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이 되면서 한국나이로 50이 되었다. 물론 만나이로는 아직 48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노화의 징후가 여기저기 보인다. 머리카락에 숱이 눈에 띄게 줄었고, 금세 피곤해지는 것은 물론, 기운이 빠지고 힘이 들고 피곤한 것이 에너지와 활력이 눈에 띄게 줄어듬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건강검진 결과 고혈압 전단계, 당뇨 전단계가 나왔고, 고지혈증으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만난 친구 중 2명이 폐경 증상과 함께 갱년기 증상을 호소했으니, 이제 빈말로도 청춘이라는 말을 꺼내면 허언증 환자 취급 받게 생겼고, 이팔청춘이라고 말하면 치매라는 말을 듣게 생겼다. 최근에 여러 곳에서 노화는 시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겪게되는 현상이 아니라 '질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나도 이제 노화공부를 해야 할 시기가 된거다. 



<노화공부>에서는 대개 사람들은 몸이 보내는 노화의 신호를 인지한다고 말한다. 50대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신체적, 정서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음을 감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체중과 체구성의 변화'라고 말한다. (p.19) 체중은 여성의 경우 60대까지 증가한후 느린 속도로 감소하지만 체지방이 차지하는 비율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높아져 65~70세에 정점에 이른다. 특히 지방의 분포가 달라져 내장 장기의 지방이 축적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가지 노화 관련 질환들, 즉 당뇨병, 고혈압, 도액경화 등 순환기계 질환, 기타 대사성 질환드레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 (어쩐지 내 배가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더라) 


반면 지방을 제외한 체중, 즉 체지방은 감소하는데 주로 상지와 하지의 근육 감소에 의해 나타난다. 즉 나이가 듦에 따라 근육이 빠지면서 지방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체형 변화는 에너지 대사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신체 활동량이 부족해지면서 나타나는 신체 노화의 보편적 현상이지만 또다시 노화를 증폭하는 원인이 된다. 악순환이 나타나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노화 과정을 진화론적 관점과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우선 진화론적 관점은 일회가용신체설이다. 이제까지 자연 세계에서 사망 원인 대부분은 노화라는 재넉 요인이 아니었다. 약육강식, 전염병, 기아, 사고 등 외부 요인에 의한 조기 사망이었다. 따라서 진화의학적 관점에서는 사망하는 연령 이후까지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 에너질 ㄹ쓸 이유가 없다. 


대신 자원을 발육과 생식에 집중시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려 종을 유지하려 한다. 이럴 때 먹거리가 풍성하고 환경이 좋으면 우리 신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장하고 생식하는 엔진을 최대한 동시킨다. 손상이 발생해도 보수에 이너지를 쓰지 않아 손상이 축적되고 노화가 촉진된다. 이런 진화의학적 관점에 따르면 우리 몸 안에 신체의 유지와 보수에 관여하는 내재된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늑 칼로리와 영샹소의 섭취를 적절히 절제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가장 재미있던 것은 우리 세포가 가진 트레이드오프 적인 성격이다. 우리는 몸의 어떤 작용이 부족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세포를 만들기 위해 무언가 몸에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은 배제하려 한다. 물론 담배나 술은 몸에 나쁜 것이 너무나 자명하고, 채소와 견과류 등이 몸에 좋은 것도 맞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포의 트레이드오프 적인 성격이다. 


영양소가 활성화되는 m-TOR은 대표적인 성장 세포이다. 이는 성장과 생식을 촉진시켜 활력을 불어넣고 개체수를 늘리지만, 이로 말미암아 신체 기고나의 손상이 축적되고 노화 관련 질환의 발생이 증가한다. 반대로 영양소가 부족할 때는 서투인과 일인산아데노신키나아제가 활성화되는데, 그러면 성장과 생식은 억제되지만 개체 유지와 보수에 자원을 배분하여 수명이 증가하고 손상이 적어져 노화 관련 질환의 발생이 줄어든다는 거다. 


이런 트레이드오프 적인 면은 면역과 염증 반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보통 면역은 좋고 염증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면역과 염증은 동전의 야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염증은 우리 몸을 방어학 위해 면역 체계가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생체반응이기 때문에 염증이 잘 생긴다는 것은 면역이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염증 반응이 조절되지 않고 과도하게 나타나거나 병원균이 침입이 없어도 지속된다면 우리 건강을 위협하게 되고 조직을 손상시킨다.


노화는 기본적으로 세포가 늙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 몸은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포는 정해진 횟수 이상 분열할 수 없다. 이를 헤이플릭 한계라고 한다. 이런 헤이플릭 한계가 나타나는 이유는 DNA가 복제될 때마다 염새게의 끝부분에 유전정보가 없는 염기서열 DNA인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텔로미어는 세포분열을 할 때마다 길이가 짧아지고 세포분열이 거듭되어 텔로미어 길이가 임계치에 도달하면 세포가 더이상 분열하수 없어지면 이것을 복제 노쇠라고 한다. 이때 나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활성산소나 만성염증 등은 텔로미어 길이의 단축을 가속시켜 복제 노쇠를 빠르게 한다. 반면 선천적으로 텔로미어 길이가 긴 사람들은 이 과정이 늦추어진다고 말한다.(P.61)


다양한 노화의 원인과 분자생물학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모두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노화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책에서는 다양한 원인과 그에 따른 방안을 이야기하지만 아직 인과론을 정확히 확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노화 방지를 위한 공통된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영양소와 관련되 신호과 활성화되지 않은 종이 오래 산다는 것이다.(P.140) 


즉 영양소 섭취가 적은 종이 장수하는 겅ㅅ이다. 즉 견딜 만한 배고픔, 적당한 스트레스가 오히려 건강에 유리한 이유다. 지금까지 지구상 모든 종은 영양소가 넘칠 때를 대비할 필요가 없었다.(넘친 적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비만은 현대인의 건강에 가장 중요한 적이 되엇고, 칼로리 제한이 장수와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서는 결국 건강하게 늙기 위해서는 제시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건강한 생체리듬을 회복하고, 꾸준하게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소식을 하고, 곡물위주의 식물성 영양소와 심유질이 풍성한 식단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쓰고 보니 너무나 건강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갑자기 비아냥거리고 싶어진다. 그렇게 옳은 말 좋은 말을 누가 못하냐고, 나도 하겠다고. 비아냥거리고 싶어진다. 결국 귀에 딱지가 앉힐 정도로 들어온 몸에 좋은 것들은 정말 진실이었던 거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 원칙들이 아직도 유효한 이유는 우리 인간이 선사 시대 진화한 상태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건강한 것, 올바른 것, 제대로 된 것에 먼저 반항부터 하고 싶어하는 나의 중학생 정체성을 잠시 내려놓는다. JYP 박진영은 열심히 올바르게 살려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매일 정확한 생체리듬을 지키며 소식하고 열심히 운동하는 거다. 열심히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나도 열심히 올바르게 살고 싶다. 그럼으로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루고 싶다. 활기있고 멋지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 식습관과 운동 또한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2026년은 건강하게 보내야겠다. 


참, 생명과학 관련해서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너무너무 재미있엇다. 3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때 화학시간이 가물가물 떠오를랑 말랑 하기도 하고, 우리 몸의 구조와 움직임, 생로병사가 원자의 구조와 분자 화학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놀랍기도 하고. 그럼에도 잘 이해할 수 없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올해는 과학 관련 책을 더 많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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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 연휴에 꽤 많은 책을 읽었는데 차례대로 <불안 세대><부서지는 아이들> <편안함의 습격> <경험의 멸종><도둑맞은 집중력>. 이 책들은 작년과 올해를 휩쓴 인문교양서들인데 신기하게도 모두 같은 세계관 위에서 쓰여졌 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심리학의 일상화와 과잉 정서 진단,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에 회오리처럼 빨려들어간 우리의 진짜 모습,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들 말이다.



이 책들은 묻는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그렇게 편리하고 재미있게 가짜 결핍 속에 사는 동안 우리의 우울증과 불안증은 높아졌고, 아이들은 자신을 깨지기 쉬운 존재처럼 여기고, 불편함과 지루함을 못 견디게 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 가장 큰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의 삶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이 책들을 읽으며 줄을 죽죽 그으며 그래,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편안함의 습격>을 읽는 내내 내가 이러고 있는 거다. 도대체 순록은 언제 잡는다는 말이야?!



<편안함의 습격>은 주제면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책들과 비슷하지만 글쓰는 방식에서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과 비슷했다. 빌 브라이슨이 지금 시대에 알래스카 오지 순록 사냥을 떠난다면 바로 이런 책을 쓰지 않을까? 빌 브라이슨만큼 정신없으면서도 본인의 알콜 중독 이야기부터 시작해 우울증, 불안, 자살, 비만, 번아웃, 지루함, 운반본능까지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을 맛깔나게 풀어내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정작 나는 ‘그래서 순록은 언제 잡는거야?’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편안함의 습격에서 이야기하는, 편안함과 효율과 멸균에 푹 파묻혀 기다림과 지루함을 미친 듯이 못 견뎌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다못해 책에서 순록을 잡으러 떠났으면 순록을 잡아야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불과 10~20년 전 빌 브라이슨의 다양한 기행기를 보면서 킥킥댔던 내가 말이다. 세월은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는단 말인가. 아님 내 안에 있는 통제강박과 극강의 효율추구가 시대와 더불어 더 강화되고 빛나게 발현된 것일지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몇 십년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 모든 책들에서 결국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경험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깨어지기 쉬운 존재로 여긴다면 인간의 고통은 왜 필요한가? 우리의 상처와 번뇌와 깊은 슬픔이 그저 정신과의 하나의 병명일 뿐이라면 그 심연을 지나온 후의 성숙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손해보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기꺼이 사랑하고 상처받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저 호구인 것일까? 터치 몇 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한 듯 느껴지는 지금 우리에게 진짜 경험이라는 것이, 진짜 몸으로 경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왜 요즘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에 빠져있는지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원시적 감각, 그냥 몸뚱이 하나로 지면을 박차면서 느껴지는 터질듯한 심장박동, 후둑 떨어지는 땀, 손끝의 저릿함, 그 원시적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관계도 사라지고, 경험도 사라지고, 불편함과 지루함도 사라지는 이 시대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 몸의 경험. 그 자체가 아닐까.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몰입의 시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달리기나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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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18살인 우리 아들은 아이폰의 탄생과 함께 태어났다. 나는 아들이 1살 때부터 아이폰을 사용했는데 내 핸드폰을 가져가려는 아들에게 못 이기는 척 뺏긴 적이 많았다. 식당에서는 적극적으로 핸드폰을 보여준 적도 많고, 나아가 놀이공원 같이 꽤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는 아이의 시선을 일부러 핸드폰에 가둬두려고 노력한 적도 많았다


아이가 3살 정도 되어 tv 화면에 다가가 두 손으로 확대하려고 시도하거나 손글씨를 쓰는데 꽤 오랫동안 애를 먹은것도 어찌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아이들이 십대가 되었고, 이 아이들은 기존의 현실 세계의 상호 작용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서 성장한 셈이 되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 새로운 십대의 출현을 화성에서 성장하는 첫 세대가 된 것과 비슷한 세대의 출현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안사회를 만든 아동기 대재편이다.

 

아동기 대재편의 배경은 이렇다. 첫째, 아동의 일상과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술, 즉 스마트폰의 발전이 있었다. 두 번재 아이를 과잉보고하고 현실에세계에서 아이의 자율성을 제약하려는 추세(이것은 어제 내가 읽은 <부서지는 아이들>에 나오는 바로 그 추세이다.) 기존의 아동기가 놀이 기반이었다면 이제 스마트폰 기반으로 명백하게 달라진 것이다


이 명백하게 달라진 아동기의 결과는 이와 같다. 십대 우울증이 2.5배 증가했고 여자 청소년 자살율이 167% 증가했으며, 이제 아이들은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서 살며 사회적으로 박탈되었고, 수면 박탈로 인한 건강 악화와 주의력 분산, 그리고 중독 문제가 심해졌다,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 발 딪지 못하고 화면에 빠져 살면서 점점 불안과 우울 속에 허우적대며 취약해지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변화인가?

 

어제 읽은 <부서지는 아이들>과 이 책을 보며 정말 이제 우리 아이들은 다른 세대가 되었구나 실감했다. 전에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엄청나게 히트하면서 mz세대의 등장을 알렸는데 이제 내추럴 본 디지털로 무장한 불안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건강하거나 행복해보이질 않는다. 내가 좀더 간편하기 위해 아이 손에 쥐어주었던 스마트폰, 잠깐의 만족을 위해 무신경하게 보냈던 날들이 후회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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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몇 달전 나에게 ADHD검사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자기가 너무 산만하고 정신 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 

같다고. 그럼 산만하고 정신없고 자주 까먹는 행동을 바꾸기 위한 무언가의 행동을 해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행동을 바꿔보자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주변 친구들은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데...” 


다 하나씩 문제가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트라우마가 없는 친구가 없다고 했다. 한 명은 은따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증, 한명은 전학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 한 명은 선생님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했고, 자기는 수줍음이 많고 사회성이 많은 사회불안장애인데, 거기에 내향적 ADHD인 것 같다고 한다.

우리 딸은 중2이다. 딸은 사춘기 특유의 아이답게 다 하나씩 문제가 있는 아이들 틈에서 자신의 문제거리를 찾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따를 당한 적이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할 거다. 전학을 가면 적응하기 전에 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수줍음이 많은 것은 장애가 아니며, 산만하고 정신없고 무언가를 자주 까먹는 것은 네가 덤벙거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지적 노력이 필요하지 ADHD라는 병명과 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딸은 무언가 서운한(?) 눈치였는데, 오늘 <부서지는 아이들> 책을 보면서 딸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것이 그냥 우리 딸만의 중2병스러운 대사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책은 심리상담이 일반화되고, 다정한 양육이 대세가 되면서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불안이 증폭되고, 정신 건강 산업이 블루 오션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네 기분에 집중해볼까?”“너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야”“네가 불편하다면 없애줄게.” 이런 말들이 우리 아이를 부서지기 쉽고 안전한 상자 속에 가둬있어야 하는 약한 아이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다정한 양육이 일반화되면서 아이들은 의지할 수 있는 부모를 잃었고, 부모들은 권위를 잃었다. 더불어 양육의 기쁨까지. 아이들은 아이라는 이유로 권리 의식에 빠졌고 부모의 권위와 책임은 외주화되었다. 부모들은 더 이상 아이들을 훈육하지 않고 온갖 상담치료실과 소아정신과를 돌면서 병명을 모으고 약을 먹이고 아이들을 더 약한 존재로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까? 책에서는 허용적인 부모도, 권위적인 부모도 아닌, 권위있는 부모가 될 것을 주문한다. 권위있는 부모는 사랑과 규칙을 양육의 토대로 삼는다. 합리적 방식으로 자녀의 활동을 지도하고 대화를 통해 자녀와 의견을 교환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의견이 크게 다를 때는 확실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부모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규칙을 가르침으로써 말이다.


다정한 양육을 하고자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육아서를 읽고 낮에는 화내고 밤에는 울면서 반성하면서 어떻게든 아이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던 1인으로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이 송두리째 아이를 약하게 만들었나 생각도 들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무리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아닌데,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가 지금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이들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우리 시대는 권위적인 부모 아래에서 울고 싶어도 화내고 싶어도 할 말을 꾹 삼키고 함구하며 살았다. 어쩌면 나는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이를 키우면서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방법을 잘 몰랐던 것일지도, 우리 부모 또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방법을 잘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정과 반을 지나 이제 합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양육은 어때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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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파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한다. 절반의 코끼리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려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 




저자는 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고.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라고. 



책의 제일 앞 프롤로그의 이 첫부분을 읽은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을 사랑할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 역시 어떤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는데, 그리고 이미 영혼이 파괴되고 껍질만 남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음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는데. 



지대넓얕 시리즈는 모두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0권은 정말이지 훌륭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우주, 인류, 베다, 도가, 불교, 철학, 기독교 등 다루는 주제와 시간 범위부터 장난이 아닌데 채사장 특유의 명확하고 깔끔한 정리로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꿰어간다. 본문은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답을 제시한다. 


"나-세계"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의 세계관이고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명제일 것이다. 이 세계관을 가지고 전개되는데 1,2장이 세계를 시간적 구성으로 나눈다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공간적 구성으로 나눈 3~7장. 그 중 동양적 세계관은 3~5장, 서양적 세계관은 6~7장이다. 그리고 책을  한걸음한걸음 따라가다보면 세계와 나와의 관계, 일원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이 세계의 근본구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할 때 "세계와 나는 하나다."가 이 책의 결론이다. 즉, 이 책은 한마디로 '세계와 나는 나뉘어져 있다'라는 이원론에서 시작해  과학과 역사, 철학과 종교를 거쳐가면서  '세계와 나는 하나다'라는 고대 성인들의 사상을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알기 쉽게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 책을 읽고 채사장, 정말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게다가 문장은 어찌나 간결하고 깔끔하고 재미있는지, 정말이지 내가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든 몇 명의 사람 중에 채사장도 포함이다.



#1. 준비운동-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이 책의 전체가 모두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나 프롤로그, 그리고 준비운동이다. 그는 준비운동으로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판단중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세계관을 판단중지 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구조화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준비운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다"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을 모든 지혜의 출발점으로 여긴다. 주역에도 '관'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부터 시작해 칸트의 인식론도 마찬가지다. 나의 고정관념과 판단, 생각, 확신, 신념 등을 모두 내려놓고 세계를 투명하게 보기. 그렇기 위해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우주적 차원의 일이기도 하다. 



"자기반성은 스스로와 대면하는 사유과정을 말한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유의 출발점이자, 최소 조건이 된다. 당신이 사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개관적 대상으로 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6)


그리고 강한 인간원리에 의하면 우주 또한 이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우주는 그 안에서 관찰자의 탄생을 허용해야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강한 인간 원리와 참여 인간 원리다. 이것이 바로 우주에 인간이 탄생한 이유라는 것이다. 



#2. 자아, 세계, 그리고 관계



저자는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론과 관념론. 우선 실재론은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이 차이로 두 세계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분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한다. 이것을 아는 것은 책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현대인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대부분 이원론인데 이것은 반쪽짜리 세계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앎'의 영역은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 그렇지만 사실 앎의 대부분의 영역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영역이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보다 그것이 없다고 가정한다.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어쩌면 더 큰 세계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원론'이다. 



일원론은 간단하다.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느니,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 도덕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에서다. (378)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결론적으로 유식 사상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사실은 우리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이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의식뿐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까지 깊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의식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까지 더듬는다. 즉 최종 종착지에 이르러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아와 세계를 일으키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인류라는 존재가 자아가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운명에 처해진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능력,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탐색에 있을 것이다. (380)


"이것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파니샤트>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의 관계, 유학의 <태극도설>, 그리고 서양 철학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가 내 마음의 반여잉고, 그러므로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세계를 진지하게 통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최종 결론이다.(380)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적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젠가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381)


그동안 내가 뇌과학책과 심리학, 자기계발서, 촐학, 물리학, 불교 관련 책을 읽으면서 조각조각 메꿔오던 퍼즐이 이제야 맞춰지는 것 같았다. 범아일여, 일체유심조, 관념론, 모두 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한마디를 찾으러 20년 가까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무거움에 대한 사유는 지금부터 그 무게에 맞게끔 고민해나가야겠지. 



우리는 이제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세계 바깥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가 아니다. 단단하고 안정적이며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 아름다운 눈앞의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내 안을 보는 자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 불교의 일체유심조, 칸트의 관념론,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한 스승들은 궁극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470)



덧붙여,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최근 <내면소통>을 읽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뇌과학적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이 책을 다 읽고 한발짝 더 나아간 책을 읽고 싶은 갈증에 헤매이고 있다면 <내면소통>을 추천한다. 










#3. 나와 세계의 관계를 알았다면 이제 침참해야 할 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주제와 결론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은 세계와 자아의 합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고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 하는가? 



영리한 작가답게 이에 대한 답 또한 써져있다. 실용적인 이유로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고,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기에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억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두번째는 존재론적 이유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조차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하라. 

둘째, 외부의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힐 당신만의 시간을 만들어라. 

셋째, 남는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라.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안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하라. 

다섯째,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라. 책과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 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져야 한다.

여섯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에아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두었던 나의 살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깨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항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지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552~553)



마지막 에필로그를 읽는데 뭉클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할 수 있는 거 말고, 정말 내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아려 보면서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을까. 마침 오늘은 몸도 마음도 편안한 날이니 계획을 한번 세워볼까나..


나는 올해 48살이 되었다. 내 삶은 아마도 길게는 30년 정도가 남지 않았을까. 부계 유전으로 고혈압과 혈관질환, 당뇨를 가지고 있고, 나도 고위험군이다. 아버지 친척들을 보아도 80이 넘기신 분은 한분도 계시지 않으니 아마도 이 정도로 생각하는게 합리적이겠지. 그리고 아무리 건강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75세 정도부터는 건강이 급속도로 하락하겠지. 그렇다면 내가 건강하게 몸과 마음을 영위하며 생활할 시간은 25년 내외로 남아있는 셈이다. 그리 길지 않은 거다. 



나는 50까지는 30대부터 고민해오던 돈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롭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고 싶다. 대출을 모두 갚게 되면 1년 정도 안식년을 갖고 싶다. 따뜻한 나라에서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내가 요즘 빠져있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의 이론적 내용을 정리하고 싶다. 그전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한 권 내고 싶고,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 50대의 내 인생은 몸과 마음의 합일을 위해 더 노력하고 싶다. 요가와 명상을 직업으로 삼고 싶고, 다른 이들의 건강과 성장을 위해 기여하고 공헌하고 싶다. 그리고 이 일을 70이 될 때까지 하고 싶다. 70이 넘으면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정진하고 싶다. 



25년이 짧다고 생각했는데 미리 그려보려고 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그리고 거시적이고 우주적 관점에서 생각하기보다 당장의 대출과 이자에 대한 걱정부터 건강과 진로(?)에 대한 고민부터 드는 게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나의 의식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지향해나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좀더 천천히 불안과 걱정과 염려와 이유를 내려놓고 사유를 시작할 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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