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미술`이라는 개념이 형식화되고 고정되면 쉽사리 권력으로 변한다. 가령 어떤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만이 `우리`이며 `우리`란 어떤 특정한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순환논리는 배타적인 자의식을 공공히 한다. `언어`를 `미의식`으로 치환해보면 `우리 미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닌 위험성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와 마찬가지로 미술학교, 미술관, 공공 전시회, 미술 시장의 형성 등을 통해 만들어진 `미술`이라는 제도 역시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이며 국가주의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 선생의 술회는 프로모 레비를 떠올리게끔 했다. 아우슈비츠의 강제 노동을 참아내며 살아남은 그는 생환 후, 문학가가 되어 40년 이상에 걸친 증언활동을 이어오다가 지친 나머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에세이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증언의 불가능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문제를 향한 뼈아픈 고찰을 남겼다.
레비는 자신이 진정한 증언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자문한다. 살아남은 자신들은 우연한 행운, 특권적인 지식과 기술, 처세술로 인해 더 약하고 더 성실한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남은 것이다. 진정한 증언자들,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증인인 셈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만이 진정한 증인이라면 도대체 누가 증언할 수 있을까? 이 풀수 없는 의문이 무거운 짐이 되어 생존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이렇게 어린 시절에 경험한 장례의 기억을 불러와 그렸던 대학 졸업작품이 <초혼행>이다. 근데 이전의 인간에게 죽음은 가까운 대상이었다. 노인과 병자는 오늘날처럼 병원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의 눈 앞에서 죽었다. 우리는 그 감촉과 냄새까지 느껴가며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생활 속에서 인식했고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배웅했던 것이다. 물론 산자와 죽은 자의 슬픈 헤어짐이긴 했지만 부조리한 운명은 아니었다. 과학의 힘을 총동원해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여기고 죽음의 감촉과 냄새를 청량한 병원 속에 가두어버린 근대인은 이렇게 죽음과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말하자면 죽음의 소원화-은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산업혁명기에 빠르게 진행됐다.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예술 자체가 하나의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아, 이건 예술이니까, 아트 프로젝트니깐..."라면서 관대히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은 친구에게 대뜸 "꿈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지금 제가 예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아하"하면서 이해해주는 식이죠.
`한국인`이란 한국인이라는 `본질`을 지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문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정연두의 작품이 `한국적`인 까닭은 한국이라는 본질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맥을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다.
누가 나에게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상으로부터 20센티미터 정도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너무 높으면 자세히 볼수 없고 현실 속에서 파묻히면 좁게 볼 수밖에 없다.(윤석남)
그리젤다 폴록으 드가와 그의 지인이었던 미국 여성화가 메리 카샛과의 비교를 통해 여성이 그리는 여성상과 남성이 그리는 여성상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보인다고 논증한다.
(카셋의 작품에) 그려진 여성들은 드가 작품에 묘사된 목욕하는 여성과는 달리 훔쳐보는 시선 속에 놓여 있지 않다. 드가의 여성들이 있는 장소는(....) 파리 변두리의 매음굴이나 공창가였을지 모른다. 카샛의 그림 속, 서서 목욕하고 있는 하녀의 모습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여성을 `천한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 속에 가둬놓지 않는다. 동시에 카샛은 자기 주변의 여자들이 일하는 공간을 표현다.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상품화하지 않고 계급적으로 자리매김하여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남산에 있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 생산과 생명의 물, 생업으로서의 물, 나의 희망으로서의 물이 하필이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안기부 놈들이 이른바 나를 물과 맞서게 했고, 결국 그 물에게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날조한 대로 저는 북한에도 두 번이나 왕래한 간첩이 되어버린 거죠.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후로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살아나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에 대한 공포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개념 중 하나인 물에 공포를 가진채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물과 정면대결하자고 생각했어요. 누구도 나를 치료해주지 않을 테니 스스로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거죠. 그때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고문을 받은 환경이 무엇이건 그림을 통해 본격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보는 행위로 대결을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서정적인 작품만을 골라 전시했던 작품이 <물속에서 스무 날>이라는 연작입니다.
자신과 가족 앞에 펼쳐진 운명을 겪으며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을 배웠다"던 그는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이 도리어 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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