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아시아 건축기행 - 유토피아를 디자인하다 My Little Library 7
강영환 지음 / 한길사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알고 있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그리고 둥근 지구에는 6개의 대륙과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으며, 그 위에 200여 개의 국가가 아웅다웅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던, 그래서 세상의 끝까지 가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옛 사람들을 마음껏 비웃어줄 만큼, 우리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자신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터치 몇 번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징그러우리만치 선명하게 담아낸 위성사진을 간단히 검색할 수 있다. 각종 위키에는 세계 각지에 대한 자질구레한 정보가 그야말로 넘쳐흐른다. 하지만 단순히 알 수 있다고 해서, 진정으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알고 있다는 건 어떤 상태를 일컫는 걸까? 지구에 사는 그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이란 게 존재할까?

예컨대 동양은 어떨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책 오리엔탈리즘에서 유럽인에게 동양이란 아나톨리아와 서남아시아(근동/중동)인 반면, 미국인에게 동양이란 곧 동아시아(극동)라고 지적한다. 똑같은 세계지도라 해도 한국의 세계지도는 동아시아가 중심인 반면, 영국의 세계지도는 유럽대륙이 중심에 놓인다. 내가 누구고 어디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나 다른 것이다.

강영환의 아시아 건축기행이 독자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 역시, 세계의 모습은 여럿이라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이다. 이는 책의 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책에서 다루는 지역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국한되지만, 제목에는 별다른 수식어 없이 아시아만 떡하니 써놓았기 때문이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만 다녀왔으면서 아시아 건축기행이라니, 한국 독자라면 어딘가 허전하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던 아시아는 과연 어떤 아시아였던가? 말만 안했다 뿐이지, 한국인에게 아시아란 사실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였다. 인도아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 인도양의 수많은 섬들은 한국인에겐 아시아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나 동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하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은연중에 아시아의 대표는 어디까지나 동()아시아고, 나머지 지역은 쩌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영환은 그간 한국에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라 불리던 지역을 과감하게 아시아라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좁은 시야를 과감히 열어젖힌다. 그렇다, 저들도 아시아다. 서울에선 동()아시아가 곧 아시아겠지만, 프놈펜과 방콕, 자카르타에서는 그곳이 바로 아시아다. ‘이나 동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시아의 당당한 일원인 것이다. 저자가 자칫 혼란을 줄 수도 있는(예컨대 , 이거 중국이랑 일본 얘기 아니었어?!”) 제목을 구태여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여정은 인도 남부에서 시작해 바다를 건너 스리랑카를 들르고, 자와 섬을 거쳐 다시 인도차이나 반도를 둘러본 후 네팔과 부탄에서 끝을 맺는다. 행선지를 이어보면 길고 비스듬한 타원이 만들어진다. 이 매끄러운 타원은 그냥 나온 게 아닌지, 본래 경상일보에 연재된 글을 묶은 것임에도 마치 한 번에 쓴 책처럼 짜임새가 있다.

저자는 아시아 곳곳의 종교건축을 소개하는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신을 찬미하고 그 전능함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엄한 건축물을 유토피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유토피아의 의미는 어디에도 없는 곳인데, 종교건축이란 초월적인 무언가를 형이하의 세계에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종교건축은 어디에도 없는 곳’, 다시 말해 유토피아를 감히 이 땅에 세워보려는 야심찬 시도인 것이다.

한데 아시아 곳곳에 들어선 이 유토피아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 아니, 따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매섭다. 자이나교의 성지인 인도 스라바나비라골라의 사원과 위압적인 입상 앞에서는 평화공존과 해탈을 추구했던 자이나교의 정신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냐며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자와의 보로부두르를 보면서는 이곳 사람들의 찬란한 고대문명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추동한 게 신앙심보다는 왕의 욕심이 아니었을까하고 넌지시 질문한다. 미얀마 양곤에서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편에는 휘황찬란한 황금불탑이, 다른 한편에는 너저분한 시장이 들어선 모습에 부처의 가르침이 진정 무엇이었나를 고민한다.

아시아의 종교건축을 향한 저자의 비판은 꽤나 수위가 높은지라, 혹자는 이거 오리엔탈리즘 아니야?’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을 식민지의 옛 수도를 거니는 백인 제국주의자의 그것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저자는 서구, 정확히는 서구 식민국가가 아시아에 남겨놓은 위압적인 관공서와 랜드마크 역시 통렬히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건축이든 식민국가의 개선문이든, 모두 주변을 무시한 채 홀로 우뚝 서서 그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전까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다시 나올 수 없는 유토피아가 되어보려는 그 오만함이야말로 저자가 경멸해 마지않는 것이리라.

아시아를 거닐며 만난 너무 많은 유토피아에 기가 빨린 듯, 저자는 책의 곳곳에서 한국 전통건축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신비롭고 경건한 석굴암과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인간다움이 물씬 느껴지는 불국사는, 저자에겐 온갖 기름진 음식에 질렸을 때 들이키는 동치미 한 사발과도 같다. 다른 나라까지 가서 굳이 한국 전통건축을 예찬하는 저자의 모습에 젊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1953년생이다. 그가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던 시절, 문화예술계 최대의 과제는 한국적인 것의 영역을 발견하고 개척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자부심은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오늘날 한국적인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길고 비스듬한 타원을 그리며 펼쳐지는 저자의 아시아 건축기행은 네팔과 부탄에서 끝을 맺는다. 결코 부유하다 할 수 없는 이 작은 나라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꿈꿔온 이상적인 공간을 비로소 마주한다. 네팔 박타푸르의 광장들은 오직 관광객만을 위한 박제된 문화유산이 아니다. 광장은 평범한 주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면서도, 길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탑과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그곳이 신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과 속(), 인간과 신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지 않고 광장에서 한데 어우러진다. 그 결과 박타푸르에서는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어떠한 영성이 깃들어 있다.

유토피아는 없다. 장엄한 종교건축이든 휘황찬란한 랜드마크든,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사람들의 삶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건축,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주되 그 삶에 경건함을 불어넣어주는 건축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다. 긴 여행 끝에 저자가 얻은 깨달음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 세상의 통념을 저격하다
강양구 지음 / 북트리거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어로 쓰인 좋은 교양서가 없다!!” 어쩔 수 없는 한국어 화자이자 중증의 활자중독자인 내가 한국 출판계에 갖는 불만 중 하나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로 된 좋은 학술서는 사실 적지 않다. 생각해보라. 한국에 대학이 몇 개고 연구자가 몇 명인데, 이들이 쓴 박사논문 중에 건질 만 한 게 없겠는가? 심지어 훌륭한 연구자와 명민한 출판사가 만나면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잘 엮어도 훌륭한 학술서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다.

반면 교양서의 경우는, 안타깝지만 좋은 책을 찾기 쉽지 않다. 어쩌면 당연하다. 교양서가 학술서보다 쓰는데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선수들사이에서 읽히는 걸 전제로 하는 학술서와 달리 교양서의 독자는 말 그대로 교양시민’, 그러니깐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에 목말라 있는 일반인이다. 이들 교양시민에게 지식의 첨단을 요령 있게 소개해야 할 뿐 아니라, 보다 깊은 공부로 나아갈 수 있게끔 신선한 자극을 주는 일이 교양서 저자의 의무다. ,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도 빠질 수 없다. 그러니까 좋은 교양서 쓰기란 무지하게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이 어려운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 강양구 기자님이 최근 또 한 권의 훌륭한 교양서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을 내셨다. 그런데 이 책, 조금 이상하다. 우선 새빨간 표지부터 뭔가 불온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내용은 더 자극적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지, 미세먼지가 정말 중국 탓인지, 시골이 도시보다 친환경적인지 등,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겨온 통념에 거침없는 질문을 던진다.

좋다, 여기까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 이런 수상한 질문들을 꺼내고 있는 걸로도 모자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며 자기 생각을 밝히는데 거리낌이 없다. 아니 이게 교양서, 그것도 고등학생을 상대로 쓴 글(고교독서평설)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본디 교양서의 사명이란 지식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전달이 아니던가! 혹시 저자가 교양서의 이름을 빌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고등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려는 건 아닐까?

이에 대한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의 전달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수업평가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선생님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쳐요인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객관중립을 신봉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과연 객관중립이 가능할까?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특수하고 편향된 입장에 불과하다. 이를 숨기고 자신만이 객관이고 중립이니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내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오만이며, 다양한 생각을 억누르는 폭력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남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무구하지도 않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선생님이 정치적이라는 불만이 그렇게나 많이 터져 나오는 모습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생각에 전혀 감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교사의 편향된주장은, 그간 막연한 느낌으로만 존재했던 학생들의 생각을 보다 단단히 영글게 하는 촉매의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요컨대, 가르치는 쪽이 말을 쎄게할수록 배우는 쪽에게 도움이 된다.

저자가 우물쭈물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7p.)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대충 글을 마무리 짓지 않는다. 대신 온갖 흥미진진한 주제들을 풀어놓고는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며 독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전지전능한 선생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독자와 눈을 맞춘 채 스파링이나 한 판 뛰자며 주먹을 쥐어 보이는 저자라니! 없던 호기심도 절로 생기지 않을까?

물론 저자와 독자의 체급 차는 굉장히 큰지라, 아무 것도 없이 맞짱을 뜬다면 어느 쪽이 질 지는 너무나 뻔하다. 따라서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은 상세하고 친절하게 배경지식을 설명해 줌으로써 둘 사이의 밸런스를 맞춘다. 특히 각 챕터 끝부분에 더 읽어보면 좋을 책들을 소개한 <확장해서 읽기>는 저자의 꼼꼼함과 배려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비단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책 뿐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책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위험한선거에 반대한다에서 저자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하며 제비뽑기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출판사는 무려 후마니타스다!!) 역시 <확장해서 읽기>에 들어가 있다. 마찬가지로 집단 지성인가, ‘집단 바보인가우리보다 멍청한 판단을 내릴 위험을 경고하는 글이지만, 저자는 집단 지성의 가능성을 긍정한 대중의 지혜도 친절하게 소개해놓았다. 판을 깔아줄 테니 제대로 맞짱한 번 떠보자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달까?

이처럼 독자들을 향해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저자가 바라는 건 더 많은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이 넘쳐 나는”(8p.) 세상이다. 우리 몸 속 약 39조 마리에 달하는 세균들은 저마다 중요한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공생자라고 한다.(요구르트의 꿈, 김치의 꿈, 유산균의 꿈) 마찬가지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건강하고, 활기차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는 세균들일 것이다.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매개체로서는 뭐니 뭐니 해도 책만 한 게 없다. 저자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 역시 책을 향한 저자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들어가며>였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읽으며 책 읽는 재미를 깨달았다는 저자의 경험담에선 치과진료를 기다리며 흑백판 먼나라 이웃나라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조금 뭉클하기도 했다.

물론 세상은 우리 같은 독서 중독자들에게 그리 녹록하지 않다. 저자가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지적했듯 몇몇 셀럽들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독점하는 쏠림 현상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고 참신한 책들이 담고 있는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셀럽들의 책에 가로막혀 독자에게 채 가닿지도 못한다. 저자는 책 동네의 역동성이 사라져가는 이러한 현실에 우려를 금치 못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지하 토굴에서 비밀 회합을 이어가던 초기 기독교가 화려하게 부상해서 세상을 점령했듯이 책 읽는 사람들 사이의 느슨한 연결이 쌓이고 쌓여서 책읽기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과시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저자가 올린 게시물을 읽고 책 읽는 사람의 지위가 로마제국의 가혹한 박해를 받아 숨어 지내던 기독교도에 비견될 정도로 추락했구나 싶어 조금 우울하긴 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도서관 서가에서 뽑아든 책의 제목은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다.) 그래도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넓고 깊은 경험(6p.)을 선사하는 독서의 가치와 즐거움을 굳게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책이라는 숙주를 거쳐 온 세상에 수상한 질문위험한 생각들이 우글거리기를 꿈꾼다.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이 질문하기를 가르치지 않는 사회, 책 읽지 않는 시대에 자그마한 균열을 낼 수 있는 짱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 철학의 왕국 - 호락논쟁 이야기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락논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주제다. 최소한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선 전기와 후기에 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락논쟁은 앞의 두 논쟁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논쟁으로 꼽힘에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재수 시절 풀었던 국어 모의고사 지문을 통해 처음으로 호락논쟁을 접했다.

  사실 세 논쟁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건 의외로 호락논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사단칠정논쟁과 예송논쟁의 경우, 막상 조금이라도 깊게 들어가는 순간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절벽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사단과 칠정이 리()와 기() 중 어디에 속하는지, 계모인 자의대비는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전개된 치열한 논쟁을 접한다면 누구라도 얼이 빠질 것이다.

  반면 호락논쟁이란 거칠게 말해 인간과 동물,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본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머리에 팍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부딪혔던 쟁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고민거리이기에, 비교적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호락논쟁이 대중에게 이토록 홀대받았던 이유는, 다른 두 논쟁과 달리 논쟁 바깥의이야깃거리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단칠정논쟁은 젊고 야심찬 기대승의 도발에 나이든 대학자 이황이 보인 진지하고 겸손한 태도로 두고두고 회자되며, 조선 전기의 건강한 학문적 분위기를 상징하는 논쟁으로 기억된다. 예송논쟁 역시 그 쓸모없음을 조롱하건, 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성숙에 감탄하건 간에 어쨌든 이야깃거리가 차고 넘친다. 이와 달리 호락논쟁은 소위 임팩트있는 사건이 없어서인지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듯하다.

  요컨대 누구나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지만, 이야깃거리가 상대적으로 풍부하지 않다는 점이 호락논쟁을 21세기 한국인의 삶으로 끌고 들어오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 철학의 왕국(이하 철학의 왕국)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저자 이경구는 호락논쟁의 쟁점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기보다는 이를 두고 벌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논쟁의 당사자인 한성의 낙론과 충청의 호론, 논쟁을 중재해야 했던 영조와 정조, 논쟁 바깥에 비켜서서 이를 객관적으로 관찰했던 남인과 소론 등 호락논쟁을 키워드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체상이 들어온다. 단순히 글이 좋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너무나 단정하고 아름다워 탐이 날 지경인 저자의 문장 역시 독자로서 누리는 과분한 호사이자 즐거움이다.

  이처럼 술술 읽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철학의 왕국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리학이란 무엇이며, 호락논쟁은 무엇을 두고 벌어졌는가를 서술한 2장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머리를 싸매는 성리학(!!)을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을 뿐 아니라, 이쪽 분야의 책으로는 퍽 이례적으로 주자학의 양면성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땅에 무려 500년 넘게 뿌리를 내려온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지라, 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들은 주자학을 평정심을 갖고 차분히 바라보지 못한다. 학자들 역시 다르지 않은지라,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이 오래된 미래북한의 조상이냐에 따라 주자학에 대한 평가가 널을 뛰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모름지기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인데, 주희 선생이 아무리 꼼꼼하고 똑 부러진다 한들 우리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콩알만 했을 때부터 저 하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던 조숙한 소년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도전에 맞서 송대 유학을 집대성하고, 하나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리()의 보편성을 근거로 만인의 성인됨을 옹호했는데, 김상준이나 미야지마 히로시는 이를 근거로 주자학에 근대성의 맹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주자는 기()의 차별성을 내세워 금수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의 금에게 중원을 빼앗겼다는 열패감에 시달리던 남송의 한족 이데올로그이기도 했던 것이다. 주자학은 중화와 야만, 성인과 범인을 구별 짓고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계승범의 경우 바로 이러한 차별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리라.

  요컨대 주희는 김상준과 미야지마 히로시 식으로도, 계승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상당히 다면적인 인물이다. 그가 집대성한 주자학 역시 아무리 체계적이라 한들 평등과 차별의 양 측면을 모두 갖고 있고 말이다. 호락논쟁이란 결국 주자 자신보다도 주자를 완벽히 이해하고자 했던 조선의 유자들이, 주자학의 어느 한 측면에 주목하여 이를 정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립인 것이다.

  조선 최대의 이데올로그였던 송시열의 제자들은 만물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두고 분화를 시작했다. 충청도의 권상하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집한 호론은 인간과 동물, 성인과 범인의 본성이 다르다며 차별을 정당화했다. 한성의 김창협을 중심으로 느슨한 네트워크를 형성한 낙론은 만물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며 평등을 주창했다. 호론과 낙론이 벌인 치열한 논쟁은 굉장히 흥미진진하며, 진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과 노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특히 낙론을 부흥시킨 김원행과 그 제자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마치 종교인처럼 몸과 마음을 갈고닦는 모습은, 세속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허나 시간이 흐르며 호락논쟁은 초기의 역동성과 건강함을 잃고 논쟁만을 위한 논쟁,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 상대방을 파멸시키기 위한 정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글을 읽어가며 이들이 과연 얼마만큼 실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애초에 호론과 낙론 모두가 사상적 지반으로 삼고 있던 주자학이 가장 강조했던 게 다름 아닌 경전 공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논쟁이 주자를 들어 주자를 비판하는 공리공론으로 흐르는 건 어쩌면 예정된 파국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독자의 반응을 예상한 듯 5장의 한 챕터를 할애해 당시 조선이 이전과는 다른 흐름 속에 놓여 있었고, 호론과 낙론 역시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저자의 문제가 아니라 호락논쟁 자체의 문제이며 동시에 조선이란 국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철학의 왕국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하자마자 떠올랐던 건, 조선은 고도의 관념국가였다는 이영훈의 일갈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철학의 왕국관념국가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나의 조선상은, 6장에 이르러 결국 후자로 기울고 말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아마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이 인식하고 있던 사회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란 말이 풍기는 근대의 냄새가 영 어색하다면, 생활세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당시 조선 유자들에게 사회란 지리적으로는 궁궐 혹은 넓게 잡아 사대문 안이고, 인적으로는 같은 양반에 국한되는 왜소하고 폐쇄적인 공동체였으리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최근 한국에서 가장 핫한(!) 지식인인 김영민은 얼마 전 일본비평에 통념과 달리 조선은 중앙정부와 사회가 모두 약한 국가였다는 문제적인 논문을 개제한 바 있다. 그의 냉정한 분석은 적어도 내겐 꽤 타당하다고 느껴진다. 한성의 중앙정부에서 활동하던 호락논쟁의 당사자들은 궁궐 바깥의 사회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형식화·교조화된 호락논쟁은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와 더불어 철학의 왕국 조선 역시 황혼을 맞이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종필은 2004년 총선에 출마하며 해는 지더라도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말을 남겼다. 노회한 정치인이 자신의 욕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수사에 불과하지만, 조선의 19세기는 이 멋들어진 말이 꽤 어울리는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호락논쟁이라는 해는 저물었지만, 그 붉은 빛이 주변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리학을 다룬 2장이라면, 19세기의 변화를 다룬 7장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중앙 유자들의 논쟁은 활력을 잃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면 오히려 유학이 민간으로 널리 전파되어 집마다 학설을, 사람마다 의견을 내세우는 수준에 도달한다. 19세기란 결국 이와 같은 인민의 유교화가 진행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착실히(?) 이루어진 전 사회의 유교화가 이후 한국의 근대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밝히려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주자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교화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으로 갈린다. 혹자는 인민의 유교화란 사실상 가족 단위의 신분상승에 몰두하는 온 나라 양반되기에 불과했다고 단정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근대는 결국 혈족공동체의 지원을 받은 개인들이 중앙을 향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사회였으며, 그 에토스는 연대 없는 평등주의였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인민의 유교화를 만인이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추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군자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식민지시기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건 다름 아닌 군자들의 행진이었다.

  저자는 19세기 인민의 유교화가 결국 한국의 근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제가 호락논쟁인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저자가 여백으로 남겨놓은 부분을 채워가는 건 독자인 우리들의 몫이다. 물론 저자에게 바라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잔잔한 파장을 몰고 온 와타나베 히로시의 일본정치사상사와 같은 훌륭한 통사를 저자가 써주었으면 한다. 물론 길고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철학의 왕국을 주춧돌로 삼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뼘 한국사 - 한국사 밖의 한국사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엮음 / 푸른역사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소위 스케일이 큰이야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시각에서 흥미로운 고민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척박한 진실보다는 풍요로운 오류이며, 이를 위해선 보다 긴 시대를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앙리 피렌의 중세 유럽의 도시, 요나하 준의 중국화하는 일본, 아미노 요시히코의 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 내가 재밌게 읽은 책들은 하나같이 긴 시대를 아우르는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언제나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영훈 선생에 대한 빠심을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그의 평전을 쓰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 역시 선생의 악마 같은 스토리텔링 능력에 큰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사건에 대한 단단한이야기보다는 긴 시대를 꿰뚫는 허술한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지라, 한뼘 한국사는 솔직히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책의 주제가 낮은 곳에 있는/금기시 된/경계 밖의 존재라는 것 역시 소수자 감수성이 그리 예민하지 않은 나의 자격지심을 건드렸고 말이다. 덕분에 9월 초에 책을 선물 받았음에도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고만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10,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는 의무감에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럴 수가, 한뼘 한국사는 내 선입견을 아득히 뛰어넘는 신선한 책이었다. 필자들은 자그마한 사건의 시답잖은 의미를 밝히는데 집착하지도, 역사 속의 소수자에게 무조건적인 동정을 보내지도 않았다. 이들이 내게 보여준 건, 자칫 흘려 넘기기 쉬운 역사 속의 한 뼘에 얼마나 다층적이고 풍부한 의미가 깃들어 있는가였다.

  필자들이 속한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이하 만인만색)”은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맞서 만들어졌다. 허나 만인만색의 목적은 비단 친일 교과서, 독재미화 교과서에 대한 반대만은 아닌 듯하다. 필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국정교과서를 넘어, 검인정제도로 상징되는 국가의 역사교육 통제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는 국민 만들기의 일환으로 역사교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고, 본디 울퉁불퉁한 이야기였던 역사는 국가의 입맛에 맞게 납작하고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만인만색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국가에 의해 납작해진 역사가 본래 갖고 있었던 울퉁불퉁함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필자들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얼핏 식상하다 생각할 수 있는 한뼘 한국사가 꽤나 절묘한 제목임을 깨닫게 된다. “한뼘이란 교과서의 매끄러운 서술에 채 담기지 못한 채 삐죽 튀어나온 자투리 한 뼘일 수도 있고, 교과서에 한 줄로 표시된 사건에서 어딘가 미심쩍음을 느낀 우리의 생각 한 뼘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들은 교과서가 외면한 한뼘을 펼쳐, 그 작은 자투리가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1925년 예천사건을 다룬 최보민의 글은 백정과 하층노동자 사이의 갈등을 통해 이란 하나의 입장을 공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축하는 다양한 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아가 당시 언론과 사회운동세력이 예천사건을 어떻게 평가하였나를 살펴봄으로써, 사건의 복잡다단함을 잘라내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매끈한 서술을 만들어내는 (좌우를 막론한) 엘리트의 오만함을 넌지시 비판한다.

  권혁은은 베트남전 특수의 군 계급별 경험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김추자의 노래에 등장하는, 월남에서 돌아온 군인이 왜 병장이 아닌 상사이상일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한다. 임광순의 글은 박정희 정권의 공장새마을운동이 노동자를 어떻게 억압했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노동권이 극히 제약된 시대에 노동자들이 역으로 이를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창구로 전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처럼 필자들의 글은 하나의 사건을 다루면서도 풍부한 이야기를 남아내고, 약자의 역사를 복원하되 이를 박제화하지 않는다.

  여러 명의 필자가 쓴 글을 엮은 책답지 않게, 각 글의 편차가 거의 없다는 점도 상당히 놀라웠다. 문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글이 곱고 단정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퍽 즐겁게 읽었고, (내가 그렇게 못 쓴다는 점에서) 부럽기도 했다. 모든 글이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제가 조선을 통치한 기간을 식민지시기로 지칭하는 등, 표기의 통일에 신경 쓴 부분도 좋았다. 단순히 각 필자들이 쓴 글을 합친 모음집이 아니라, 만인만색의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가며 함께 만든 이라는 느낌을 받았달까.

  개인적으로는 고등학생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좌와 우, 제도권과 대안교육을 막론하고 한국의 역사교육이란 곧 매끈한 역사를 배우는(외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적인역사 교육은 약자의 입장에서 다시 쓴 역사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허나 이 역시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만들어내고 여기서 벗어난 생각은 쉬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교육과 큰 차이가 없다.

  나는 학생들이 역사를 울퉁불퉁한 모습 그 자체로 접했으면 좋겠다. 전문가들이 보기 좋게 다듬은 매끈한 역사는 단순한 암기 이상이 되기 어렵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복잡한 역사를 마주하는 건 처음에는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이어가며 자기 나름의 설명을 만들어볼 수도 있고, 기존의 설명이 외면한 소수자의 삶에 주목할 수도 있다. 양 쪽 모두 의미도 모른 채 단순히 사실을 암기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암기식 교육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여하간 한뼘 한국사는 학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의 울퉁불퉁함을 마주하게 해주는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 1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