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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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지면으로 폭넓고 방대한 지식을 압축해 히틀러의 생애와 사상을 담아낸 탁월한 역사가이자 비평가. 3년 전에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을 단숨에 읽고 기억하는 저자 '제바스티안 하프너'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그 뒤로 저자의 글이 번역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독일인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 읽게 된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가 연이어 출간되었다. 독일 근대사 3부작이라 할만하다.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보다 개인적으론 가독성이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제3제국이 등장하기 전 도이치 연방과 제국 그리고 바이마르 공국에 대한 나의 무지와 관심 부족일게다. 다만 무지한 만큼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았다. 그 사실과 현재 우리의 현실의 모습이 겹쳐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부분이 곳곳에 눈에 밟혔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라는 맑스의 시대를 관통하는 문구가 절로 떠올랐다. 1920~40년 도이치에서 있었던 역사적/시대적 오류가 100년이 지난 이곳. 대한민국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역사적 실패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지헤를 얻는다는 것이 과한 가능한 일일까?

경제 부흥이라는 신화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모습. 아군과 적을 구분하는 지배자의 뻔한 논리에 순응을 넘어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군중 심리. 

프레모 레비처럼 우리는 '가라앉은 자'의 희생을 밟고 운 좋게 살아남은 '구조된 자'로써 역사적 진보와는 거리가 먼 역사적 퇴보에 동참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이 늘 긴장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낯빛을 바꿔 구세주의 모습을 띄고 등장하는 그들과 우리 자신을 감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대한민국)의 행복과 번영만을 앞세워 저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는 선동하는 자들을 견제해야 하는 이유다. 그들의 행동들은 파시즘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그 사이 바뀐 도이치 정부는 두 번째로 전쟁 배상금 부담, 심지어는 영 플랜 아래 새로 나타난 규칙까지 포함하여 배상금 부담을 털어낸 기회로 잡았다. 이번에는 1920년대 초반처럼 대규모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의도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서였다. 이번의 디플레이션은 도이칠란트를 가난하게 만들어 더 이상은 전쟁배상금을 갚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채권자들도 그 점을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P 188-

1930~33년에 점점 더 가난해진 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체로 세계 경제공항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잠깐 지적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만 맞는 말이다. 그보다 그 이전 1919~1923년 사이의 인플레이션이 패배한 전쟁의 결과라는 말도 일부만 맞는다. 두번 다 그렇다. 전쟁이 끝나고 제때에 화폐개혁을 단행했더라면, 도이칠란트의 모든 저축 자산의 몰수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경제정책을 취했더라면, 도이칠란트에서 세계 경제공항의 결과가 더 악화되는 대신 매우 많이 완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중략) 브뤼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정책을 실천했다. -P189-

1930년에 이 정당(민족주의-사회주의 정당)을 대규모 정당으로, 이어서 1932년에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만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경제공항에서 찾을 수 있다.(중략) 실업자가 600만 명에 이르렀던 1932년에, 플래카드 하나에는 표현주의 양식으로 굶주린 대중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아래 쪽에 "히틀러,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구절만 적혀 있었다. 그것이 적중했다. 가난이 현실이었다.(중략) 대중을 히틀러에게로 몰아간 첫째 이유는 가난이었다.
둘째 이유는 갑자기 다시 강해진 민족주의였다. 그동안 민족주의는 이 시기의 경제적 곤궁처럼 그렇게 구체적으로 쉽사리 설명되지 않았다.(중략) 아무도 나치만큼 그렇게 강력한 확신을 품고, 따라서 설득력을 지니고 민족주의 감정, 민족의 자부심, 민족의 원한에 호소하지 않았다. 도이칠란트가 1차 대전에게 이겨야 마땅했다. 다만 간계와 배신을 통해 그런 승리를 도로 빼았겼다고 그들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P208-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이 선거에서 이긴 셋째 이유는 히틀러 개인에게 있었다. 이 말이 많은 사람을 화나게 하겠지만, 그래도 이말을 해야 한다. 히틀러는 자기 시대 도이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 것이 아니라 매력적으로 보였다. 매력을 넘어 사람을 사로잡았다.-P210-

나 자신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는데 ‘민족주의 봉기‘는 두 가지 뿌리에서 자라 나왔다. 첫째로는 1933년 이전 몇 해 동안의 정치적 불확실성에 대한 피로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자기가 대체 어디 있는지 알고자 했고, 확고한 손길과 확고한 의지를 지닌 한 남자가 정상에 있기를, 질서가 잡히기를 원했다.(중략) 히틀러가 정당을 없앴을 때, 3월 5일 나치당이 얻은 유권자 수를 훨씬 넘어서는 시민 계층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가 그를 찬성했다.
이런 분위기가 옛날 시민 계층 정당들의 대표들에게 저항하기 힘든 인상을 주었다.(중략) 하지만 1933년 3~7월에 일어난 일의 증상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그 온갖 불법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 설치나 마구잡이 체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한 반유대주의 정책의 처음 징후들에도 불구하고,광범위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하나의 확신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위대한 순간이다.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 신이 보내신 한 사람, 민중 한가운데서 일어선 지도자를 찾아낸 순간이다. 그가 기율과 질서를 찾을 거고,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아, 도이치 제국이 새롭고 위대한 시간을 맞이하게 해줄 거다"

동시에 히틀러의 경제 기적도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933~37년 사이에 대량 실질 상태를 완전 고용 상태로 바꾸어준 경제의 활성화인데, 이로써 히틀러는 옛날 사민당 추종자 거의 전부와 옛날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람의 상당수를 자기편으로 돌려놓거나, 적어도 중립으로 만들었다. -P235-

괴벨스는 전 국민이 나치 이념을 고백하게 하려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미디어를 동원해서 도이치 국민에게 총통 통치 아래, 나치의 상징 아래 재건된 건강한 사회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괴벨스의 영화 산업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났다. 선전부 장관은 이따금 대규모 자금을 투자해서 몇 개의 선정용 영화를 제작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전체 영화 생산은 명랑하고 해롭지 않는, 그 밖에도 기술적,예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들로 채워졌다.(중략)
제3제국의 배우와 감독들은 대부분 당시 사람들이 ‘반대파‘라고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말하지만 제3제국을 무시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많은 이들이 심지어 일종의 저항을 한다는 망상까지 지녔다. 이렇게 해롭지 않은, 그리고 민족주의-사회주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을 만들어서 도이치 국민을 기만하는 괴벨스의 작업을 함께 도와주었다는 것, 그러니깐 모든 일이 그냥 조금만 나쁠 뿐이고, 근본적으로 여전히 극히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느낌을 만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P243-

처음으로 실패의 가능성이 드러난 1941년 말에 벌써, 그는 외국 외교관들을 개인적으로 접견한 가운데 이런 발언을 했다. "도이치 민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린 만큼 충분히 강하고 또 희생의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이 민족은 스러져서 더욱 강한 다른 세력에게 파괴되어야 합니다. 나는 도이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오." 도이치 정치가의 입에서는 참으로 다시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전재 마지막에 실제로 히틀러는 동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군사적 패배를 도이치 민족 전체의 몰락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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