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김종학 지음 / 일조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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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중 무역 분쟁, 북핵문제, 지구온난화 등으로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는 지구에 느닷없이 한 무리의 불청객이 찾아온다. 거대한 은빛 우주선을 탄 이들의 정체는 바로 은하계 저편 시리우스별의 외계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한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과학기술과 지구의 천연자원을 교환하자는 등, 일견 온화하고 합리적인 제스쳐를 취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흉측한 파충류로, 지구의 모든 물을 뺏고 지구인들을 하림 냉동 치킨너겟으로 만들어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너무나 빤해서 외려 놀라울 정도의 시나리오인 만큼, 앞으로의 전개 역시 쉬이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 짠하고 나타나줘야 한다. 하지만 감독이 헤까닥한건지 아님 제작사의 외압이 있었던건지는 몰라도, 갑자기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고 치자. 주인공은 지구가 진정으로 독립적이려면 외계인의 과학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 외계인과 손잡고 지구의 권력을 장악하기로 맘먹는다. 지구인의 독립을 위해 외계인과 손잡는다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발상인가!

리얼급의 망작이 아닌 이상, 이렇게 막나가는 시나리오를 가져다쓰는 영화는 단언컨대 없다. ‘외세를 이용한 독립이라는 이 아이러니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쪽은, 놀랍게도 영화계가 아니라 학계다. 그 누구보다 엄밀하고 논리적이어야 마땅할 학자들이 그랬다고?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외교사 연구자인 김종학은 적어도 19세기 말 조선에서 벌어진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저런 형용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 사건, 다들 눈치 챘겠지만 바로 갑신정변이다. 그의 책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는 갑신정변을 둘러싼 아이러니를 철저히 파헤친다.

 

김종학은 갑신정변의 주역이 박지원과 그의 손자 박규수로 이어지는 북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교과서적 설명부터 와장창 깨트린다. 1881년을 전후해 일본 언론과 외무당국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화당이라 불린 이 불온한 무리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의역중인(醫譯中人)과 비주류 양반이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에 머물러있었던 이들 개화당이 원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이나 근대화(서구화)’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외세의 힘을 빌려 조선의 썩어빠진 신분제를 완전히 갈아엎는 것이었다.

갑신정변이 불온한 아웃사이더들의 은밀한 혁명모의로 재구성됨에 따라,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역시 마치 잘 쓰인 추리소설과도 같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43회 월봉저작상을 받은 전문연구서란 사실조차 잠시 잊게 할 정도로, 책이 갖는 흡인력은 굉장하다. 특히 1장과 2장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짜릿함과 긴장감을 선사하는데, 두 장의 주인공인 역관 오경석과 승려 이동인이 꾸미는 음모의 스케일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장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 서기관 윌리엄 F. 메이어스의 회고는 그 자체로 독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어스의 회고에 등장하는 조선인 역관은 무려 영국이 군함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해주기를 여러 번 간청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문제의 역관이 바로 오경석이라는 사실이다. 오경석이 누구인가, 박규수, 유대치와 더불어 개화파를 길러낸 인큐베이터라고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달달 외웠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오경석이 왜 메이어스에게 조선을 침략해달라는 매국적인부탁을 했을까?

오경석에게 조선이란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에 갇혀 산 채로 익어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알지 못하는 가련한 개구리였다. 지배계급인 양반은 밖으로는 나라의 빗장을 닫아걸고, 안으로는 공고한 카스트를 구축함으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여기에 신분의 한계로 자신 같은 인재가 평생토록 통역에나 종사해야 한다는 개인적 울분까지 겹쳐, 오경석은 조선을 뒤엎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치 않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설령 그 일이 영국이란 외세의 침략이라 할지라도.

2장의 주인공인 승려 이동인 역시 조선에 대한 불만이라면 오경석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일본 밀파라는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건 순전히 비천한 승려인 자신을 허물없이 대해준 김옥균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동인이 양반 이너서클로부터 받아온 멸시와 차별이 컸다는 방증이리라.

요컨대, 개화당의 초창기 멤버들은 빼어난 능력과 탁 트인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음에도 양반네가 구축한 공고한 카르텔에 가로막혀 산 채로 썩어가던 비운의 아웃사이더였다. 따라서 이들 개화당은 박규수와 같은 온건개화파와 결코 함께 묶일 수 없다. 똑같이 조선의 문호개방을 외쳤다한들 전자의 목표가 혁명에 준하는 철저한 개혁이었던 반면, 후자의 그것은 보수적인 개량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최근 저스툰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 박규수와 오경석은 꽤 죽이 잘 맞는 콤비로 등장하는데, 사실 오경석은 마음속으로 박규수를 그 누구보다 미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1장과 2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개화당의 재해석은 굉장히 파격적일뿐 아니라, 상당한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화당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가면 갈수록, 현실정치에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저자의 파격은 힘을 잃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오경석과 이동인이 리타이어하고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경석은 1877년에 사망하고, 이동인은 1881년 일본에서 실종된다. 그리고 이들 중인 아웃사이더 1세대를 이어갈 2세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중인계급은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형성하고 또 요샛말로 하면 서로 자제들의 과외교습을 해주면서 기술직을 독점적으로 세습했다. 따라서 이들은 양반을 능가하는 강력한 동류의식이 있었을 터이지만, 이 책 어디에도 중인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였다는 언급은 없다. 중인계급이 정말 개화당의 중심이었다면, 프랑스의 제3신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황국협회를 결성해 만민공동회를 때려 부순 보부상만큼의 집단적 활약상은 보여줬어야 했다.

열심히 불씨를 피워놓고 정작 중요한 때 사라져버린 중인의 빈자리를 메우는 건 비주류 양반들이다. 그나마도 이들은 아웃사이더 정서를 공유하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김옥균이나 박영효 같은 몇몇 인물, 아니 사실상 김옥균 한 명의 얼굴을 빌려 등장할 뿐이다. 그래, 김옥균은 확실히 평등사상의 소유자였다고 치자. 하지만 당장 갑신정변의 또 다른 주역인 박영효조차 끝내 철종의 부마라는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했다고 저자 본인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갑신정변이 몇몇 양반네들의 쿠데타였고 그나마도 서로 간에 일치된 의견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를 정말 사민평등을 향한 혁명모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자는 갑신정변으로부터 자주독립근대화란 선입견을 벗겨내는데 성공했지만, ‘사민평등이란 새로운 정의를 덧씌우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갑신정변은 그저 양반 엘리트 사이의 권력쟁탈전, 노골적으로 말하면 밥그릇 싸움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가 갖는 한계는 이뿐만이 아니다. 앞서 파충류 외계인의 비유를 들어 갑신정변에 대한 기존 이해를 비판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이 비유는 저자 본인이 쓴 서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여기서 저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첫째, 지구는 하나가 아니다. 지구는 200개가 넘는 나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연히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존재한다. 둘째, 독립은 언제나 무엇으로부터의독립이다. independence 뒤에는 꼭 from이 붙는다.

, 이제 두 사실을 합쳐보자. 지구 어딘가에 있는 작은 나라는 강대한 이웃나라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진 외계인들이 지구에 들이닥친다면, 작은 나라가 이들의 힘을 빌려 이웃나라의 입김에서 벗어나려 하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요컨대, 정말 독야청청 개썅마이웨이가 아닌 이상 외세를 이용한 독립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화당이 추구한 독립역시 청으로부터의 독립이었기에,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리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아가, 과연 저자의 말마따나 독립이라는 대외적 목표와 신분제 타파라는 국내적 목표가 철저히 구분되는지도 의문스럽다. 이 점에서 20185월에 열린 제20회 아산서평모임에서 경제사학자 이영훈이 이 책에 덧붙인 코멘트는 굉장히 시사적이다.

 

정치외교사나 국사학계의 통념에서 나오는 언술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 체계가 외세 체계를 내면화해 구조화한 체계이다. 즉 외세와 내세를 구분해 말하기 힘들다.”

 

중화질서는 세계를 천자와 제후, 오랑캐로 나누었고, 가장 모범적인 제후국인 조선은 이를 군주와 신하, 상민, 그리고 노비라는 신분질서로 일국 단위에서 똑같이 재현했다. 조선의 신분제와 중화질서 사이의 연속성은 조선이 대중국외교와 자국의 제도, 과거, 학교업무를 예조(禮曹)라는 하나의 부서에서 관장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조선의 신분제 철폐는 곧 중국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인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신하되기를 거부한다면 자국의 군신관계 역시 새롭게 재편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듯이 외교와 내치는 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계의 김옥균이 되려고 하느냐!”

 

이 책의 모태가 된 박사논문을 준비할 당시 저자가 주변 연구자들로부터 숱하게 들었다던 이야기다. 확실히 갑신정변에 대한 그간의 통념을 가차 없이 무너뜨리는 저자의 모습은 김옥균에 비견될 정도로 신선하고 파격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고작 왕을 사로잡음으로써 조선을 뒤엎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김옥균만큼이나 저자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의 가치는 주제의 파격성이나 설득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의 진가 역시 줄기가 아닌 곁가지에서 드러난다.

다소 나이브하고 덤벙대는 김옥균과 달리, 김종학은 치밀한 사료분석을 바탕으로 책 곳곳에 생각해봄직한 질문들을 숨겨놓았다. 고작 임오군란 한 번으로 소진될 만큼 빈약한 조선의 재정, 무려 고종에게 반성문을 강요할 정도로 막강했던 양반계급의 위세, 일체의 중간단체가 부재한 가운데 정치적 권위를 담보해줄 유일한 상징으로서의 국왕, 도덕률마저 초월한 리바이어던의 화신 흥선대원군 등, 각각의 질문들이 논문 한 편 급의 깊이와 밀도를 자랑한다.

나는 종종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세대별로 극명히 갈린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젊은 세대에게 김옥균은 빼도 박도 못할 친일파, 갑신정변 역시 경솔하게 외세를 끌어들인 치기어린 쿠데타에 불과했다. 반면 나이든 세대는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뿐 김옥균에겐 연민을, 갑신정변엔 아쉬움을 느끼는 듯했다. 이러한 세대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민족주의 교육의 세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선진국 국민이라는 지위가 젊은 세대에게서 어떠한 감각을 앗아간 건 아닐까?

젊은 세대는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곳곳에 저자가 배치한 질문들을 따라가며 이 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허구한 날 서양열강에 쥐어터지며 밥 먹듯이 배상금을 뱉어내고도 끝내 망하지 않았던 청과 달리, 왜 조선은 구식 군대의 반란 하나 진압하고는 폭삭 주저앉아 버렸을까? 김옥균이 조선을 뒤엎기 위해 채택한 방법이 겨우 왕을 사로잡는 것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김옥균을 대하는 나이든 세대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한 뒤에야, 우리는 갑신정변이 과연 사민평등의 혁명인지 아니면 양반네의 밥그릇 싸움인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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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페미니즘 My Little Library 8
박준우 지음 / 한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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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2016730,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을 반대하며 들고 일어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은 총장의 요청으로 투입된 1600명의 경찰과 팽팽히 대치중이었다. 머지않아 진압될 게 불 보듯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 학생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다름 아닌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이날의 시위를 계기로 <다시 만난 세계>는 여성들의 연대와 우애를 상징하는 노래로 거듭났다. 뿐만 아니라 2016년 촛불항쟁과 2017년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에서도 울려 퍼지는 등, ‘21세기 민중가요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노래는 힘이 세다. 시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는 사람들을 울고, 웃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특히 약자와 소수자의 감수성이 노래에 실렸을 때, 그 파괴력은 종종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기도 한다. <다시 만난 세계> 역시 진취적이고 동지의식 충만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냈기에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론 한국에서 이는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례다. 소수자, 그 중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시도는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하지만 팝음악도, 페미니즘도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긴 역사를 갖는 미국에서라면 어떨까? 오랜 세월만큼이나 지난하고 힘겨웠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감동적인 팝음악과 페미니즘의 연대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박준우의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저자는 조곤조곤 담담하게, 하지만 필요할 때는 확실히 감정을 실어가며 페미니즘이 팝음악을 통해 미국에서 목소리를 키워간 역사를 이야기한다.

 

명실상부 자유와 민권운동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재즈는 1920년대를 풍미했지만, 이 시기 여성 연주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여성 음악인은 꾸준히 등장했는데, ‘페미니스트 임프로바이징 그룹(Feminist Improvising Group, FIG)’이 대표적이다.

팝 음악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1950년대를 지나 비틀즈가 전 세계를 뒤흔든 1960년대에 이르면 레슬리 고어와 퀸시 존스, 나나 시몬 등이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는 자신의 주체성을 노래하며 작품성과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그리고 1980년대, 마돈나와 신디 로퍼의 등장으로 마침내 팝 페미니즘은 미국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로 떠오른다.

두 영웅 이후의 역사는 인물도, 사건도, 지향점도 너무나 각양각색이지만, 노래하는 페미니즘은 이 다양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최대한 오롯하게 담아낸다. 물론 누군가는 책이 페미니즘의 정의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잡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저자는 비단 여성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프랭크 오션처럼 흑인/남성/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음악인도 팝 페미니즘의 계보에 포함시킨다. 뿐만 아니라 비욘세처럼 기껏해야 남성과의 관계에서 조금 더 적극적인 여성을 노래한 음악인 역시 한 꼭지로 중요하게 다룬다.

 

자칫 나이브함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이러한 서술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시사점을 갖는다. 첫째, 페미니즘이야말로 휴머니즘이다. 이는 페미니즘 말고 휴머니즘을 외치는 멍청이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휴머니즘 없는 페미니즘에 열광하는 일부 레디컬 페미니스트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최근 게이를 똥꼬충으로, 난민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매도하며 적과 동지를 선명히 나누려는 움직임이 인터넷 공간에서 적잖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없을지언정, 페미니즘은 성소수자나 유색인종과 같은 소수자와 연대해야만 한다. 다양한 차별과 억압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페미니즘은 오히려 더욱 풍요로워지고, 가부장제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 오션과 같은 음악인은 팝 페미니즘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몇몇 불철저함과 실수, 경솔한 행동을 근거로 페미니즘의 모순자기기만을 보란 듯이 떠들어대는 작자들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도 사람인데 누군들 실수가 없고, 숨겨둔 욕망이 없겠는가? 유독 페미니즘에 대해서만 강박적으로 무오류성을 요구하는 건 너무나도 치사하고 쫀쫀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이 페미니즘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를 깐깐하게 따지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수많은 주의주장을 끌어안되, 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일이다. 실제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던 비욘세는 이후 성녀/창녀/팝스타/아내/어머니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고 가면서도 흑인 페미니스트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이 모든 정체성은 모순 없이 자연스럽게 비욘세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팝 페미니즘의 풍요로운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과 달리, 케이팝은 이제 막 페미니즘을 만난 상태다. 아니, 오히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봤을 때 케이팝은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에이 출신의 수지는 피팅모델 양예원이 당한 불법 누드촬영을 고발하는 국민청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레드벨벳의 아이린 역시 페미니즘 소설인 82년생 김지영을 지나가듯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의 강렬한 분노를 샀다. 가장 최근의 버닝썬 게이트는 남성 아이돌의 저열하고 징그러운 성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지만,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물러있다.

이처럼 케이팝 페미니즘이 처한 상황은 결코 밝지 않지만, 긍정적인 변화 역시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걸그룹 레드벨벳과 블랙핑크는 청순하고 가련한 여동생이 아니라 쿨하고 멋진 언니이미지를 내세움으로써 여덕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게이와 이민자 자녀, 유색인종을 비롯한 소수자의 감성을 자극했기에 세계적인 팝스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말이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울 때라는 말이 있듯, ‘케이팝 페미니즘역시 화려한 비상을 위한 마지막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저자가 케이팝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이런 근사한 책을 써내는 그날까지, 한국어로 노래하는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음악인은 세상의 편견과 억압을 다음과 같이 되돌려주자!

 

이렇게 부르면 기분이 조크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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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번안의 시대 - L-049 연세근대한국학총서 59
박진영 지음 / 소명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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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줄 거야

메마른 가슴 속을 적셔줄 멜로디

슬픔의 기억들에 기쁨을 채워줄 거야

넘치는 음악 속에 리듬을~”

 

지난 515, 이화여대 캠퍼스에 울려 퍼진 노래는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의 오프닝 <나의 마음을 담아>였다. 이날 대동제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바로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명 주제가를 부른 성우 이용신! 그가 세월의 흐름을 보란 듯이 비켜간 청아한 목소리로 <나의 마음을 담아>를 부르자, 어린 시절 달빛천사를 보고자란 수많은 90년대생들은 그야말로 광광 울고야 말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용신이 이화여대 대동제에서 부른 세 곡 중 무려 두 곡이 한국 자체 제작 주제가였다는 사실이다. 달빛천사의 한국판 오프닝인 <나의 마음을 담아>와 일본판 오프닝인 <IU>는 완전히 다른 노래고, 이러한 차이는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니깐 똑같이 달빛천사를 보며 어릴 시절을 보냈다 해도,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추억하는 애니의 분위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긴, 애초에 이 애니가 한국에서는 달빛천사, 일본에서는 満月をさがして(만월을 찾아서)로 불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설령 한국에서 주제가를 자체 제작하지 않고 일본 것을 번안했다고 한들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디지몬 어드벤처의 주제곡 <Butter-Fly>를 살펴보자. 일본판 주제곡이 나는 연약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러 가리라는 희망찬 가사인 반면, 한국판은 결코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날아오르리라는 비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국의 <Butter-Fly>는 일본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른 노래인 것이다.

혹자는 한국의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을 열등아류로 폄하하곤 한다. 일본판에 자막 달면 될 걸 괜히 어색한 한국어로 작품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이 그렇게 열등하다면, 이용신의 무대에 이대생들이 열광적인 떼창으로 응답했던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어 더빙 달빛천사가 외려 일본어 자막을 달고 역수출된 현상은? 심지어 원래 애니메이션 쾌걸 근육맨 2의 자체 제작 오프닝이었던 <질풍가도>는 이제 야구팀 응원곡으로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은 원본의 열등한 아류가 아니다. 오히려 90년대생들의 어린 시절을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줬을 뿐 아니라, 애니 오프닝이라는 태생을 극복하고 다방면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요컨대, 자체 제작 주제가와 번안곡이라는 형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번역함으로써 한국문화는 더욱 풍요로워진 것이다.

어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소한(?) 장르도 이럴진대, 번역이 갖는 잠재력과 창조적인 힘을 좀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딱 알맞은 책이 있으니, 바로 박진영의 번역과 번안의 시대. 37회 월봉저작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번역번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해간다.

번역과 번안의 시대본적지는 도서관 십진분류법 상으로 800번대, 그러니깐 문학 관련 서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국문학 연구서와는 결을 달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무려 화학과(!)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과 베이스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는 몇몇 국문학 연구자들과 달리 저자의 문장은 간결하고, 논리는 탄탄하다. 본디 300번대 서가에 꽂혔어야 했는데 잘못해서 800번대 라벨이 붙은 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견고한 책이다. 역시 가장 대단한 존재는 글 잘 쓰는 이과(출신)’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 가장 하찮은 존재는... 굳이 밝히지 않도록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그간 한국 문학사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1910년대 번역과 번안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본래 한국 문학사에서 1910년대란 이인직과 이해조의 신소설로 대표되는 1900년대와 최초의 근대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이 등장한 1917년 사이에 놓인 일종의 무풍지대였다. 일제의 압도적 폭력에 신음하던 암울한 시기, 문학다운 문학이 등장하지 못했던 미숙한 시기라는 선입견이 1910년대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1910년대야말로 한반도에서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방식이 모습을 드러낸 태동기라고 주장하며, 이를 가능케 했던 수단으로 번역과 번안을 지목한다. 사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곤 하지만, 서구 역사에서도 근대소설이 등장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하물며 한문/언문의 이중언어 체계에 놓여 있던 한반도에서는 근대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세련된 자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노베이스인 상황에서 근대소설의 맛이나마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근대소설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다른 언어권의 작품들을 자국어로 최대한 그럴싸하게 소화해내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역사가 곧 번역과 번안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저자는 크게 번역/번안의 태도와 방법’, ‘출판/언론매체의 기능’, ‘소설 언어의 반응을 좌표축 삼아 1910년대 한국 근대소설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 1910년대에 이르면 소설은 인민을 계몽하고 교훈을 제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순전히 읽는 재미를 위한 것이며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갔다. 1900년대를 풍미한 기능주의에 맞서 문예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번역할 때도 과감한 축약이나 생략보다는 원문을 오롯이 담아냄으로써 읽는 재미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안정적인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근대소설이라는 긴 이야기를 안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제공했다.

비단 소설을 대하는 태도만 달라진 게 아니다. 근대소설의 감수성을 제대로 살려낼 수 있게끔 언어 역시 새롭게 창조되었다. 주된 종결어미가 ‘~에서 ‘~로 옮겨갔고, 따옴표와 문단 구분 등을 통해 작가의 서술과 등장인물의 대사가 구분되었다.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순 한글의 한국어 문장은 결국 일본소설을 번역하고 번안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위와 같은 혁신에 힘입어, 1912년 조중환이 일본의 가정소설 호토토기스불여귀로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번역소설과 번안소설은 신소설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주류로 등극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빛나는 성취로 평가받는 이광수의 무정역시 번안소설이라는 풍요로운 토양이 없었다면 결코 꽃봉오리를 틔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번역과 번안을 통해 한국어는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방식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갔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가능성이 생겨나기도 했다. ‘식민지라는 한반도의 현실이 제국일본의 소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령 1910년대 조선인 작가들이 일본의 가테이쇼세츠(家庭小說)’를 어떻게 번안했는지 살펴보자. ‘가테이쇼세츠는 덴노(天皇)를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조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는 결코 전면에 등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 작가들은 가테이쇼세츠가정소설로 번안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국가는 물론이고 국가와 연결된 봉건적 가족제도마저 철저히 지워버렸다. 국가와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한 건, 오직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부부관계였다.

이상협의 번안소설 해왕성역시 흥미로운 사례다. 해왕성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일본어 번안소설인 암굴왕을 다시 번안한, 말하자면 재번안소설이다. 하지만 해왕성은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을 전환함으로써 원류는 물론 경유지와도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상협은 소설의 무대를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파리에서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으로, 역사적 배경을 나폴레옹이 재기를 노리다 100일 만에 몰락한 1815년에서 쑨원이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한 1894년으로 바꾸었다. 본래 제국의 낭만적 상상력에 뿌리를 둔 몽테크리스토 백작, 식민지 지식인 이상협의 손을 거쳐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통쾌한 일침을 날리는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다.

 

일본어 중역은 오랜 세월 한국 학술·문화계의 부끄러운 꼬리표였다. 많은 지식인들은 한국이 주체적으로서구의 학문과 문화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일본어 번역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했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콤플렉스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도 일본식 어투 혹은 일본식 한자어를 몰아내고 순우리말로 돌아가야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한다.

하지만 일본어로부터 벗어난 한국어에 과연 돌아갈곳이 있을까? ‘일본어 잔재를 싹싹 긁어냈을 때, 우리에게 남은 순우리말은 얼마나 될까? 눈에 불을 켜고 일본어 잔재를 솎아내거나 일본어 중역이란 태생적 한계에 좌절하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나름의 가능성을 찾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박진영에게 한국의 번역사가 곧 일본어 중역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분노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국어 텍스트는 번역이라는 매개변수를 통해서만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일본도 각각 라틴어와 한문을 번역함으로써 자국어를 창조했으니, 한국어가 일본어를 번역함으로써 비로소 제 모습을 갖췄다는 건 그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박진영에게 보다 중요한 건 한국의 근대문학사 연구에서 번역이 과연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가, 번역이 독자적인 상상력을 짜낼 수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 책에서 매개변수가 아닌 독립변수로서 번역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새롭게 조망하려는 담대한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의도치 않게 일본의 가테이쇼세츠보다 진보성을 띄게 된 조선의 가정소설, 그리고 아예 반제국주의 유니버스를 새로 창조해낸 이상협의 해왕성은 그가 발굴한 빛나는 결과물이다.

<나의 마음을 담아>의 가치 역시 달빛천사의 분위기를 제대로살려냈다는데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화여대 대동제에서의 열광적인 떼창은 이 노래가 이미 한국문화 속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왕성, 그리고 <나의 마음을 담아>와 같이 원판에 휘둘리지 않고 보란 듯이 활개치는 맹랑한 아류야말로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다채롭게 가꾸어왔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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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 서강학술총서 108
박효근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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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된장

 

고등학생 시절까지 미디어에서 마주한 여성의 이미지는 저 두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간혹 어머니가 추가되긴 했다.)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성은 처럼 단아하고 아름답거나, 고작해야 된장인 주제에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존재로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여성을 사람 아닌 무언가로 대했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었다. 나 역시 미디어가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는데도 말이다.

여성은 꽃이다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건 대학을 들어오고 나서였다. 바로 전 해 메갈리아의 등장과 함께 그간 억눌려온 여성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메갈의 미러링을 접하고서야 지금껏 별 뜻 없이 던졌던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실은 얼마나 성차별적이었는가를 깨달았다. 한밤중의 산책처럼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들이 내 여성 친구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존재만으로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남성이 나 뿐만은 아니었나보다. 메갈 이후, 그간의 삶을 반성하며 페미니즘에 지지와 연대를 표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 남성 페미니스트를 보며 이상하리만치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다. SNS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네임드 남페미들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아래의 문장으로 끝을 맺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아, 여성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X잡고 반성하자!”

 

네임드 남페미들은 여전히 여성을 남성인 나와 다른 무엇으로 대상화하고 있었다. ‘된장이라는 꼭짓점을 갖는 납작한 선분 위에 피해자라는 점을 찍어 삼각형을 만들었지만, 이 조그만 삼각형 역시 여성을 가두는 족쇄는 아닌가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시기 남페미들의 또 다른 강령이해가 안 되면 외우자!”였는데, 내 여성 친구는 이 말을 듣고는 그냥 이해가 안 된다는 거네라며 픽 웃었다. 삼각형을 통해서만 여성을 보려니 이해가 될 턱이 없었다. 결국 메갈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그 많던 남페미들은 대부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아무리 선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여성은 정형화된 이미지 이상이기 어려웠고, 이는 여성의 삶을 굉장히 재미없고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역사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막말로 비교적 최근까지의 여성사특정 사건으로 여성의 처우가 좋아졌냐, 나빠졌냐를 따지는데 머물러있었기 때문이다.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는 이러한 이분법을 과감히 무너뜨린다. 그는 남성 종교개혁가들이 부과한 규율에 완강히 저항하고, 이를 교묘히 이용했으며, 심지어는 창조적으로 전유해간 여성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톺아본다. 나름의 방식으로 종교개혁과 통()한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되살아남으로써, 해방의 기회이자 통제의 순간이었던 종교개혁의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성격 역시 더욱 생생하고 온전하게 드러난다.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저항전유’, 그리고 이용이라는 방식으로 종교개혁을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물론 각 파트의 주인공들이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택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평을 편하게 쓰려는 나의 인위적인 구분에 불과할 따름...)

먼저 시대에 저항했던 16세기 주네브의 두 여성을 만나보자. 열성적인 종교개혁가였던 마리 당티에르는 성서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려 히브리어까지 익혔던 당대의 엘리트였다. 그는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자신이 쓴 글을 읽고 판단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여성이란 모름지기 정숙한 아내로서 남편을 섬길 따름이라고 여겼던 남성 종교개혁가들은 당티에르를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로 취급할 뿐이었다. 이들에게 당티에르는 비난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당티에르는 암담한 현실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네브의 선술집과 여관,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작지만 의미 있는 반향을 만들어냈다. 당티에르는 여성 역시 신으로부터 재능과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예수께선 세상의 주류를 자임해온 현자, 박사, 성직자, 권력자들보다 약하고 경멸당했던 이들을 택하시어 대단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셨다고 주장했다. 약한 자들이 다름 아닌 여성이란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당티에르는 남성 중심 지배질서의 타파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일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여성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남성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렇게도 열심히 여성에 대해서만 비판하는가? 생각해보면 여성은 예수를 팔아넘기지도, 배반하지도 않았다.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유다라는 남성 아닌가? 수없이 많은 의례와 이단, 잘못된 교리를 만들고 조작하여 퍼트리는 사람들은 사실 모두 남성들이다. 불쌍한 여성들은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 고생하고 있다. ... 이런 상황을 볼 때 나는 당연히 침묵을 지키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처럼 당티에르는 주네브 종교개혁가들의 남성연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우리의 두 번째 주인공, 성 클라라 수녀원의 잔 드 뒤시 수녀에게 당티에르는 전혀 저항의 아이콘따위가 아니었다. 수녀는 연대기15357월 갑작스레 봉쇄수녀원에 들이닥쳐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배배꼬인 여자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는데, 배배꼬인 여자가 다름 아닌 당티에르였던 것이다. 이 기막힌 운명의 장난이라니!

잔 드 뒤시 수녀에게 당티에르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자)들은 어디까지나 저항의 대상에 불과했다. 중세의 수녀원은 남성 중심 지배질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으나, 여성이 가정에서 벗어나 사회적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잔 드 뒤시 수녀 역시 수녀원의 기록 담당 서기수녀로 임명되고 주네브의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등, 평범한 결혼을 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새로운 기회에 나름대로 만족했던 듯하다. 그랬기에 수녀는 자신이 평생 간직해온 신념을 위선이라 폄하하고, 회유가 먹히지 않을 경우 상스러운 폭력도 서슴지 않는 종교개혁 진영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부의 키워드가 저항이라면, 2부는 전유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저자는 16세기 주네브의 이혼소송기록을 통해 그 시대 여성들이 이혼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살펴본다. 본래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이혼을 허용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부정한 배우자라는 불순물을 제거해 가정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네브 여성들은 결코 종교개혁가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들은 이혼을 재혼할 수 있는 자유로 받아들여 이혼 뒤 곧바로 약혼 승인을 요청하거나, 자신과 아이를 보호해줄 가정이라는 외피를 빼앗기지 않고자 끝까지 투쟁하기도 했다. 주네브 여성들은 나약하고 수동적인 피해자라기보다는 약삭빠르고 적극적인 행위자였던 것이다.

보다 흥미로운 사례는 저명한 위그노 사상가인 필리프 뒤플레시스 모르네의 아내였던 샤를로트 아르발레스트다. 그는 남편이 옛 친구인 앙리 4세 앞에서 가톨릭과 벌인 신학논쟁이 실은 위그노를 찍어 누르려는 잘 짜인 각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아르벨레스트는 퐁텐블로에 가있는 남편을 대신해 파리에서 논쟁의 부당함에 대한 글을 인쇄·유포했으며, 이 과정에서 위그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민주화운동가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과 마찬가지로 아르발레스트 역시 모르네의 바깥양반이었던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종교개혁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가정이란 온화한 가부장이 현숙하고 순종적인 아내를 이끄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비록 그 수장이 국왕일지언정) 가톨릭의 맏딸을 자임하던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된다는 것은 목숨까지 걸어야 할 정도로 극단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위그노 여성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연대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정을 일종의 전위부대로 재조직했다. 특히 아르발레스트는 모르네와 전통적인 아내-남편 관계를 넘어, 학문적 도반이자 정치적 동지로서의 관계로까지 나아갔다.

 

1부 그리고 2부와 달리, 3부에서 저자는 오직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한국에선 영화 <여왕 마고>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그는, 어떤 시대에도 인정받지 못한 타자의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16세기는 발루아와 부르봉이라는 왕조, 17세기는 귀족이라는 신분, 18세기는 여성이라는 성별, 19세기는 16세기라는 시대를 깎아내리려는 상징으로서 마르그리트 발루아라는 이름을 줄기차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정작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그 시대 기준으로 지극히 평범했던 귀족 여성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에 저자는 시대의 욕망, 그리고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본인의 욕망까지 걷어내고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세심하게 추적해간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평생 여러 개의 가면을 상황에 맞게 쓰고 벗던 복잡하고 미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결혼 전에는 순결한 처녀였고, 결혼 뒤에는 충실한 아내였다며 당대의 남성 중심 지배질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부각시키고자 했던 건 무엇보다도 뛰어난 교섭자로서의 역량이었다.

 

“ ... 나는 과거에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나의 능력과 역량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내가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상당한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이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직감했다.”

 

실제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 가장 아꼈던 가면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가이자 강대국 프랑스를 지배하는 발루아 가문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었다. 그는 이 가면에 걸맞은 정치적 역할을 맡기를 갈망했으며, 이를 위해 보다 볼품없는가면을 이용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최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쓰이거나 그려진 소설과 만화를 읽다보면 고구마를 100개쯤 먹은 듯 답답함이 차오르곤 한다. 적지 않은 작품들이 쓸데없는 TMI와 자기연민, 불행배틀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줄기차게 외쳐대던 남성들아, 여성들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의 거울상이기도 하다. 시스젠더 남성이기에 꺼낼 수 있는 배부른 소리란 걸 알지만, 문학의 역할은 단순히 불행을 전시하는데서 끝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과 억압을 드러내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그러내주기를 문학에게 바라는 건, 너무 지나친 요구일까.

박효근의 여성, 종교개혁과 통하다는 역사서이자 학술서이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이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16세기 주네브의 두 여성을 통해 우리는 억압의 다층성과 이에 맞서는 다양한 저항의 전략을 본다. 주네브의 이혼소송과 프랑스의 위그노 여성으로부터는 가부장적 질서의 창조적인 전유, 왕비라 불리지만 단 한 번도 왕비인 적 없었던 귀족 여성에게는 기민하고 영리하게 편견을 이용하는 모습을 본다.

그것이 21세기의 눈으로 볼 때 어떠한 한계를 갖든, 격동의 종교개혁기를 살아간 여성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또 풍요롭다. 메갈 이후 잠깐 타오르다 금세 사그라진 수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에게 필요했던 건, 결국 여성이라는 다채로운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아니었을까. 여성은 된장’, 그리고 피해자라는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쬐깐한 삼각형 따위에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두꺼운 책이라는 사실을, 한때의 남페미들이 부디 깨우치길 바란다. 물론 나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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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전
곽재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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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라 이후를 중국의 근세로 여기는 독특한 사관을 제시한 근대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나이토 고난은 1921년 어느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대체로 오늘날의 일본을 알기 위해 일본 역사를 공부할 때,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1467)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남의 나라 역사와 같은 정도로만 느껴지지만, 오닌의 난 이후는 참으로 우리들의 몸과 직접 닿아 있는 역사입니다. 이를 정말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以文會友(https://blog.naver.com/zentaur/220968438393)

 

과거는 낯선 나라다. 동아시아에서 소위 전통이라 불리는 풍습과 문화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봤자 18세기 이후에야 등장한다. 사실 이 전통이 과연 현대 한국인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물며 그보다 앞선 시대임에랴!

냉정히 말해 1500여 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지금의 우리와는 개미 눈곱만큼의 관련도 없다. 아직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만약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다면...’하는 망상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지만, 이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옛날의 일이다. 온갖 억지와 비약을 무릅쓰고 고구려가 1000년을 더 이어갔다고 가정한들, 그냥 대동강-원산만 이남으로 축소된 한반도 위에 일본 같은 나라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짧게 잡으면 20세기, 아무리 길게 잡아도 18세기 이전의 역사는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생각하는 게 편할 정도로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근세 이전의 역사가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역사를 잘못 공부해온 것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흔히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는 역사가 거울일 수 있다면, 그건 현재가 얼마나 우연적이고 특수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나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가장 진보한 시대도 아니요, ‘보편도 아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 그럴 수 있다. 오늘날을 상대화할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이다.

특히 지금과는 데면데면한 시대의 역사일수록 거울로서의 쓸모가 커진다.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특수성을 더욱 쉽게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일수록 느끼고 배우는 게 많은 것과 비슷한 이치다. 만일 이러한 역사의 즐거움을 아직껏 느껴보지 못했다면, 지금 당장 곽재식의 역사소설 역적전을 펼쳐보시라. 광개토왕이 무위를 떨치던 시기의 다라국(多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서북부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내가 지금껏 마주한 거울 중 가장 아름답게 반짝인다.

 

역적전은 구체적인 줄거리보다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의미를 갖는 소설이다. 듀나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전 한국 정통 사극이라는 장르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려고 했었어요. 그리고 그 문제점이 어떻게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제점과 연결되는지도 설명하려 했지요. 하지만 공부가 짧았고 시간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관심이 충분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곽재식은 이 주제에 대해 저보다 더 깊이 생각했고, 그 결과물을 이 책에 반영했습니다.”

 

듀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듀나가 이야기한 한국 정통 사극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는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용의 눈물태조 왕건에서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소위 정통 사극이라 불릴만한 작품들은 언제나 남성영웅의 이야기였다. 수염 기른 마초 몇 명이 폼 잡고 멋들어진 대사 하나 읊어주거나 뜨거운 눈물 좀 흘려주면 모든 일이 뚝딱 해결되곤 했다. 세상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닐 터이거늘, 남성영웅의 희로애락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인다. 특히 삼국시대 전쟁물의 서사는 라노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인 이고깽(이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통 사극의 대안으로 등장한 퓨전 사극은 남성영웅에 맞췄던 초점을 (어디까지나 비교적)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렸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그냥 용인 민속촌을 방문한 2019년 대한민국의 20대 커플 같다. 가끔 방송사고로 18세기가 배경인 사극에 21세기 장비가 등장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퓨전 사극의 경우엔 그냥 대놓고 21세기 장비를 써버리는 쪽이 훨씬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퓨전 사극의 남녀 주인공은 지극히 21세기적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사랑한다.

 

곽재식은 정통 사극처럼 역사를 남성영웅 깽판물’(남영깽?)로 만들어버리지도, ‘퓨전 사극처럼 21세기 사람을 그려놓고 5세기 사람이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역적전의 시대적 배경은 광개토왕이 한반도와 남만주를 주름잡던 4세기 말~5세기 초지만, ‘인물로서의 광개토왕은 그리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사건의 전개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태풍과도 같은 자연재해에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역적전의 광개토왕은 마치 모노노케 히메의 시시가미(사슴신)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치로 물러난 남성영웅의 빈자리를 채우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사가노와 출랑랑은 각각 백제 머슴 출신의 요리사와 가야 귀족 출신의 칼잡이다. 역적질을 일삼았다는 명목으로 끌려온 사가노와 출랑랑을 심문하는 하한기는 가락국 태생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다라국으로 도망 와 판관으로 일하는 인물이다.

이밖에도 정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누군가의 사소한 행동이 다른 누군가의 희비를 가르고, 인생을 뒤바꾼다. 아무리 광개토왕 같은 자연재해급 인물이 역사의 큰 방향을 결정한들, 그 디테일을 만들어가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역적전의 등장인물들은 정말이지 5세기 사람들 같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곽재식이 21세기에 소설을 쓰며 5세기 사람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해보일 수 있지만, 어쨌건 그는 최대한 ‘5세기스럽게인물들을 그려냈다. 사실 역적전의 세 주인공은 굉장히 평면적인데, 이마저도 근대적 자아란 게 생겨나기 훨씬 전이 배경이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처럼 역적전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재미있고 모범적인 소설이지만, 이 책의 진가는 역사서와 함께 엮어 읽을 때 빛을 발한다. 작가가 탄탄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곳곳에 통념과는 전혀 다른 고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역적전을 조금 더 깊게 읽어보자.

첫 번째 키워드는 이다. 작중에서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마치 고속도로처럼 자유롭게 이용한다. 백제의 도성에 살던 사가노는 주인인 협지와 함께 배를 타고 왜국으로 가려다 신라 군함을 만나 가락국에 정착한다. 출랑랑 역시 집안이 몰락한 후 해적질을 하며 살아간다. 작중 흑막(?) 비스무레한 위치에 있는 용녀는 바다를 오가는 대규모 상단을 이끄는 선주로, 본래 가야 출신이나 육상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한다.

사람이 오가는 네트워크로서의 강과 바다, 그리고 이를 무대삼아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해상세력의 역동성에 관심이 생긴다면 바다에서 본 역사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를 보시라. 전자는 13세기 이후를 주로 다루고, 후자는 배경이 일본인지라 역적전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역사의 중심은 육상의 정치권력이고, 해상세력은 어디까지나 이들에게 복속된 존재였다는 우리의 상식을 뒤흔든다.

예컨대 이런 상상을 해보자. 전근대 한반도에선 중국인/일본인’, 중국에선 한반도인/일본인’, 일본에선 한반도인/중국인이라 불린 해상은 사실 동일집단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바다에 적을 두고 세 육지와 모두 교류하며 그때그때 출신을 둘러댄 건 아니었을까? 해상세력을 독립변수삼아 새롭게 본 역사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이동이다. 역적전의 사람들은 혼자 다니든 무리를 짓든, 원해서 간 것이든 떠밀린 것이든 여기저기 엄청나게 쏘다닌다. 사가노가 가락국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자신처럼 왜국으로 가려다 실패한 백제인들이 일종의 난민캠프를 이루고 있었다. 가야 출신인 출랑랑에게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도 남쪽으로 내려와 있던 고구려 칼잡이였다.

고대인의 활발한 이동이 소설 속 허구에 불과하지 않다는 건 동아시아 세계론의 실천과 이론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벌어지고 국경이 바뀌던 고대 동아시아에선 고향을 잃어서, 혹은 전쟁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트고 사신을 오가게 할 필요성도 컸다. 요컨대, 당시 중국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사이에는 오히려 그 이후 시대보다도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던 것이다. 국가 간의 경계가 선명해지고 육상 정치권력의 통제력이 강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여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순히 적극적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납고 강인하다는 표현이 보다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칼잡이이자 무자비한 성격파탄자인 출랑랑, 그의 라이벌인 여당아, 가야를 좌지우지하는 거물인 용녀까지, 힘 좀 쓰는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오히려 사가노나 하한기처럼 남성 쪽이 훨씬 조신하다. 곽재식이 친절하게 주석을 달았듯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한반도의 여성에 대한 좋은 책을 찾지는 못했다. 여러분께서 무지하고 게으른 글쓴이를 깨우쳐주시길 바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사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과거에 대한 상상력을 말살하지 말라는 글을 종종 접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풍요로운 오류척박한 진실보다 훨씬 좋아하는지라 이런 얘기에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상상력 운운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결과는 대부분 뒤틀린 욕망을 과거에 투사하는, ‘척박하고 위험한 오류이기 일쑤다. 곽재식의 역적전이 소중한 이유는 그래서다. 발랄한 상상력은 사료에 탄탄히 뿌리를 내려야만 비로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혹시 앞으로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거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한다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조용히 역적전을 손에 쥐어주도록 하자.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자.

고대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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