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뒤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역사의 진실과 마주한 외롭고 고독한 신문기자, 페레이라가 펜을 들고 주장을 시작한다.” 드물게도 ‘정치소설’이라는 타이틀까지 달고 있었다. 낯선 작가의 낯선 책이었지만 지금 당장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근 번역된 이 소설,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대표작 중 하나인 <페레이라가 주장하다>(1994)를 읽었다. 현대 이탈리아 작가라고 하면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의 이탈로 칼비노나 <장미의 이름>(1980)의 움베르토 에코 정도를 떠올리게 되지만, 최근 몇 년째 이탈리아를 대표해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는 이는 이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다.

 

 

 

 

 

 

 

 

 

 

 

 

 

장편소설의 구조를 ‘사건, 진실, 응답’의 세 층위로 분석해보는 것은 가끔 유용하다. 사건이 발생하고, 진실이 드러나고, 주체는 응답한다.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 ‘사건’인데,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 사건이 어떤 ‘진실’을 산출했기 때문이며, 이제 그 진실 앞에서 주체는 어떤 식으로건 ‘응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세 요소는 장편소설의 성취를 판별하는 세 개의 평가 항목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관점’일 뿐이어서, 이 관점을 튕겨내는 좋은 장편소설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건의 충격, 진실의 무게, 응답의 울림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는가.

 

1938년의 포르투갈. 작은 신문의 문화면을 전담하고 있는 중년의 기자 페레이라는 최근 아내를 잃었고 그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다. 죽은 아내의 사진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이 좋아하는 프랑스 소설들을 번역·게재해 문화면을 채우면서, 야심도 비탄도 없는 고요한 나날을 보낸다. 파시즘의 창궐과 스페인 내전 등으로 유럽 전체가 들썩였지만 그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러던 그가 잡지에서 우연히 로시라는 청년의 글을 읽고 호감을 느껴 그를 보조 기자로 채용하면서 서사는 시작된다. “어느 여름날 그를 만났다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에서 ‘사건’은 이 만남 자체다.

 

이 만남을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페레이라가 로시를 만나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시는 파시스트들에 맞서서 스페인의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한 국제 조직인 ‘국제여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이였다. 당시 포르투갈은 친(親)파시스트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고 자국 내의 저항세력들은 비밀경찰들에 의해 은밀히 감시·탄압받고 있었다. 모든 언론은 통제되었고 어떤 신문도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내성적이고 탈정치적인 문화부 기자 페레이라가 로시를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로시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그를 해고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거부하지만 속으로는 외려 이끌린다.

 

로시와의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해 페레이라가 자신의 내면에서 또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목소리는 로시가 옳다고 말한다. 그는 로시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을 모른 척하지만 역부족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런 페레이라의 균열과 변화를 섬세하게 짚는 대목들에 있다. 죽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줄고, 그가 번역하는 프랑스 소설들은 점점 급진적인 것들로 바뀌며, 로시를 대하는 마음에는 점차 동료애가 섞여든다. 급기야 로시에게 치명적인 일이 벌어지고 페레이라는 더 이상 자신의 ‘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기자로서, 결정적으로, ‘응답’한다.

 

이 응답의 울림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대신 다른 것을 말하자. 안토니오 타부키는 1994년의 이탈리아에서 왜 하필 1938년의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출간했을까. 1994년은 이탈리아 최대의 부호였던 베를루스코니가 총리에 올라 막강한 권력으로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이 소설은 그에 대한 저항적 실천의 일환일 수 있다는 것이 번역자의 추측이다. 1938년의 포르투갈, 1994년의 이탈리아, 2012년의 대한민국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한 전직 국회의원을 감옥에 처넣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한겨레21 제894호 <신형철의 문학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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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을 읽다 공유하면 좋을 글을 발견해 올린다. 종종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거나 잡지나 신문에서 작가나 작가의 작품에 관한 좋은 글들을 발견하면 이곳에 스크랩할 생각이다. 윗 글의 필자는 1938년의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한 1994년 이탈리아의 상황과 2012년의 한국에서의 상황을 평행이론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러고보니 이탈리아도 독재국가 아닌 독재국가였다. 두 반도국가의 운명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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