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H. 토니 - 삶, 사상, 기독교 ㅣ 대우학술총서 신간 - 사회과학(번역) 622
고세훈 지음 / 아카넷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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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14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끝내 병원으로 실려간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이낙연 총리와 자웅을 겨루는 그이지만, 열성 지지자만큼이나 안티도 많아 지지층 확장에 애를 먹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애매한 태도, 강한 반공주의, 리더십 부재, 권위의식까지, 아직까진 그를 지지해야 할 이유보단 그렇지 않은 이유가 많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황 대표에 대한 지지를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다름 아닌 그의 신앙심이다.

황 대표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다. 사법연수원 시절 신학대학원을 졸업해 전도사가 되었고, 개신교 계열의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해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절을 찾고도 합장을 하지 않아 이슈의 중심에 섰다. 엄연한 세속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황 대표의 행보는 ‘사적’인 신앙을 ‘공적’인 자리에 끌고 들어온, 비판받아 마땅한 언동이리라.

하지만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가둬두는’ 게 가능할까?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에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에 안정감과 리듬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다. 신성은 고고한 성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에 깃들었고, 일상은 신성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양자는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속정부가 무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간 교회와의 싸움 역시, 본질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할 권한을 누가 갖느냐에 있었다. 어쩌면 황 대표는 그 누구보다 종교의 본령에 충실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는 기껏해야 믿을 자유 따위에 만족할 수 없다. 세속주의에 떠밀려 무력하게 사라지거나, 세상을 북돋을 새로운 도덕을 마련해야 한다. 20세기 전반 영국 노동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는 후자의 입장에 섰다. 그 역시 황 대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문제는 종교가 개인의 내면에 안분지족한데 따른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다다른 결론은 완전히 달랐다. 고세훈의 『R. H. 토니- 삶, 사상, 기독교』는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에 대해 탐구한 훌륭한 책이다.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한국인이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1880년 인도 캘커타에서 엘리트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1962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토니의 삶에는 항상 기독교가 함께했다. 명문 사립고인 럭비(Rugby School)에선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윌리엄 템플과 우정을 쌓았고, 옥스퍼드 베일렬 칼리지에선 성공회 사제 찰스 고어를 통해 사회적 도덕주의에 눈 떴다. 특히 찰스 고어는 토니 평생의 스승으로, 앵글로-가톨릭주의를 혁신하여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 것을 주문한 그의 신념은 토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토니는 그리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하진 않았고, 주변으로부터 ‘나이롱 신자’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토니의 마지막 제자인 에일머의 말마따나, 그는 가장 먼저 크리스천이었고, 그 다음에 민주주의자였으며, 그 다음에 사회주의자였다.(p.16.)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영국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토니는 우선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소환하여 당대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기 위해(p.253.)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유럽의 역사를 훑었고, 그 결과가 바로 세기의 명저인 『16세기 농업혁명』(1912)과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1926)이다. 특히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하 『발흥』)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1540년에서 1640년까지의 잉글랜드를 “토니의 세기”로 불리게 할 만큼 역사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토니는 학부 졸업을 끝으로 제도권 교육을 마무리했으니, 그야말로 ‘척척석사’인 셈이다.

 

토니는 『발흥』에서 세간의 통념과 달리, 자본주의는 이미 중세에 그 싹을 틔웠다고 이야기한다. 수도원이 운영한 대농장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로 부를 일궈갔고, 이탈리아의 가톨릭 은행가들은 전 유럽에 지점을 세우고 광대한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초 유럽 최대의 도시는 저지대의 안트베르펜으로, 당연히 가톨릭을 믿었다.

종교개혁의 사도 루터가 공격한 것도 당대 만연했던 물질주의였다. 그는 로마에 또아리를 튼 탐욕스런 적그리스도가 독일의 부를 쪽쪽 빨아들이는 현실에 크게 분개했고, 사제를 거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 개개인이 주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창했다. 그 유명한 이신칭의론과 만인사제론이다.

하지만 루터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으니, 교회조직의 타락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일체 부정해버린 것이다. 비록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가톨릭은 절제되지 않은 부를 규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법에 의거해 이자를 통제할 정교한 방안을 고민했고, 청지기사상(stewardship)의 전통에 따라 재산권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안타깝게도, 루터는 기성교회를 격렬히 비판했을 뿐 그간 교회가 맡아온 역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개개인의 양심이었지, 생활고에 찌든 독일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가 아니었다. 루터로 인해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조직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반면, 믿음은 사람들의 내면으로 퇴각해버렸다. 그 결과,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말았다. 루터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만 것이다.

 

루터와 달리 칼뱅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었으며, 쥬네브에서 이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그는 이익추구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를 신의 뜻에 종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고안된 개념이 바로 ‘소명’으로, 본디 일상의 노동마저 수도승처럼 경건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실제로 칼뱅이 컨시스토리(consistory, 일종의 자문회의 겸 감찰기관) 의장으로 평생 시민들을 단속했던 쥬네브에서, 상행위는 철저히 종교에 종속되었다.

반면 청교도가 박해받는 소수파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발생했다. 종교가 상행위를 붙잡아두기는커녕 상행위가 종교를 방패삼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분명 칼뱅주의의 소프트웨어는 반자본주의적이었다. 허나 그 하드웨어, 예컨대 예정설이나 소명의식, 엄격한 기율 등은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졌고, 잉글랜드에서 살아남은 건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쪽이었다. 토니 자신의 우아한 비유처럼, 영적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에 떨어질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p.298.)

 

1660년의 왕정복고를 기점으로, 잉글랜드에서 교회는 사회제도들을 길들이는 독자적인 가치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빈곤은 사회문제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전락했다. 로크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재산의 보존이라 천명했다. 이 신성불가침한 재산권을 행사하는 데 뒤따르는 책무는, 물론 전혀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면 경제는 윤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기규제 메커니즘이며, 그 언어는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았다.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나, 이제 사람들은 특별히 윤리적인 행위를 할 필요 없이 그저 성실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될 터였다. 개개인의 이기심도 보이지 않는 손을 거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를 거치며 ‘탈취사회’가 도래한다. 탈취사회란 첫째로 권리와 기능이 분리되고, 둘째로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며, 셋째로 경제이익의 무한한 추구를 긍정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탈취사회를 특징짓는 소유방식은 이른바 ‘무기능자산’으로, 사회적 이윤을 다하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데만 쓰이는 자산을 일컫는다. 무기능자산은 탐욕스럽게 제 몸집을 불려가고 사회의 분열은 점점 더 심해져가는 가운데 맞이한 20세기를, 토니는 깊이 우려했다.

 

그렇다면 탈취사회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토니는 페이비언 협회의 개량적 사회주의는 답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공리주의적인 마인드로 생활수준의 개선에만 치중한다면 사람들은 서비스의 혜택을 입는 소비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주의 극복 역시 요원하다는 게 토니의 입장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방을 청소하면서 영혼의 창은 닫아두는 우를 범했다. 토니가 보기에 개개인의 도덕적 각성이 없는 물질적 진보는 오히려 탈취사회의 폐단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토니에게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다름 아닌 도덕,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정신의 회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위계가 뚜렷한 중세 가톨릭의 영적 유기체 사회로 돌아가길 바랐던 건 아니다. 토니는 무한하고 전능한 신 앞에서 모두가 똑같이 작아짐으로써 평등을 이루는 사회, 동료애로 연대하며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회, 자산이 더 이상 이윤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통의 도덕에 이바지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국가와 시장이 아닌, 도덕의 지도아래 모두가 연대하여 나름의 쓸모를 담당하는 사회, 토니는 이를 ‘기능사회’라 명명한다.

 

토니는 자신이 살았던 20세기를 위한 도덕을 구태여 새로이 창안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오랜 세월 서구가 공동의 자산으로 가꿔온 기독교라는 샘에서 지혜를 길어 올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아마도 시민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지반을 갖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해온 성리학은 19세기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소멸해버렸다. 무력한 황실을 뒷방으로 밀어내고 조선을 접수한 일본의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일체의 정치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문인 아니면 테크노크라트인 사회에서 사회를 통합할 도덕을 마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도덕을 갖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분단과 친일이라는 ‘과오’를 안고 출발한 정부가 강요하는 도덕은 사람들 사이로 쉽사리 녹아들지 못했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도덕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도덕이 계속 경합했으나, 그 어느 쪽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2019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그간 사회를 아우르는 도덕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산업화 서사’와 ‘민주화 서사’는 각각 박근혜 탄핵과 조국 사태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형편이다.

 

다시 황교안 대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황 대표, 그리고 그의 행보를 지지하는 적잖은 기독교인들은 최소한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도덕을 향한 갈망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러한 갈망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애매한 다원주의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화 서사’와 ‘민주화 서사’를 대신할 새로운 도덕을 제시할 것인가? 어쩌면 성리학이 저지른 최악의 잘못은 조선을 끝내 멸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게 아니라 너무 빨리, 그리고 추하게 무너짐으로써 이 땅에 다시는 세상을 북돋을 도덕을 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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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 가난의 경로를 탐색하는 청년 보호자 9년의 기록 ㅣ 이매진의 시선 6
조기현 지음 / 이매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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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경기도의 한 공립 유치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특수반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돌본다. 유치원의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간다. 아이가 등원해 옷을 정리하고, 우유를 마시고, 놀이를 하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방과 후 수업을 듣고 하원할 때까지, 아이 곁에서 그의 하루를 함께한다. 힘든 날은 “아이고 되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고되지만, 그만큼 배우고 느끼는 것도 많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만큼, 나도 그들에게 받는다.

하지만 나는 고작해야 6시간, 하루의 4분의 1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할 뿐이다. 내 몫의 돌봄노동은 늦어도 오후 4시면 끝나지만, 아이들은 계속해서 돌봄을 필요로 한다. 유치원을 졸업한들 돌봄으로부터 졸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특수학교로 자리를 바꿔 보다 전문적인 돌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한 돌봄이란 아주 짧고, 피상적인 셈이다. 마지막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면, 자리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난 과연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돌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돌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돌봄에 대한 글을 썼다. 조기현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은 건 글을 쓴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페이지를 넘겨가며, 후회와 부끄러움에 귓바퀴가 빨개졌다. 이 책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결코 돌봄을 논하는 글 따윈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얇은 핑크빛 책은 그만큼 깊고 너른 시야로, 담담하고 따뜻하게 돌봄을 성찰한다. 감히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되는, 갑자기 죽을병에 걸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청년의 모습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장기가 적출되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고난 끝에 수술비를 마련해 부모를 살리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짧고, 굵게 ‘마무리’된다.(p.165.)

현실 속 조기현이 마주한 돌봄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2011년 양옥집을 수리하던 아빠가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로 실려 온 뒤부터 그의 돌봄자가 된 조기현의 삶은, 그럼에도 계속 흘러간다. 아들의 아들이 된 아빠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이나 중환자실에 실려가도, 당뇨와 고혈압, 갑상선 약을 달고 살아도, 발에 라면국물을 쏟아 심각한 화상을 입어도, 아빠는 꾸역꾸역 살아나간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p.81.)

 

계속해서 흘러가는 삶 속에서 조기현은 영웅서사에 도취할 수도, 자기연민에 파묻힐 수도 없다. 돌봄이라는 고난을 ‘극복’했다며 뿌듯해하거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며 절망하기엔 남은 삶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기현은 섣불리 돌봄자로서의 삶을 끝내기보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고자 한다. ‘흐름’이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닥쳐오는 운명이라면, ‘이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서사를 만들어가려는 주체적인 노력이다. 그는 돌봄을 거부하지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는 새로운 삶을 이어가보려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조기현이 이어간 삶의 궤적은 견고하고, 또 아름답다. 그는 충북 음성의 공장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면서도 취침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공장에서 나온 뒤에는 시민단체에서 서정성과 사회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오랜 꿈이었던 영화 역시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빠는 그런 조기현에게 짐인 동시에 버팀목이다. 아빠의 존재는 그를 지독히도 힘들게 만든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쫓아온다며 뛰쳐나가 애를 먹이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아빠를 돌보며 조기현은 적금 깨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오랫동안 못할 수도 있다고 담담히 체념한다.(p.78.)

하지만 돌봄을 통해 조기현은 비로소 아빠를 이해하고, 그와 더 친밀해진다. 돌봄이 안겨준 고민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더욱 치열하게 성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돌봐야 하는 아빠의 존재는 세상의 파고에 홀로 휩쓸리지 않게끔 그를 단단히 붙잡아준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인간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처럼, 조기현과 아빠는 서로 의지하고 또 갈등하며 망망대해를 해쳐나간다.

 

이러한 조기현의 ‘이음’을, 세상은 쉽사리 긍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자신의 서사를 써나가려는 건강한 ‘시민’이 아니라, 기특하고 불쌍한 ‘효자’로 취급될 뿐이었다. 가난한 흙수저가 사회변혁이나 예술 같은 ‘숭고한’ 꿈을 꾸는 일 역시 허용되지 않았다.

맘대로 ‘불행’의 낙인을 찍었으면 지원이라도 제대로 해줬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아빠가 처음 쓰러졌을 때는 8년 전에 이혼한 엄마가 아빠 앞으로 들어놓은 실비보험과 빈번히 이루어진 금전거래 탓에 긴급 복지 지원을 받지 못했다. 3년 뒤 기초생활수급자 지정을 위해 찾은 주민센터에서는 복지 담당자의 정교한 논리에 가로막혀 끝내 삶을 볼모로 말의 칼을 휘둘러야 했다.

돌봄을 받는 입장인 조기현의 아빠 역시 삶을 이어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일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던 그는 중환자실에 실려간 뒤로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뒤에도 아빠는 여전히 “움직거리고” 싶어하지만(p.157.),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화분에 물을 주거나 청소하는 것밖에 없다.

 

조기현은 이야기한다. 돌봄이 낙인이나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돌봄을 주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간 짙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돌봄을 전 사회의 문제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누구든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소 한 번 이상은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아야만 한다는 점에서, 돌봄은 그 무엇보다 공적이다. 그런 만큼 돌봄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가정’과 ‘여성’의 울타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

물론, 돌봄이 공적인 문제라 해서 모두가 의무적으로 돌봄에 참여해야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기현은 상황에 따라 돌봄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8년간 아빠를 돌보며 숱하게 미래를 단념해야만했던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으리라.

그의 아빠처럼 돌봄을 받는 사람들 역시 무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만 남아있을 수 없다. 돌봄 받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거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하며, 이를 위해선 ‘생산성’을 기준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던 종래의 합의를 재고해야 한다. 어쩌면 돌봄을 중심으로 세상을 생각한다는 건 근대 이후 이어져온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뒤엎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조기현은 가난과 돌봄을 모르는 사람들을 미워한 게 미안해서 더 열심히 글을 썼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보다 당당해도 될 때에 오히려 미안해하는 저자는, 내게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경험을 특권하기보다는 이를 딛고 더 넓은 세상을 보는 저자, 적을 상정하고 사정없이 몰아붙이기보다는 차분히 대안을 고민하는 건강한 서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조기현 본인이 이야기했듯, 사회복지사가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을 사회적으로 승화하는 유일한 길은 아닐 것이다.(p.168.) 이미 그는 서사와 이미지를 통해 얼마든지 사회적 이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의 첫 책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기를, 삶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가장 강연해보고 싶은 장소로 꼽은 공공도서관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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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 교회가 500년간 외면해온 종교개혁의 진실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 헤르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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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어 도우시옵소서. 아멘.

 

1521년,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라는 압력에 정면으로 맞선다. 상대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주인이자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그 앞에서, 루터는 저잣거리의 입말인 작센 독일어로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양심에 기대어 호소한다. 분노와 당혹감으로 뒤틀린 수많은 얼굴을 뒤로 한 채, 루터는 문을 박차고 걸어 나간다.

그리고, 모든 게 달라졌다. 개인은 사제를, 라틴어를 거치지 않고도 신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탐욕스러운 로마의 지배에 맞서 독일과 저지대, 스칸디나비아가 들고 일어났고,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은 정직한 노동과 치부(致富)를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길을 텄다. 바야흐로 자유와 이성의 새 시대가 열렸다. 유럽을 휘감았던 암흑의 베일은 산산이 찢겨 다시는 이어붙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가 볼 때, 갈가리 찢겨 마땅한 암흑의 베일은 오히려 이러한 낭만적인 환상 쪽이다. 희대의 ‘이가리 파이터’이자 자기PR의 귀재 루터, 사회학의 황제로 떠받들어지는 베버에 의해 종교개혁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퍼져나가, 종교개혁 500주년(2017)을 넘긴 지금까지도 대다수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타크의 책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는 종교개혁을 둘러싼 환상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확실하게 깨부순다.

이정도면 컨셉인가 싶을 정도로 꿋꿋하게 유럽의 각종 지명·인명을 영어식으로 바꾼 게 신경 쓰이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00~1558)를 프랑스의 샤를 5세(1338~1380)로 잘못 적는 등 치명적인 실수도 있지만(p.30.), 번역 역시 무난하다.

 

저자는 우선 종교개혁의 동기부터 와장창 뒤엎어버린다. 세간의 이해와 달리, 종교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민중의 영적인 갈망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어디까지나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하던 세속군주들이 주도한 정치적 사건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루터의 후원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잉글랜드 국교회를 창시한 헨리 8세는 모두 열렬한 성유물 덕후였지만, 교회의 막대한 재산과 성직자 임면권을 노리고 종교개혁의 파도에 올라탔다.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루터 역시 로마에 대한 증오와 독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의 글에 ‘우리’ 독일이 어찌나 자주 나오는지, 마치 민족(nation)의 탄생이 종교개혁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끝내 사그라지고 만 것도 똑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선 일찍부터 군주가 교회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1305년의 아비뇽 유수 이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착실히 키워갔고, 마침내 1516년의 볼로냐 협정을 통해 성직자 임면권을 확보했다. 오늘날 바티칸과 마찰을 빚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부러워 마지않을, 오래된 갈리카니즘(Gallicanism)의 전통이다. 에스파냐 역시 통일왕국을 이룬 뒤 프랑스의 전례를 충실히 따랐다.

 

철저히 정치적인 이벤트였던 만큼, 종교개혁의 결말 역시 정치적이었다.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독일, 저지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돌아온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었다. 신앙의 국유화였다. 독일 종교개혁을 일단락지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의 결과는 Cuius regio, eius religio, 즉 지배자의 종교가 그 지방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독일과 스웨덴, 덴마크의 군주들은 저 위풍당당한 프랑스 국왕과 마찬가지로 성직자 임면권과 교회 재산을 집어삼켰다.

네덜란드 정도를 제외하면, 이제 사람들에겐 군주의 종교를 믿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같은 개신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칼뱅파가 루터파를, 루터파가 재세례파를 공격하고 추방하는 일이 빈번했다. (애초에 저자는 ‘개신교’란 가톨릭의 여집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모호하고 실체 없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던가. 신앙의 국유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근대적’ 유산을 남겼으니, 바로 세속화다. 사람들은 원래 남이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한다. 그 남이 국가라면 더더욱! 예배 출석과 세례는 물론이고 사소한 옷차림마저 단속받는 등, 경건이 국가가 강제하는 의무가 되자 사람들은 신앙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철밥통 공무원 신분인 사제들 역시 적극적으로 신도들을 끌어 모으려 들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고백한 사제가 아무렇지 않게 강대상에 서고, 국가가 여성 사제를 허용해도 누구하나 반대하지 않는다. 사실 다들 관심이 없다는 게 보다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반면 미국처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국가에서는 오히려 종교가 맹렬해지고, 타 종교에 배타적으로 변해갔다.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쓰는 기업들처럼, 각 종교가 열성적으로 신도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미사 한번 나가지 않던 19세기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막상 미국에서 청교도들을 접하고는 열성적인 가톨릭교도로 변했다.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선교에 나선 미국인 목사들은 가톨릭의 권태로운 독점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다시금 사람들의 믿음에 불을 붙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의 역사학자 하인츠 실링은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의는 다름 아닌 ‘교파화(Confessionalization)’라고 이야기한다. 종교를 의식조차 못하던 절대다수의 유럽인들이, 개신교의 등장과 함께 자신은 어느 한 쪽에 속한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 구성원에게 끊임없이 ‘고백’을 강요한 남한과 북조선처럼, 가톨릭과 수많은 개신교‘들’ 역시 교파화를 거치며 비로소 ‘종교’로 거듭났다. 안팎으로 치열한 투쟁을 거듭하며 정체성을 확립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험은 이후 근대 국민/민족국가 건설의 밑바탕이 되었고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는 단순히 종교개혁을 둘러싼 환상과 오해를 까발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진정한 의의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데, 크게 세 가지만 꼽아보도록 한다.

 

우선 저자는 종교개혁이 순전히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과연 타당한가 싶다. 종교개혁을 순전한 영적 각성으로만 받아들였던 기존의 이해에도 분명 문제는 있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180도 틀어버릴 필요가 있을까? 선행연구가 세속군주의 이해관계가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도외시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저자가 숱하게 인용하는 R. H. 토니의 말마따나, 역사는 관념과 물질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물론 최대한 콤팩트하게 주장을 전개해야하는 교양서에서 그렇게 쓰면 재미야 좀 떨어지겠지만.

 

저자가 자기 입맛에 맞게 학자들의 주장을 끌어다 쓰는 모습도 보기 좋진 않다. 가령 자본주의를 만든 건 칼뱅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이라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R. H. 토니는,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칼뱅주의가 맡은 역할까지 부정한 건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칼뱅 이전에 이미 태동했고 칼뱅 자신이 자본주의를 긍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칼뱅주의의 엄격한 규율과 소명의식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배양하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저자가 눈에 불을 켜고 비판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영어판 서문을 쓴 사람이 다름 아닌 토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근대’ 개신교를 비판하고 ‘중세’ 가톨릭을 옹호하며 사용하는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안긴다. 요컨대, ‘전근대’는 ‘근대’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긍정할 수 없는가? 오늘날 우리가 바람직하며 보편적이라 여기는 근대적 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전근대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개혁을 거치며 서구가 근대를 맞이했다는 통설을 비판하기 위해, 종교개혁 이전에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과학적 탐구정신이 존재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이에 따라 중세의 수도원은 자본주의의 배양실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민주주의의 수원(水源)으로,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예비한 종교로 탈바꿈한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 갖는 혁명적 의의는 퇴색했을지언정, 근대중심주의와 서구중심주의는 오히려 강화되고 말았다.

근대를 앞당김으로써 전근대를 긍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비단 서구 학자들이 자기네 역사를 다룬 저술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이미 효력이 다했음에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는 ‘언데드’인 자본주의맹아론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니, 최근 들어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는 성리학 긍정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혹자는 만인의 성인됨을 긍정하고 일종의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낸 성리학이야말로 동아시아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동안 양명학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근대적인 무언가를 이제는 성리학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근대의 시점을 양명학이 등장한 16세기에서 성리학이 등장한 12세기로 올려 잡은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의의를 가질까? 성리학, 그리고 가톨릭은 양명학과 개신교를 ‘예비’했다는 점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하는 걸까?

 

근대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전근대를 긍정할 방법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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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 '배교자' 이승훈의 편지
윤춘호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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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사, 그중에서도 양반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역사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감과 함께 그만큼의 의문 역시 안겨준다. 조선은 좋게 말하면 ‘철학의 왕국’, 나쁘게 말하면 ‘관념국가’라 일컬어질 정도로 학문을 사랑했고, 진리를 향한 날선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광대한 우주에서 개인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바람직한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다. 혹자는 만인의 성인(聖人)됨을 긍정한 성리학이야말로 동아시아 근대성의 분기점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그 영향력은 넓고 깊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양반들은 성리학을 버리고 서양의 낯선 가르침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누구보다 성리학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체제에 안주하며 충분히 영화롭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그들이 말이다. 대체 왜 양반집 도련님들은 비밀스럽고, 위험하며, 어딘가 중2병(!)스럽기까지 한 사이비 종교를 열렬히 사모했는가? 성리학이라는 정교하고 세련된 체계는 왜 그들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었는가? 형장의 이슬 되어 사라져가면서까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윤춘호의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이하 『믿는 일』)는 조선 양반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이었는가를 파고드는 훌륭한 팩션(Faction)이다. 역사 교양서와 소설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이 책은 때로는 꼼꼼한 사료독해로, 때로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자의 전작 『봉인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당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다채로운 시선이 흥미롭게 교차하면서도, 이승훈의 삶과 믿음이라는 하나의 서사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정갈하고 유려한 문장 역시 독서의 즐거움을 돋운다.

 

제목에 떡하니 “다산”을 박아놓아 착각할 수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정약용이 아니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초대교회를 이끌었으나, 믿음을 저버리고 종국에는 목숨마저 잃은 배교자 이승훈이다. (그럼에도 신문사 서평들은 하나같이 정약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퍽 안타깝다)

왜 하필 이승훈인가? 성인이나 복자로 추앙받지도, 한국사의 위인으로 존경받지도 못하는 그를 구태여 무덤에서 불러낼 필요가 있는가?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세례명인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배교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이승훈의 삶이야말로, 당시 조선에서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절절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죽음은 이벽처럼 비극적이지도, 정약종처럼 비장하지도 않았다. 구차하고 처절했다. 바로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끔 한다.

 

『믿는 일』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된 가상의 편지글, 그중에서도 이승훈과 북경의 예수회 사제 그라몽이 나눈 대화이다. 각기 다른 이유로 희망에 부풀어 오른 두 사람이 빚어내는 묘한 긴장과 불안이, 앞으로 펼쳐질 조선 천주교회의 험난한 앞날, 그리고 이승훈 개인이 겪을 고난과 좌절의 전조로 읽히는 탓이다.

 

1783년, 이승훈은 28살 젊은이.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가장 거대한 제국의 심장에 들른다. 그곳에서 선배 이벽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던 서양의 가르침을 접한다. 지금껏 알아온 성리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우주를 접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 푸르고 코 높은 노인에게 죽음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지는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통역을 거쳐 더듬더듬 배운다. 노인을 만난 이후, 이승훈은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믿는다.

서양의 앞선 문물에 대한 동경과 갈망 역시, 천주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뒤흔든다. 노인의 신묘한 재주, 견고하고 웅장한 북경의 북당(北堂)과 아름답게 울리는 파이프오르간,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는 놀라운 기계까지, 이 모든 게 가난하고 낙후한 조선 청년의 눈에 선명히 박힌다. 이승훈은 조선 역시 서양처럼 번영하기 위해서라도 천주를 믿어야겠다고 확신한다. 그에게 신앙과 진보는 떨어져있지 않다.

무엇보다, 젊은이 특유의 치기와 열정, 공명심이 이승훈을 이끈다. 사실 노인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현란한 문물 역시 겉핥기로만 접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거기에 자신의 미래를 걸어보기로 한다.

 

이승훈을 맞이하는 그라몽 신부, 그는 나고 자란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극동에 온지 20년이 되어가는 예수회 사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신부지만, 이제는 조금씩 지쳐간다고 느낀다.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주들은 천주의 충직한 종을 자처하면서도 자꾸만 교회를 국가의 손 안에 두려한다. 교황의 사냥개라는 멸칭을 감수하면서까지 헌신해왔건만, 돌아온 건 예수회 해산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명령이다. 아직까지 북경에 남아있는 건 지저분한 재산문제를 매듭짓지 못해서일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은자의 나라 코레에서 왔다는 한 젊은이가 난데없이 북당으로 들이닥친다. 부르주아에게 봉건적 신분질서의 수호자로 비난받는 사제를, 그는 만민평등의 사도로 받아들인다. 계몽주의자에게 미신과 야만의 총체로 조롱받는 천주교를, 그는 첨단을 달리는 진보의 총아로 동경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심지어 이 젊은이는 천주의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라몽 신부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젊은이에게 세례를 준다. 위대하신 신의 뜻을 한낱 인간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유가 무엇이건 선교사를 파견한 적도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 이렇게 천주를 알고자 찾아온 젊은이가 있지 않은가! 그라몽 신부는 젊은이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다만 젊은이의 치기와 야심이 못내 불안했던지, 신부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내린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다시 주의 품으로 돌아온 베드로 성인의 힘을 빌어, 언제라도 날아갈 것 같은 그의 마음을 천주에 묶어두고자 한다. 이런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이는 그저 교회의 반석이 될 기대에 부푼 듯 보이지만.

 

과연, 조선으로 돌아온 뒤 이승훈의 삶은 베드로를 빼다 박았다. 북경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스레 서학 집회를 가진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아버지 앞에서 첫 번째 배교를 한다. 이 배교는, 역설적으로 이승훈의 설익은 믿음을 더욱 깊고 단단히 뿌리내리게 했다. 회개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온 1795년부터 1800년까지, 이승훈은 자신을 포함해 10명의 임시신부를 선출하고 교단을 정비하는 등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임했다.

하지만 성리학을 국교로 삼는 나라, 단 한 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않고 단 한 명의 외국인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서 천주를 섬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로 지내는 동안 이승훈은 이 어려움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풀어나갔다. 임시성직제도가 독성죄라는 유향검의 문제제기를 깔아뭉개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북경에 편지를 보내 답을 구하는 등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졌다.

이 과정에서 이승훈은 천주에 대해, 믿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한다. 조정은 단 한 명의 선교사 파견도 허용치 않을 것이고, 목자 없는 양떼들은 천주를 믿음에도 구원받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제사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조상과 공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지 못하게 하는 서양 사제들의 불관용을 두고 볼 수 있는가? 명예는 최대한으로 누리려고 들면서, 책임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뻔뻔스런 교회 지도자들은 또 어떻고?

고뇌 끝에, 이승훈은 믿음을 버리기로 한다. 아니, 정확히는 믿음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내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배교(1791)와 세 번째 배교(1795)가 이루어졌다. 베드로와 달리, 이승훈이 세 번째로 회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교회를 떠났고, 국가와 문중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던 이승훈에게,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정조가 승하한 뒤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와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사학(邪學)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인 것이다. 신유박해(1801)라 불린 이 파국을, 아무리 배교자라 한들 이승훈이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국문장에서 그는 자신이 믿음을 버린 지 오래라고 항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에서도 옛 동료들을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심문관 앞에서 동료는 물론이요, 친형 정약종의 이름까지 술술 불어버림으로써 기어코 살아날 구멍을 찾아낸 정약용과는 대조되는 행보다.

1801년 2월 26일, 이승훈은 서소문 앞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조선 최초의 영세자였고, 한때는 사실상의 주교였던 만큼 당연한 결말이었다.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달레의 말마따나, 이승훈은 참회한다는 한마디면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다.”(p.242.) 그럼에도 이승훈은 끝끝내 이를 거부하고 배교자로 죽었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혹시 앞으로 더 큰 고통만을 남긴 채 자기 하나만 주의 곁으로 돌아가는 걸 죄스럽게 여겼던 건 아닐까. 막판에 회개하여 순교자로 남을 경우, 천주교회는 자신의 죽음을 거룩하게 포장하여 음지에서 세를 불려갈 것이다. 허나 앞으로도 조선 땅에서 천주교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만일 ‘순교자 이승훈’에 이끌려 무고한 신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면, 애꿎은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고로 이승훈은 추한 배교자로 남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내 시체를 보고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도록, 그래서 믿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무의미한 죽음은 이걸로 족하다.

 

이승훈의 생각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역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으나, 다산처럼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승훈은 믿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잘 알았고, 그로인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의 동학들도 마찬가지다. 도교의 신선술에 심취했던 괴짜 천재 이벽은, 천주교로부터 성리학이 결코 주지 못하는 내세에 대한 전망을 얻었다. 그는 죽음을 불사한 아버지의 반대 끝에 독방에 틀어박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주교에서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보았던 정약종은 가혹한 고문에도 신념을 꺾지 않았고, 순교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은 다르게 믿고, 다르게 죽었다. 하지만 믿음의 무게를 안다는 점에선 모두가 하나였다.

 

이들을 보면서,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빼어난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이. 하늘에서는 상제(上帝)가, 땅에서는 군주가 만물을 조화롭게 주재하는 세상을 꿈꾼 이. 선한 목자가 되고 싶었으나 결코 양과 목자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이. 그런 다산에게, 믿음의 무게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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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앤더슨 2019-12-08 22: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뷰 자체가 탁월한 시가을 보여 주네요

유찬근 2019-12-13 18:12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인데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810kimyj 2019-12-10 0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빠져드는 문장력, 따스한 저자의 감성이 느껴지는 책이네요.
 
돌봄 민주주의 - 시장, 평등, 정의
조안 C. 트론토 지음, 김희강.나상원 옮김 / 아포리아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한 일본인의 연설이 이웃나라 한국에서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신생정당 레이와 신센구미(れいわ新選組)의 당수인 야마모토 타로. 평소 일본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동영상을 공유하며 공감을 표했던 건, 배우 출신인 야마모토의 뛰어난 언변 때문만은 아니었다. 야마모토 타로의 연설은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어떤 불안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바로 ‘생산성’이 떨어져 언제든 탈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 어떤 사람도 평생 생산적일 수는 없다. 한국의 경우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시기는 길게 잡아야 1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까지다. 그 전후로는 좋든 싫든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야마모토 타로의 연설이 장애인과 저소득층을 넘어, 보다 광범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돌봄이란 사실상 ‘운명’이므로.

이젠 너무나 진부해진 말이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마저 붕괴됨으로써 생산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더욱 가혹한 처지로 내몰렸다. 누구나 남에게 돌봄받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은, 의지할 곳이 사라진 순간 ‘비운’으로 거듭났다. 사람들은 이제 생산성이 없으면 죽어 마땅하다는 슬픈 운명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이 ‘비운’을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보다 견딜만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야마모토 타로는 ‘전통적인’ 해법, 다시 말해 국가의 역할 확대를 염두에 둔 듯하다. 하지만 설령 국가가 모든 걸 떠맡는다 한들, 운명의 방향을 틀 수 있을까? 여성주의 정치학자인 조안 C. 트론토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복지국가의 전성기 시절처럼 돌봄을 국가에게 ‘외주’ 줄 경우, 필연적으로 돌봄에서 비켜난 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책 『돌봄 민주주의』는 돌봄이란 국가가 일방적으로 떠맡기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럼 대안은 무어냐, 바로 돌봄의 민주화다.

 

트론토는 돌봄을 ‘윤리’가 아닌 ‘관계’의 측면에서 정의한다. 돌봄은 개인의 이타심에 기반한 주체적인 선택 혹은 미덕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이상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이다. 마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 돌봄은 매우 일상적이고 광범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성격이, 돌봄을 정치적 의제로 테이블에 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저자는 그간 돌봄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생각하지 못하게끔 방해해온 요인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돌봄은 여성(만)의 자연스럽고 사적인 활동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이다. 아내에게 당신이 일 나가면 애는 누가 키우냐고 당연한 듯 물어보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성들이 잘 보여주듯, 돌봄은 ‘여성’과 ‘가정’이라는 경계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돌봄의 민주화를 방해하는 두 번째 요인인 ‘돌봄 무임승차’는, 돌봄을 ‘가정’과 ‘여성’에 묶어둔 이러한 편견이 오랜 세월에 걸쳐 튼튼히 뿌리내린 결과다. 돌봄 무임승차란 말 그대로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가며 돌봄의 의무는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누리려는 행태를 일컫는데, ‘보호형 무임승차’와 ‘생산형 무임승차’가 대표적이다.

보호형 무임승차에 대한 설명으론 “여자도 군대 가라!!”는 한 마디면 충분할 듯싶다. 한국사회에서 군복무는 일종의 ‘시민권’이자, 돌봄 의무에 대한 ‘면책특권’으로 작용한다. 거칠게 말해 남성인 나는 군대에서 온갖 고생 다 했으니 이걸로 됐고, 여성인 너는 군대도 안 갔으면서 이것저것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군복무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돌봄의 범주에 들어갈 터이지만(이 점에서 저자는 급진 여성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남성들은 구태여 군복무를 돌봄에서 떼어내고 전자를 특권화한다.

‘전선’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보호형 무임승차와 달리, ‘바깥’에 있는 ‘일터’에 나간다는 이유로 남의 돌봄에 올라타는 생산형 무임승차는 좀 더 복잡하다. 작가 정지민이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에서 담담하게 적고 있듯, ‘바깥양반’ 여성이 ‘안사람’ 남성에게 난 밖에서 쌔빠지게 고생하는데 넌 집에서 놀면서 뭐가 그리 힘드냐며 짜증내는 상황 역시 얼마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집 밖의 일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남녀평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구 공산권의 야심찬 기획 역시, 어떤 여성은 남의 돌봄에 무임승차하고, 어떤 여성은 이전보다 더 많은 돌봄 의무를 떠맡는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돌봄과 민주주의의 사이를 벌려놓은 세 번째 요인은 바로 1980년대부터 착착 이루어진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사회란 건 없다는 대처의 선언 이후, 개인과 가정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떠맡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돌봄은 국가는 물론이고 가장 전통적인 거처였던 가정으로부터도 떨어져나가, 점차 시장에 포섭되어갔다. 조주은이 『기획된 가족』에서 예리하게 포착했듯, 화이트칼라 여성이 아이와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신성한 돌봄’과 ‘허드렛일’을 분리하여 자신은 전자만을 수행하고 후자는 가족이나 가사도우미에게 외주를 맡기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칼라 여성이 남들의 돌봄에 전적으로 무임승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일은 일대로 하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업무 틈틈이 세심하게 가족을 돌봐야만 한다. 앞서 언급한 ‘허드렛일’의 외주화는, 임금노동과 돌봄의 이중굴레에서 허우적대는 이들 화이트칼라 여성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화이트칼라 여성이 이럴진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머지 여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화이트칼라 여성이 고용한 가사도우미는 하루의 절반은 남의 집에서,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집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돌봐야만 한다.

 

이처럼 저자는 가부장제와 임금노동의 신성화,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해 돌봄이 진지한 정치적 의제로 다뤄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지금이라도 돌봄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정에 떠넘기거나 국가와 시장에 외주화하는 일 없이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돌봄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위한 로드맵이다. 저자는 돌봄에 적합하게끔 시공간을 재조직해야한다고 주장할 뿐,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경우 남성 의무 육아휴직제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했듯,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돌봄은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이른바 ‘돌봄복무제’ 도입이다. 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남성들에게 군복무 말고도 돌봄이라는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신체조건(사회복무요원)이나 아주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입증해야하는 본인의 신념(양심적 병역거부)과는 상관없이, 모든 남성은 자유롭게 군복무와 돌봄복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후자를 택할 경우 유치원, 아동센터, 특수학교, 요양원, 복지관 등에서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 물론 업무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돌봄복무 기간은 군복무 기간보다 길어야 한다.

돌봄복무제가 그럴싸한 이유는 사회복지에 들어가는 세금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건 돌봄이 군복무와 동렬에 놓이게 되는 상황 그 자체이다. 앞서 언급했듯 군복무는 그간 한국사회에서 일종의 ‘시민권’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공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사실상 군필자(당연히 남성)에게만 부여되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남성에게 군복무와 돌봄복무라는 선택지를 주는 건, 돌봄이 군복무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란 걸 보여줄 수 있는 무엇보다 좋은 방법이다. 나아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군복무 역시 보다 넓은 의미의 돌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돌봄이 군복무보단 편하지 않냐고. 글쎄, 어느 쪽이 더 ‘헬’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유치원 특수반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돌보는 사회복무요원으로서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돌봄, 절대로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하루 종일 말 안 듣는 아이를 향해 우유 마셔요, 바르게 앉아요, 정리해요 같은 말을 백 번 넘게 되풀이하고, 잠깐 한눈판 사이에 저만치 뛰쳐나간 아이를 쫓아가고,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보면 “아이고 되다”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는 건 힘든 만큼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만일 구청이나 선관위같은 ‘꿀무지’로 배정받았다면, 나는 결코 돌봄의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한국 남성들이 돌봄복무제를 통해 돌봄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돌봄이 당연히 남성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여성 역시 군복무와 돌봄복무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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