹습니다. 다섯을 먹습니다. 여섯을 먹습니다. 일곱, 여덟을 먹습니다.
 
<옥수수 과자>라는 이야기의 첫머리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지금은 고등학생인 딸내미가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입니다. 

사실 과제로 읽어 오라기에 읽었을 뿐,
처음에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어요.
뭐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얘가 걔 같은;;; 애들만 서넛 나오고...
심심하구만 뭐,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

그런데 일곱 살 난 딸내미한테 한 편을 읽어 줬더니 재미있다더군요.
뭐가 재미있는데, 그랬더니 그냥(!) 재미있답니다.
먹을 게 나오는 이야기여서 그런가 하고 (제가 딸내미를 보는 눈이 이렇습니다;)
딴 걸 읽어 줬는데 그것도 재미있대요.
이 책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싶어서 신기했어요.

그 뒤로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씩 두 편씩 읽어 주다 보니
꼬맹이들 노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이야기가 점점 좋아졌고, 
소리 내어 읽으면 입에 짝짝 달라 붙는 그 글맛에 빠졌습니다. 
다른 책 보듯이 눈으로만 훌훌 읽고 넘겼으면
이 책의 매력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겠지요.

주위에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없으면 혼자서라도 꼭 소리 내어 읽어 보세요.

이 책의 매력은 '맛을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
 

 

201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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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10-1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밥 카페 '책 추천' 이벤트
 
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품절


행복에 이르는 방도의 가짓수가 적을수록 후진국이다. '747' 과업을 못 이룬 나라가 아니라.-15쪽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중략)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자기 전투를 하시라. 어느 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P.S.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25쪽

가족이 자신을 위한 사설 자선단체인 줄 착각하는 넘들이 있다. 자신의 몰염치와 이기심을 오히려 가족의 권리인 줄 안다. 인간관계에 이만한 착각도 없다. 이 도착적 가족 윤리, 자본주의의 출현, 사생활의 탄생과 더불어 발명된 '신성한 가족'이란, 근대의 가족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족관계가 주는 스트레스와 대면할 때,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라.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관계에서 윤리는 잊어라. 지킬 건 인간에 대한 예의다.
-100쪽

가족 간 문제의 대부분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그런 선이 없다는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120쪽

[외동딸의 데이트 코스까지 짜 주고 남자친구한테 확인전화 하는 부모에 대해]
그런 부모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해 그런다고 표현해선 안 돼요. 단순히 과보호라고 표현되어서도 안 되고. 그들은 자식이 한 사람의 독립되고 온전한 개인이 되는 걸 방해하는 훼방꾼이자, 자식의 인생 전체를 의존적이고 유아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책임한 자들이며, 자식을 보호한다며 자식의 자기결정권을 믿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항상 자신들이 대신 선택하는 걸 부모의 의무라 마음대로 생각해 결국 자식을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천하의 바보로 만들어버리는데도 그걸 사랑이라 믿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부류의 부모들이야. 아, 씨바, 좀더 나쁜 말 없나.-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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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etant 2011-09-2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김어준 총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산적 같이 생긴 외모도 그렇고(총수님, 죄송...;) 날것 같은 딴지일보의 말투도 부담스럽고... 아무튼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한 방에 바꿔준 것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상담 코너 '그까이꺼 아나토미'.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어? (넙죽)

요즘 다른 게시판을 보면서도 느끼는 거지만, 자기가 결정할 문제를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남한테 확인을 받고 빗나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 것이며(사실 남 얘기만은 아니다), 반대로 남의 삶을 휘젓는 오지라퍼들은 왜 그리 많은 건지.

거기에 일침을 놓는 총수의 '인생은 이런 거'.
마음에 든다.

2011/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