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논문 작성법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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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역사학이야말로 '독학자'가 나오기 가장 어려운 분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른바 '방법론'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사회학, 국문학은 모델과 이론, 계보가 있다. 충실히 따라가면 학계 바깥의 연구자라도 탁월한 성과를 낼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반면 역사학은 속된 말로 '몸으로 구르는' 학문이다. 역사학의 전문성이란 암묵지적 성격을 갖는다. 어디서 사료를 찾아야 하는지, 사료를 어떻게 엮어서 어떻게 내러티브를 짜야 하는지 등 일체의 교육이 도제식으로 이뤄진다. 교수와 선배에게 엄청나게 혼나면서 배운다는 이야기다. 역사학이 유독 '강단'의 힘이 강한, 나쁘게 말해 고루하고 답답한 학문이란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래서다.

역사학 트레이닝의 이런 암묵지적 성격은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누구나 열심히 '구르면' 괜찮은 역사학자가 될 수 있다. 역사학은 천재가 나오기 어려운 학문이라지 않은가. 하지만 어떻게 굴러야 할 지 모른다면, 혹은 옆에서 굴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것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다 자의 반 타의 반 대학원을 그만둘 수도 있다. 특히 사학과 학부수업에 강독, 연습류의 수업이 멸종하다시피 한 작금의 현실에서, 대학원에 갓 입학한 석사생들은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하나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단 굴러야 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두렵고 막막한 것이다. 교수님과 선배들은 화만 내고 말이지.

임경석의《역사논문 작성법》은 나처럼 어떻게 굴러야 할 지 모르겠는 석사생들을 위한 최고의 안내서다. 임경석이 누구인가, 자신의 이름을 따 "임경석체"라 불릴 만큼 유려하고 개성있는 글쓰기로 정평이 난 역사가가 아닌가. 그는 딱딱한 논문에도 내러티브를 녹여낼 줄 알고(김윤식 사회장 논문을 보라!), 대중적인 칼럼에도 깊이를 더할 줄 안다.(《독랍운동 열전》을 보라!) 요컨대, 그는 글쓰기에서 남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경지를 이룩한 인물이다. 그런 임경석이 역사논문 작성법을 강의한다니, 혹시 팁이랍시고 자신밖에 할 수 없는 뜬구름잡는 얘기나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역사논문 작성법》은 주제 선정부터 연구사 정리, 사료 노트 작성과 플롯에 이르기까지 역사논문 쓰기의 모든 것을, 누구나 읽고 따라할 수 있게끔 자세하고 친절하게 담아냈다. 내가 석사 첫 학기 교수님과 선배들에게 혼나가며 배운 암묵지를 이렇게나 정갈한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을 줄이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근데 임경석은 그걸 해냈다. 그의 역사가 인생 40년이 이 책에 압축됐다. 엄청난 깊이와 내공이 느껴지면서도, 마치 성균관대 퇴계인문관에서 수업을 듣는 것처럼 생생하고 정감이 간다. 역시 푸른역사에서 나온 글쓰기 지침서인《내 논문을 대중서로》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풍부한 '연습문제'는 덤이다.

《역사논문 작성법》은 비단 구르는 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매뉴얼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유려하고 개성적인 글쓰기도 결국 충실한 기초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단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임경석처럼 글쓰기의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한 역사가도 처음부터 글을 잘 쓰지는 않았다.(그가《한겨레21》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다.) 자신만의 독특한 문장이나 논지, 생각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남들이 다 하는 고되고, 지루하며, 얼핏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단순 작업을 묵묵히 따라갈 때 비로소 개성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늘 요행만 바라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나 같은 사람이 특히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나는 이 책을 내 책상 가장 잘 보이는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마치 곰국을 끓여먹듯, 생각날 때마다 두고두고 참고할 생각이다. 나처럼 어떻게 굴러야 할 지 몰라 괴로워하는 동료들에게도 여러 권 선물할 것이다. 구르고, 깨지고, 혼나는건 역사학도의 숙명이지만, 그래도 모르고 구르는 것보단 알고 구르는게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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