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전
곽재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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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 이후를 중국의 ‘근세’로 여기는 독특한 사관을 제시한 근대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나이토 고난은 1921년 어느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체로 오늘날의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 역사를 공부할 때,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1467)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남의 나라 역사와 같은 정도로만 느껴지지만, 오닌의 난 이후는 참으로 우리들의 몸과 직접 닿아 있는 역사입니다. 이를 정말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以文會友(https://blog.naver.com/zentaur/220968438393)

 

과거는 낯선 나라다. 동아시아에서 소위 ‘전통’이라 불리는 풍습과 문화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봤자 18세기 이후에야 등장한다. 사실 이 ‘전통’이 과연 현대 한국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물며 그보다 앞선 시대임에랴!

냉정히 말해 1500여 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지금의 우리와는 개미 눈곱만큼의 관련도 없다. 아직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약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다면...’하는 망상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지만, 이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의 일이다. 온갖 억지와 비약을 무릅쓰고 고구려가 1000년을 더 이어갔다고 가정한들, 그냥 대동강-원산만 이남으로 축소된 한반도 위에 일본 같은 나라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짧게 잡으면 20세기,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전의 역사는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생각하는 게 편할 정도로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근세 이전의 역사가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역사를 잘못 공부해온 것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흔히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거울’일 수 있다면, 그건 현재가 얼마나 우연적이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가장 진보한 시대’도 아니요, ‘보편’도 아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 그럴 수 있다. 오늘날을 상대화할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다.

특히 지금과는 데면데면한 시대의 역사일수록 거울로서의 쓸모가 커진다.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특수성’을 더욱 쉽게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일수록 느끼고 배우는 게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만일 이러한 역사의 즐거움을 아직껏 느껴보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곽재식의 역사소설 『역적전』을 펼쳐보시라. 광개토왕이 무위를 떨치던 시기의 다라국(多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서북부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내가 지금껏 마주한 거울 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인다.

 

『역적전』은 구체적인 줄거리보다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의미를 갖는 소설이다. 듀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전 한국 정통 사극이라는 장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려고 했었어요. 그리고 그 문제점이 어떻게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제점과 연결되는지도 설명하려 했지요. 하지만 공부가 짧았고 시간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관심이 충분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곽재식은 이 주제에 대해 저보다 더 깊이 생각했고, 그 결과물을 이 책에 반영했습니다.”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中

 

듀나가 이야기한 ‘한국 정통 사극’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는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용의 눈물》과 《태조 왕건》에서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소위 ‘정통 사극’이라 불릴만한 작품들은 언제나 남성영웅의 이야기였다. 수염 기른 마초 몇 명이 폼 잡고 멋들어진 대사 하나 읊어주거나 뜨거운 눈물 좀 흘려주면 모든 일이 뚝딱 해결되곤 했다. 세상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 터이거늘, 남성영웅의 희로애락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인다. 특히 삼국시대 전쟁물의 서사는 라노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 ‘이고깽(이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통 사극’의 대안으로 등장한 ‘퓨전 사극’은 남성영웅에 맞췄던 초점을 (어디까지나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렸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그냥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2019년 대한민국의 20대 커플 같다. 가끔 방송사고로 18세기가 배경인 사극에 21세기 장비가 등장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퓨전 사극’의 경우엔 그냥 대놓고 21세기 장비를 써버리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지극히 21세기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한다.

 

곽재식은 ‘정통 사극’처럼 역사를 ‘남성영웅 깽판물’(남영깽?)로 만들어버리지도, ‘퓨전 사극’처럼 21세기 사람을 그려놓고 5세기 사람이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역적전』의 시대적 배경은 광개토왕이 한반도와 남만주를 주름잡던 4세기 말~5세기 초지만, ‘인물’로서의 광개토왕은 그리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사건의 전개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태풍과도 같은 자연재해에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역적전』의 광개토왕은 마치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사슴신)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치로 물러난 남성영웅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사가노와 출랑랑은 각각 백제 머슴 출신의 요리사와 가야 귀족 출신의 칼잡이다. 역적질을 일삼았다는 명목으로 끌려온 사가노와 출랑랑을 심문하는 하한기는 가락국 태생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다라국으로 도망 와 판관으로 일하는 인물이다.

이밖에도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군가의 사소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의 희비를 가르고, 인생을 뒤바꾼다. 아무리 광개토왕 같은 자연재해급 인물이 역사의 큰 방향을 결정한들, 그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역적전』의 등장인물들은 정말이지 5세기 사람들 같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곽재식이 21세기에 소설을 쓰며 5세기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해보일 수 있지만, 어쨌건 그는 최대한 ‘5세기스럽게’ 인물들을 그려냈다. 사실 『역적전』의 세 주인공은 굉장히 평면적인데, 이마저도 ‘근대적 자아’란 게 생겨나기 훨씬 전이 배경이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처럼 『역적전』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고 모범적인 소설이지만, 이 책의 진가는 역사서와 함께 엮어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작가가 탄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곳곳에 ‘통념’과는 전혀 다른 고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역적전』을 조금 더 깊게 읽어보자.

첫 번째 키워드는 ‘물’이다. 작중에서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마치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이용한다. 백제의 도성에 살던 사가노는 주인인 협지와 함께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려다 신라 군함을 만나 가락국에 정착한다. 출랑랑 역시 집안이 몰락한 후 해적질을 하며 살아간다. 작중 흑막(?) 비스무레한 위치에 있는 용녀는 바다를 오가는 대규모 상단을 이끄는 선주로, 본래 가야 출신이나 육상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한다.

사람이 오가는 네트워크로서의 강과 바다, 그리고 이를 무대삼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해상세력의 역동성에 관심이 생긴다면 『바다에서 본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를 보시라. 전자는 13세기 이후를 주로 다루고, 후자는 배경이 일본인지라 『역적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역사의 중심은 육상의 정치권력이고, 해상세력은 어디까지나 이들에게 복속된 존재였다는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예컨대 이런 상상을 해보자. 전근대 한반도에선 ‘중국인/일본인’, 중국에선 ‘한반도인/일본인’, 일본에선 ‘한반도인/중국인’이라 불린 해상은 사실 동일집단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바다에 적을 두고 세 ‘육지’와 모두 교류하며 그때그때 출신을 둘러댄 건 아니었을까? 해상세력을 ‘독립변수’ 삼아 새롭게 본 역사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이동’이다. 『역적전』의 사람들은 혼자 다니든 무리를 짓든, 원해서 간 것이든 떠밀린 것이든 여기저기 엄청나게 쏘다닌다. 사가노가 가락국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자신처럼 왜국으로 가려다 실패한 백제인들이 일종의 ‘난민캠프’를 이루고 있었다. 가야 출신인 출랑랑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도 남쪽으로 내려와 있던 고구려 칼잡이였다.

고대인의 활발한 이동이 소설 속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는 건 『동아시아 세계론의 실천과 이론』과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지고 국경이 바뀌던 고대 동아시아에선 고향을 잃어서, 혹은 전쟁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트고 사신을 오가게 할 필요성도 컸다. 요컨대, 당시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사이에는 오히려 그 이후 시대보다도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던 것이다. 국가 간의 경계가 선명해지고 육상 정치권력의 통제력이 강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여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순히 적극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납고 강인하다는 표현이 보다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칼잡이이자 무자비한 성격파탄자인 출랑랑, 그의 라이벌인 여당아, 가야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인 용녀까지, 힘 좀 쓰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오히려 사가노나 하한기처럼 남성 쪽이 훨씬 조신하다. 곽재식이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듯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한반도의 여성에 대한 좋은 책을 찾지는 못했다. 여러분께서 무지하고 게으른 글쓴이를 깨우쳐주시길 바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사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과거에 대한 상상력을 말살하지 말라는 글을 종종 접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풍요로운 오류’를 ‘척박한 진실’보다 훨씬 좋아하는지라 이런 얘기에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상상력 운운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결과는 대부분 뒤틀린 욕망을 과거에 투사하는, ‘척박하고 위험한 오류’이기 일쑤다. 곽재식의 『역적전』이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발랄한 상상력은 사료에 탄탄히 뿌리를 내려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혹시 앞으로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거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한다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조용히 『역적전』을 손에 쥐어주도록 하자.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자.

“고대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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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 털보 과학관장이 들려주는 과학책 읽기의 즐거움
이정모 지음 / 사월의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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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하건대, 나의 꿈은 언젠가 역사SF를 쓰는 것이다. 왜 하필 역사SF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가 역사 전공자고 SF를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물론 역사소설보다는 역사SF가 그나마 팔릴 것 같아서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로 내가 과학에 젬병이라는 사실이다! 그나마 수학은 문과치고 그럭저럭 해내는 수준이었지만, 과학은 문과 중에서도 못하는 축에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과학과는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의 마인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역사SF를 쓰고 싶어지다니, 이를 어이할꼬!

이렇게 성인이 되고서야 과학에 관심이 생긴 문송이(문과라서 죄송한 사람)가 나 뿐만은 아닐 게다. 어떤 문송이는 나처럼 과학을 소스로 소설을 쓰거나 웹툰을 그릴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늘 음식물쓰레기 버리듯 휙 넘겨버리던 신문의 과학면을 한 번 진지하게 읽고 싶어진 문송이도 있을 터다. 사실 남들 앞에서 자랑하기 위한 지적 악세사리로서 과학 지식을 탐하는 문송이가 제일 많겠지만, 아무래도 좋다.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니까.

물론 뒤늦게 과학에 재미를 붙여보려는 우리 문송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과학과 담쌓고 지내온 기간이 너무 길어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서울대가 선정한 과학고전을 펼쳤다간 그날로 과학과 영영 이별할지도 모른다. 불쌍한 문송이들에게 필요한 건 과학에 대한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좋은 교양서건만, 서울대는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프린키피아』나 『종의 기원』 따위를 추천해주고 있으니 원! 세상은 과학 좀 공부해보려는 문송이들에게 이토록 잔인하다.

하지만 문송이들이여, 이제는 울지 마라! 징징대지도 마라! ‘과알못’이라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최고의 교양서가 나왔으니, 바로 이정모의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이다. 저자 이정모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유명한 ‘과학 커뮤니케이터’지만, 나는 그를 고3시절 <미생>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미생>에 등장하는 재미교포 스티브 한의 모델이 바로 이정모였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대한민국에 자연사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그의 프로필을 검색해보고 처음으로 알았다. 이런 중증 ‘과알못’이 강추하는 책이니, 얼마나 쉽고 재미있겠는가!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저자가 읽은 각종 과학책에 대한 서평 모음집이지만,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외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 이것은 서평인가 신변잡기인가?” 책 뒤표지에 실린 추천사에 나와 있듯 이정모의 서평은 전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이 키우는 앵무새가 자신을 싫어해 딱 한번 과외를 짤렸다며 분해하고(「새대가리 vs. 새의 천재성」), 동생이 유치원에서 사람의 소화기관에 대해 배우는 것을 본 이후로 유치원 졸업생에 대한 열등감을 키워왔다고 고백한다.(「‘침, 균, 똥’의 숨겨진 과학」)

뿐만 아니라 저자는 시도 때도 없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홍보하고, 자신에게 물리와 화학을 가르쳐준 종로학원의 신일생, 조용호 선생님에 대한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책에서 종로학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나는 끝내 선생님들 성함을 외워버리고야 말았다. 누구라도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알아버린 기분이 들 것이다. 만약 길에서 저자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삼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하고 반갑게 손을 내밀 것만 같다.

이처럼 이정모는 본디 ‘남’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 쓰인 서평이란 글에서 ‘나’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누군가는 과연 저자가 서평가로서의 역할에 충실한지 의문스러울 것이고, 저자의 TMI에 지레 부담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정모는 매우 훌륭한 서평가일 뿐 아니라 독자를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의 서평이 훌륭한 이유는 다름 아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형식 덕분이다.

이정모는 책의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서평을 갈음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이 보고, 배우고, 느낀 온갖 것들을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책을 읽어간다. 저자가 책과 함께 웃고, 울고, 짜증내고, 위로받은 생생한 기록은 딱딱한 과학책에 개성을 불어넣는다.

게다가 이정모의 경험담은 단순한 ‘썰풀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학책을 소개하기 위한 ‘밑밥깔기’다. 이를테면 아버지를 모시고 브뤼셀을 여행하다 자동차로 왕궁 후문을 가로막은 이야기를 꺼내나 싶더니, 스리슬쩍 우주를 탐구해온 과학의 역사로 넘어가버리는 식이다.(「“You are here!”」) 그 솜씨가 마치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기에, 과학책은 처음이라며 쭈뼛대던 문송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너무나도 재밌다. 난 지금껏 이렇게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글쟁이는 만난 적이 없다. 도서관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틈날 때마다 이 책을 펼쳐든 지난 사흘간 나는 정말이지 꼴사납게 쿡쿡댔다. 급기야 왜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예민하게 신경 쓰면서 ‘물리적 올바름(physical correctness)’은 고려하지 않느냐는 대목에서는(「‘물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공교롭게도 둘 다 약어가 PC다!) 저자는 이렇게 남을 웃겨놓고선 뻔뻔스럽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본론으로 넘어가버린다.

이렇듯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기발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까지 가볍고 얄팍한 건 결코 아니다. 저자는 짧은 지면을 요령껏 활용해 각 책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할 뿐 아니라, 상식을 뒤흔드는 촌철살인 역시 야무지게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77개에 달하는 알찬 서평은 저마다 다루는 내용도, 꺼내드는 질문도 제각각이라 독자가 지루해할 틈을 주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결국엔 하나로 수렴한다는 사실이다.

이정모가 전하려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과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인간은 그리 합리적이지도 않고, 복잡한 현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다.(「파수꾼의 딱따기 소리」) 그런 주제에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은 큰지라 과학자든 교회학교 교사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걸 이상한 설명을 갖다 붙이기 일쑤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하는 방식’으로서의 과학이 중요하다. 그 어떤 ‘사실’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되, 어디까지나 주어진 자료를 근거로 이야기한다.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되, 모든 걸 다 설명하겠다는 오만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만 ‘예정된 파국’을 그나마 슬기롭게 해쳐나갈 수 있다. 유머와 위트 사이를 도도히 흐르고 있는, 저자의 일관된 주제의식이다.

저자에게 개인적인 고마움을 전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책에서 과학책에 대한 서평이 아닌 글이 딱 한 편 있으니, 바로 「나는 오늘도 ‘주례사’ 서평을 쓴다」이다. 자신이 책의 장점만을 다룬 ‘주례사 서평’을 쓰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 글은, 역시 ‘주례사 서평’을 지향하는 내게 너무나 큰 위안을 주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남의 장점을 잘 보는 사람은 단점 역시 귀신같이 알아챈다. (일단은 내가 그렇다!) 이정모 역시 웃으면서 뼈 때리는 몇몇 구절들로 미루어 볼 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눈물콧물 쏙 빼놓을 신랄한 비판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굳이 ‘주례사 서평’을 고집하는 이유는, 시간과 지면의 한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나마 좋은 과학책을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요즘 정말로 책을 읽지 않는다. 글을 통째로 외우던 음유시인들이 금속활자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갔듯, 종이책 읽는 사람들도 유튜브로 인해 ‘멸종’해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어나 일어,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 화자라면 더더욱!

현실이 이토록 처참한지라, (번역서를 포함해) 한국어로 쓰인 괜찮은 책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설령 책에 사소한 단점이 있다 해도 일단 사람들이 읽어야 이에 대해 얘기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은 책이 널리 읽히는 게 먼저다. 책의 단점은 내게 개인적으로 질문이 들어올 때 얘기해줘도 늦지 않다. 요즘 들어 내 서평이 지나치게 호평 일색은 아닌가싶어 고민스러웠는데, 저자 덕에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앞으로도 열심히 ‘주례사 서평’을 써서, 언젠가는 『역사책은 처음입니다만』이라는 제목으로 ‘주례사 모음집’을 퍼내겠다! 물론 그때까지 한국 출판시장이 버텨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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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점기행 (보급판)
김언호 글.사진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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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벌레를 자임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인생서점’ 한 곳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책을 고르던 공손서점과 대학생이 된 지금 종종 들르곤 하는 홍익문고가 바로 그곳이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 빠르면 당일에도 받아볼 수 있는 오늘날 구태여 서점을 찾는 이유는, 서점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끈따끈한 신간의 제목을 훑노라면 왠지 지(知)의 최신 트렌드를 꿰뚫은 기분이고, 이름 모를 책에 푹 빠져있는 누군가의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단골들의 취향을 꿰고 있는 서점 직원과의 수다도 빠질 수 없다.

서점이 선사하는 이러한 즐거움은 그러나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서점 자체가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신촌의 랜드마크이자 수많은 대학생의 안식처였던 홍익문고는 2012년 신촌 일대가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며 철거위기에 놓였다. 다행히도 지역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홍익문고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위세는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홍익문고는 서점이 곧 건물주인, 굉장히 예외적인 사례다.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절대다수의 서점들은 시민들이 채 손을 쓸 틈도 없이 쫓겨나고 말았다.

서점에게 미래는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는 세계 각지의 서점을 찾았고, 그 기록을 묶어 『세계서점기행』을 냈다. 저자는 유럽과 미국, 동아시아의 서점들을 순례하며 여전히 꿈틀거리는 인문정신의 생명력을 느낀다. 800년의 세월을 품은 고딕성당을 개조해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도미니카넌 서점, 수많은 예술가를 키워낸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989년 톈안먼 광장의 자유·저항정신을 이어가는 베이징의 완성서원, 어린이와 여성, 환경을 귀히 여기는 세상을 꿈꾸는 도쿄의 크레용하우스까지, 세계의 서점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읽기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다.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저자가 찍은 서점들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으리라.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독립서점 미드타운 스콜라를 꾸려가는 에릭 파펜푸세와 캐서린 로런스 부부가 건네는 이야기는 짧지만 뼈가 있다.

“독립서점은 대를 이어 운영하기가 쉽지 않아요. 정신노동이자 육체노동이거든요.”

그렇다, 서점운영은 육체적으로 매우 고될 뿐 아니라 정신을 좀먹기까지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현실에선 더더욱! 지식을 얻는 수단이 문자매체에서 영상매체로 옮겨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을 펼치기보다는 유튜브를 검색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무턱대고 서점 문을 닫지 말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인문정신의 토양인 서점을 지켜나갈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뜬금없겠지만, 서점을 좀먹은 정보통신기술이야말로 결국 서점을 되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언호 대표가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한 정보통신기술이 서점을 되살린다니,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힌 도미니카넌 서점을 폐점위기에서 구해낸 것도 4000명 넘는 페이스북 회원들이었다. 뉴욕의 맥널리 잭슨 서점이 제작해주는 ‘나만의 책’은 구글에 의해 데이터베이스화되어있고 말이다.

1997년, 프랜시스 케언크로스는 『거리의 소멸』이란 책에서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이 얼굴을 맞댈 필요성을 사라지게 하리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클릭 한 번으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음에도 굳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굳이 따지자면 대체재라기보다는 보완재다. 나 역시 SNS를 통해 새로 나온 책이나 유명 저자의 강연회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한다. 한길사가 운영하는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이나 과학전문서점 <갈다>, 인문사회서점 <니은책방> 또한 인터넷 공간을 통해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주선하고, 각종 강연과 전시를 홍보하고 있다.

오늘날 서점이 처한 현실은 분명 좋지 않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점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방법은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타듯 ‘온라인’을 이용해 ‘오프라인’에서의 만남과 소통을 이어가야 한다.

상하이의 명문서점 지펑을 창립한 옌보페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서점이란 시대정신이 자유롭게 표출되는 공간이다. 서점이란 태생적으로 시민사회다.”

서점은 본래 출판사이자 살롱이었고, 사람들은 이 복합적인 문화공간에서 온갖 불온한 생각을 공유하고 연대의식을 키워갔다. 옌보페이의 말마따나 서점은 고립적인 ‘개인’과 경직된 ‘국가’ 사이에 놓인, 자유롭고 비판적인 ‘시민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매개였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사회 각 분야가 전문화되며 서점은 순수하게 책만을 파는 공간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를 내다보는 지금, 서점은 오히려 출판사이자 살롱이었던 옛 시절을 적극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에겐 여전히 서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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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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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한 한국인 작가가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을 티비 프로에서 털어놓아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런던을 여행하던 작가는 90세가 넘어 보이는 영국인 노부부에게 유창한 영어로 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노부부는 작가의 친절에 고마워하며, 글쎄 이런 질문을 던졌단다. “영어를 참 잘 하시네요. 동방식민지(Oriental Colony)에서 오셨나요?”

작가는 순간 머리가 띵했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노부부가 지난 50년간 세상이 변한 걸 모를 수 있겠다싶어 다시 친절하게 자신은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얘기해주었단다. 그러자 노부부는 이번에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럼 서부식민지(Western Colony)에서 오신 건가요?” 누가 봐도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작가가 허언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100%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위의 일화는 한국인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식민지의 ‘상처’를 안고 있는 입장으로서 그네들의 오만이 눈꼴시럽지만, 한편으로는 전 세계를 발밑에 둔 양 의기양양한 그 자신감이 부럽기도 한 것이다. 내가 곧 세계요, 보편이라는 저 여유야말로 진정 ‘제국’의 품격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영국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전혀 ‘제국’답지 못하다. 외국인 들어오는 게 싫다고 기껏 EU에서 나가기로 해놓고는, 3년이 지나도록 어떻게 나갈지를 합의하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며 옥신각신하는 의원들을 보노라면 저곳이 진정 의회민주주의의 본고장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편견으로 똘똘 뭉친 영국인들은 자신감 넘치는 코스모폴리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에 떠는 촌뜨기 같고 말이다. 제국의 위엄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영국은 세계를 호령하던 대제국에서 보잘것없는 섬나라로 되돌아간 것일까?

영국사 연구자인 이영석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전 세계 사람들을 자기네 식민지인으로 생각하는 오만한 영국도, 외국인에 의해 ‘영국다움’이 상처를 입을까 불안에 떠는 영국도 다 ‘제국’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의 책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이 주목하는 건 바로 영제국의 이러한 복잡함이다. 영제국을 만든 건 체계적인 계획이나 앵글로색슨의 ‘위대한 사명’이 아니라 우연하고도 정치적인 일련의 사건과 계기였다. 세계각지에 산재한 제국의 ‘신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방대한 네트워크에 몸을 맡겼고 말이다.

저자는 영제국의 형성과 팽창, 해체의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하는 한편, 제국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책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부분은 1부 <19세기의 유산>이다. ‘신사 자본주의’와 ‘재정-군사국가’라는 키워드로 영제국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생적인’ 근대화에 실패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산업혁명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강한 로망을 품고 있는 듯하다. 산업혁명이라는 ‘빅뱅’은 서구세계에 미증유의 풍요와 가공할 파괴력을 선사했으며, 비서구가 끝내 서구에 굴복한 이유 역시 산업혁명의 유무에 기인한다는 게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의 생각일 것이다.(심지어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역사만화가 굽시니스트조차 이러한 산업혁명 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일군의 연구자들은 산업혁명이 과연 ‘혁명’이라 불릴 만큼 급격한 변화였는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새롭게 산출한 거시경제지표에 따르면 산업혁명기의 경제성장률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산업혁명기에도 여전히 전통적 부문이 경제를 주도했고, 새로운 발명과 기술혁신은 “전통의 바다에 떠다니는 한 작은 근대적 부문”에 불과했다고 일갈한다.(자세한 내용은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를 참고하길!)

산업혁명이 그렇게까지 ‘혁명’적이지 않았다면, 영제국의 팽창을 가능케 한 요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바로 대토지를 소유한 젠트리(신사)의 이윤추구였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영형 부농’의 범주에 속할 영국의 젠트리는 일찍부터 자본제적 지대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시장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불려갈 줄 아는 탁월한 자본가였지만, 끝까지 일상적인 노동세계를 멀리하고 여가와 아마추어 정신을 중시했다. 이처럼 근면한 노동이나 적극적인 기술개발이 아니라, 자본의 투자와 임대수익으로 부를 일구는 경제활동이 바로 ‘신사 자본주의(Gentlemanly Capitalism)’다.

16세기 이래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17세기말~18세기 초 일련의 금융혁명을 거치며 귀족과 젠트리는 이전보다 더 막대한 부를 쌓아갔다. 여기에 런던 상인과 금융가들이 합세하여 영국에선 지배적 자본가 집단으로서 ‘신사적 자본가층’이 등장한다. 이들 신사적 자본가층의 주된 투자처는 당시 밥 먹듯이 전쟁을 벌이며 ‘재정-군사국가’의 길을 걷고 있던 영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기존의 재정-군사국가는 과도한 재정지출이라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세기 중엽까지 ‘글래드스턴주의’로 알려진 일련의 재정건전화 정책이 실시된다. ‘글래드스턴주의’는 국채 시장을 축소하고 ‘연줄’을 이용한 사업을 어렵게 했다는 점에선 신사적 자본가층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국내에서 ‘껀수’를 찾을 수 없게 된 신사적 자본가층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백인 자치령에 대한 투자를 시작으로, 런던의 금융자본가와 투자자들은 정교한 상거래 기법과 견고한 화폐제도를 무기삼아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해갔던 것이다.

이처럼 신사적 자본가층의 활약에 힘입어 영국은 제국으로 도약했고, 그 형태는 청나라나 오스만 튀르크 등과 달리 광대한 대양을 잇는 네트워크에 가까웠다. 케이프타운, 지브롤터, 수에즈 운하, 아덴, 싱가포르, 홍콩, 밴쿠버, 포클랜드 등 세계의 주요 해양거점이 영국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전 지구적 연결망의 중심인 런던은 식량과 고업 원료의 중계지로서, 세계 투자 자본의 처리기지로서 은행·투자·해운·해상보험·도매무역·중개업 등 무수한 서비스 부문을 창출했다. 제국의 엔진은 ‘세계의 공장’ 맨체스터가 아니라 ‘세계의 상점’ 런던이었다.

그러나 면이 아닌 점과 선의 연결을 통해 느슨하게 유지되는 제국의 지위란 근본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존 다윈이 적절히 지적했듯, 19세기 영제국의 평화와 번영이란 “수동적인 동아시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절묘한 국제정세 속에서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독일이 유럽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할 때, 미국이 넘치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발산하려 할 때, 일본이 영국의 주니어 파트너라는 수동적 지위에서 벗어나려 할 때마다 영제국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한때는 영제국 팽창의 원동력이었던 신사 자본주의 역시 20세기에 들어와선 외려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품위 넘치는 젠트리의 이상에 집착했던 기업가들이 테일러주의나 포드주의로 상징되는 미국의 새로운 생산방식을 받아들이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 대다수가 가족기업 형태로 운영되었기에 전문 관리자층을 양성하거나 기술교육을 제도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도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을 보전했던 영제국은, 1956년 수에즈 위기를 기점으로 급속히 해체되고 만다. 그나마 대륙의 프랑스나 포르투갈과 달리 ‘질서 있는 퇴진’이었다는 점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랄까?

영국인들에게 제국의 해체는 식민지배라는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찬란한 옛 영광과의 쓰라린 작별이기도 했다. 이 복잡 미묘한 감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제국의 경험이 역사연구의 주제로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역사가의 전문적인 분석이든 개인의 미시적인 기억이든 간에 영제국에 대한 인식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데이비드 캐너다인은 영제국이 인종적으로 불평등하다기보다는 신분적으로 불평등한 제국이었다고 지적한다. 영제국의 지배자들은 복잡하고 중층적인 자국의 신분체계를 식민지의 사회위계와 직접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영국의 귀족과 젠트리는 백인 노동자보다는 인도의 제후에게 훨씬 친밀감을 느꼈고, 이들 식민지 토착세력에게 각종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제국의 정체성을 공유했다. 캐너다인은 이러한 경영방식을 ‘장식주의(ornamentalism)’라고 부르는데,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을 의식한 표현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19세기의 역사가 존 실리는 미국과 러시아 같은 대륙세력에 맞서 영제국을 연방연맹으로 재편할 것을 부르짖었지만, 연방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백인 자치령뿐이었다. 인종주의자 실리는 인도가 영국과 문화적 공통성이 없기에 ‘대영국’에서 배제되는 편이 낫다고 단정 지었다. 비단 백인자치령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이들이야말로 외국인에 의해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잉글랜드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한국에도 북조선 여성에게서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누이’의 모습을 보았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남성분들이 계시니 원!) 누군가에게 영제국의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백인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제국은 다인종 귀족들이 지배하는 코스모폴리탄적 제국이었던 한편, ‘잉글랜드다움’을 숭상하는 백인만의 제국이기도 했다. 이 복잡하고 모순적인 네트워크의 일부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종, 젠더, 신분, 계급에 따라 제국을 다르게 이해하고 기억했을 터다. 하지만 책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부족하다. 물론 저자의 말마따나 영제국의 경험과 기억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상상해 본다. 스스로를 ‘인도를 다스리는 마지막 영국인’이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열렬한 내셔널리스트였던 자와할랄 네루에게 영제국은 무엇이었을까? 전형적인 영국식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면서도 (그것이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을지언정) ‘아시아적 가치’를 신봉했던 리콴유는? 아니 이런 엘리트들 말고, 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땠을까? 가령 1963년 이후 케냐 정부의 ‘아프리카화’ 정책으로 영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인도계 아프리카인들 말이다. 스코틀랜드나 웨일즈처럼 ‘브리튼인’이지만 ‘잉글랜드인’은 아니었던 사람들, 퀘벡의 프랑스어 화자들, 평생 고향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잉글랜드의 시골뜨기까지, 영제국의 기억은 어쩌면 사람 수만큼이나 다채로울지도 모르겠다.

지난 1월, 저자는 페이스북에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을 끝으로 새로운 주제를 찾아 자료를 모으고 학술논문을 쓰는 작업은 이제 그만두겠다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역시 아쉽다. 이 책은 그간 저자가 걸어온 여정의 화려한 피날레라기보다는, 이어질 연구의 위대한 서막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제국의 형성과 팽창, 해체를 꼼꼼하게 분석한 이 책을 주춧돌삼아 본격적으로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을 탐구해주십사 부탁드리는 건, 아무래도 너무 무리일까? 글쎄, 20대 젊은이를 겸허하게 만드는 저자의 성실함과 학문적 열정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 한 작업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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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책할까요 - 내 인생에 들어온 네 마리 강아지
임정아 지음, 낭소(이은혜) 그림 / 한길사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요즘 웹툰을 훑다보면 단연 눈에 띄는 건 이전보다 확연히 증가한 반려동물 웹툰이다. 푸들과 동거하는 만화, 개와 고양이가 말을 안 들어서 주인을 노곤하게 하는 만화, 개를 낳은 만화 등, 네이버만 해도 반려동물을 다룬 웹툰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봐야 할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흥미로운 점은, 수많은 반려동물 웹툰들이 하나같이 한 생명과 함께 사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배변훈련이나 예방접종 같은 사소한 일부터 노화와 죽음까지, 웹툰에서 묘사되는 반려동물과의 삶은 (비록 유머러스하게 포장될지언정) 수고와 고통의 연속이다. 도서관에 눌러앉은 길고양이에게 가끔 닭가슴살이나 건네주는 나로서는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던가 하고 놀랄 때가 많다. 하긴, 한 생명을 책임지는데 힘들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출간된 임정아의 『우리 산책할까요』 역시 함께 사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스패니얼 잡종인 까미와 하얀 푸들인 바람이와 샘이, 그 자식인 별이까지, 네 마리의 강아지와 함께한 저자의 30년 여정은 우리의 생각처럼 몽글몽글한 핑크빛으로 가득하진 않다. 오히려 실수와 좌절, 고통의 연속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자가 처음부터 강아지들에게 좋은 반려인이었던 건 아니다. 까미의 출산이 임박했을 때, 제1회 광주비엔날레와 단풍이라는 유혹을 떨칠 수 없었던 저자는 까미를 집에 두고 훌쩍 남도여행을 떠나버린다. 차가운 부엌 바닥에서 끙끙대던 까미는 끝내 문살을 부수고 안방으로 들어와 새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에서 별이를 키울 때는 별이가 짖지 못하게 하려고 전기충격을 주는 짖음 방지기를 사기도 했고, 성대 제거 수술을 위해 동물병원 진료까지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실수의 연속이다.

그래도 깨지는 만큼 단단해진다고, 저자는 실수를 통해 점차 헌신적인 반려인으로 거듭난다. 특히 앞을 보지 못하는 바람이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저자의 모습은 경외감이 들 정도다. 물론 저자도 사람인지라, 바람이를 매일같이 산책시키고 혹 어디 부딪힐까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다. 오죽하면 “아, 힘들어. 너무 힘들어”하고 한탄까지 하겠는가.

하지만 강아지를 돌보며 저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기도 한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동생 생각에 슬퍼하던 저자는 자신의 눈물을 핥아주는 샘이 덕에 기운을 차린다. 별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저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으로 좇아간다. 마치 화가가 꼼꼼하게 모델을 관찰하듯이 자신을 지켜보는 별이에게 저자는 애틋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할 만큼, 강아지들은 저자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저자는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리고 제대로 씹지도 못하는 강아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던 것이리라. 살날도 얼마 안남은 개 그냥 보내주는 게 어떠냐는 주위의 참견에 저자가 “저 애들이 어렸을 때 저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었어요. 이젠 제가 돌볼 차례죠”라고 차분히,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하는 장면은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사랑은 어렵다. 눈이 보이지 않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듯 조심스럽고 수고스런 일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상대방이 내게 선사하는 기쁨과 설렘, 경이로움 역시 그로 인해 마음 졸이고 고생하는 시간이 있기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의 어려움이야말로 기쁨이요, 행복이다. 예쁜 모습에 혹해 무턱대고 입양한 강아지를, 고작해야 베란다의 허브를 물어뜯는다는 이유로 ‘과수원 하는 친척집’에 보내버리는 사람들에게 저자가 건네는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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