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의 전횡을 당연시하는 한국인의 속성과 더불어, 그가 한국에 와서 받은 충격 가운데 하나는, 유럽사회나 러시아 지식인들이 당연시하는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가지려면, 이 나라에서는 `운동권`이라는 일종의 `반란자` 대열에 속해야만 한다"는 낯선 현실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요즘은 언어적으로 많이 순화되어 빨갱이 대신 좌파라도 불러 주지만, 좌파라는 완곡 어법은 여전히, 곧바로 `공산단 일당 독재,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 평등한 분배`를 의미하는 스탈린줄의를 뜻하고, 나아가 김일성, 김정일 세습 왕가의 추족 세력임을 증명해 주는 불도장이다.
서양에서 대학은 그 기원부터 하나의 자치도시로 여겨졌고 그만큼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유럽의 대학은 국가에 대해 진리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요구하며 충돌을 뒤풀이했다. 하지만 근대화의 필요성에 의해 수입된 일본의 대학은 그 사명과 교육의 이념이 국가주의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학문 그 자체가 뒤틀어져 버렸다. 이 사항엔 아주 오래된 "동양적 대학의 특징"이 재차 개입되는데, 유교 교육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교육기관은 "동양적 전제주의에 종속된 관료 기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라는 역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위의 두 사항은 일본의 근대화 기획을 고스란히 이식하고 모방해 온 우리에게 딴 나라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승르의 원인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싶어하지만 패배의 원인은 등한시한다. 곧잘 사람들은 승리에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승리는 항상 상황을 운용하는 자의 것이다. 다시 말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을 이용하고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반면 패배에는 승리가 갖고 있는 않은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러니 패배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이 일단 `피박`을 면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책을 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막 우물로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문득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두렵고도 측은한 마음이 일 것이다."즉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본 낯선 사람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사람의 마음마다 아이를 걱정하는 `착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오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그 문장은 분명히 `출척측은(두렵고도 측은한)이라는 네 글자를 사용했다"면서, 왜 측은(가엾음)만을 말하고 출척(두려움)은 말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거기에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종오의 논박에 의하면, `측은`한 마음이 있기 전에 먼저 `출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어린아이`가 있기 전에 내가 먼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우선 내가 있고서야 비로소 아이가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니깐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우물에 빠질 수도 있고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터이니 두려운 마음을 생길 리가 없다. 내가 없으면 곧 어린아이도 없고, `출척`의 마음이 없으면 `측은`의 마음도 없다."
계속되는 설명에 따르면 어린 아이는 `나`의 확대형이고 측은은 출척의 확대형으로, 맹자가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확대하라고 가르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측은지심은 출척지심을 확대한 것이라는 말을 삼갔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오해을 일"으켰다고 한다. 송대 유학자들은 이 점을 살펴보지 못한 채 측은지심을 인성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자학은 봉건적 윤리만 남기고 인간의 욕망을 버리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종오는 소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삼국시대 인물부터 시작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각국 정치가 그리고 주변 친구들의 성공과 실패에 이르는 모든 사안을 곰곰히 분석한 끝에, 두꺼운 얼굴(면후)과 시커먼 마음(흑심)을 가진 자만이 영웅이 되고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는 후흑의 논리를 발견했다. 마키아벨리즘이 저자의 진의와 시대적 문맥을 끊어 낸 채 대중들에게 희화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이종오의 후흑 논리 역시 다분히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가 후흑 교주를 자처하는 그 순간,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성선설, 사단칠정, 춘추필법에 의한 의인관과 명분론 등등, 중국 대륙을 겁박하고 있던 주자학이라는 패러다임이 무너져 버렸다고 해도 좋다.
고미숙이 탐사하는 근대란, 타자의 내면을 규제하고 주체들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과 욕망을 관리하는, 그래서 무수한 `당대의 근대`와 구분되는 그런 근대다.
또 사실대로 말하면 국기, 국가, 국경일 등등의 국가적 표상물은 속이 비어 있는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불안하게 비끄러매는(단일민족이라고 자랑하는 우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와 대립이 존재하는지!) 급조된 상징 기제(태극기가 얼마나 임의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일 뿐이다. 하지만 문신 새긴 기억은 전자의 여유도 후자의 이성적 판단도 원천 봉쇄한 채, 끝없는 경배만을 바란다.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살인좌나 강도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우는 살인을 행하기 직전이거나 강도를 모의할 때이다. 그 순간이 아니라면 일생 동안 한순간도 살인죄나 강도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즉 `길에 침을 뱉으면 벌금 얼마, 무단 횡단을 하면 벌금 얼마`하는 식으로 법을 의식하며 살지 않는 것이다. 법이 가진 이런 타성은, 미성년과의 성 매매자를 신상 공개하는 법이 점점 강화되는데도 매번 발표하는 성 범죄자 숫자가 왜 줄어들지 않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렇듯 법이란 어떤 행위에 대해 사후 처벌과 조치를 할 뿐이다. 우리가 법만능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법은 범죄와 사회문제를 억제하는 최고의 예방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후약방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문제나 범죄는 법 이전에, 사회가 함께 관심을 기울여 해결해야지, 처벌의 강도를 높인다고 해서 해결될 게 아니다.
서양 고전음악리란 뭔가? 그것은 대중음악과 어떻게 다른가? 고급 문화는 무엇이고 저급 문화란 무엇인가? 고전이란, 고급 문화란 한마디로 `귀`의 세계를 향해 있다. `나는 대중 음악이 싫어!`라고 말할 때, 진정한 음악 애호가들은 대중음악이 `소음`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게 아니라, 소음에도 미치치 못하며, 소음조차도 거부하는 `눈`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고급과 저급의 차원이 아나라, 귀와 눈이 지향하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담집 <인텔리겐챠>를 통해 친일파에 대한 나름의 판단 기준을 일찌감치 세워 놓고 있다. "저는 친일 문제에 두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일본 식민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고, 또 동아시아 각국이 우려하는 일본의 우경화나 일본의 또 하나의 측면인 전쟁책임과 연관되는 것으로, 일본의 총력전 체제에 대한 협력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건 명백히 구분되어야 하는 건데요. 조선에 대한 신민지 지배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또는 태평양전쟁 발발의 책임 문제는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징히 교묘하게 얽혀져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조선 지배에 협력한 부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일본 침략 전쟁을 수행할 때 전쟁에 협력한 부류가 있습니다. 물론 이건 논리적인 문제겠습니다만, 이걸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친일파라고 하는데 논리적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바그너의 예는 `잘못된 역사에 부역한 예술가들을 어떤 기준으로 단죄할 것인가?`에 준거점을 예시해 줄 수도 있다. 어느 예술가가 나치나 일제와 같은 잘못된 역사에 부역을 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적극성,자발성, 연속성과 더불어 부역이 이루어지던 당시 그가 당명했던 강압도와 부역 이후의 반성도가 함께 참작되어야 한다. 이럴 때 바그너는 우리나라의 이광수처럼 적극성,자발성,연속적이었거나, 반대로 서정주처럼 소극적,수동적,단속적이지도 않았다. 탐욕스러운 성격과 무정견에 가까운 기회주의적 행태로 볼 때, 부역자가 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은 있었으되 그는 일찍 죽는 것으로 시험을 피해 갔다.
우여곡적 끝에 태어난 박정희는 모유를 거의 먹지 못했으며, 어머니로부터 "널 낳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이 일화를 놓치지 않고 낚아챈 신용구는 "아직까지 사고체계가 미숙하고 단순한 5세 이전의 아이가 어른들의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이때 박정희는 "엄마가 진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유기 불안"에 빠져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어머니의 눈길과 손길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유아는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믿기 뙤는데, 바로 이것이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자기애의 핵심이다. 건강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심리적 자산`에 해닿나는 자기애는 현실의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주고 쉽게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일찌감치 유아독존적인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신경증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하지만 중국의 수필가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 가운데 `중국인들과 같은 대가족 사회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따위가 생겨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듯이, 오디이푸스 콤플렉스의 문화적 일반화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작년(2005)에 갑작스레 타계하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전인권은 그의 평판작 <남자의 탄생>에서, 서양과 달리 한국의 육아 문화는 사내아이로부터 어머니를 차단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상대화했다. 서양식 육아는 아이의 성장에 따라 체계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막지만, 한국에서는 심하면 12세가 되기까지 남아에게 동침권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에게 홀대받는 것은 남편(아버지)이다. 이렇듯 대폭적인 구강 만족(젖 빨기)을 맞본 한국의 남아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말 그대로 바다 건너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남성에게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성적 박탈감이나 아버지로부터의 견제(거세 위협)가 문제되는 게 아니라, `동굴 속 황제`로 키워진 유아독존적인 자기애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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